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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셜록 홈즈 탄생시킨 코난 도일은 마마보이였다

셜록 홈즈 탄생시킨 코난 도일은 마마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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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 이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셜록 홈즈를 떠올린다. 탐정일 것 같은 이 양반의 본업은 원래 의사였다. 1859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에든버러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도일이 의사 개업을 했을 때 환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앉아 기다리다 지쳐서 뭘 했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환자들에겐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사 코난 도일보다 작가 코난 도일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니까.   1914년의 도일. (위키피디아) 은사를 도둑질하다, 조지프 벨 교수의 변신 에든버러 의과대학 시절 도일의 은사는 조지프 벨(Joseph Bell, 1837~1911)이다. 벨 교수는 환자를 딱 보고 직업과 최근 활동을 맞히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마치 마술사처럼 말이다. 그는 의학 진단에 과학적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의 외과 주치의이기도 했다. 코난 도일은 이 은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베껴서 셜록 홈즈를 만들어냈다. 1892년 그는 벨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저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생님께 셜록 홈즈를 빚지고 있습니다. 솔직하긴 하다. 요즘 같았으면 저작권 시비가 붙었을 법한 일인데, 벨 교수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의 모습이 불멸의 탐정이 된 것에 흐뭇했나 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서명. (위카피디아) 셜록을 죽인 죄, 그리고 어머니의 한마디 1893년 코난 도일은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셜록 홈즈를 죽였다. 악당 모리아티 교수와 함께 폭포에서 추락시켜 버렸다. 이유는? 더 고상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자신의 재능에 비해 저급한 장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영국 전역이 난리가 났다. 셜록 홈즈를 죽인 뒤 영국의 전 지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뤄지고 집 앞에 셜록을 살려 달라는 영국인들의 청원이 이어졌다. 독자들은 검은 완장을 차고 다니며 애도했고, 코난 도일의 집 앞에는 항의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견디다 못한 코난 도일이 어머니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어머니의 답장이 걸작이다. 코난, 네 마음을 잘 안단다. 그런데 셜록은 왜 죽인거니? 어머니마저 셜록 편을 든 모양이다. 결국 코난 도일은 1901년 셜록을 부활시킨다. 문학적 자존심보다 독자들의 압박과, 무엇보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도일 1893년. (위키피디아) 기사 작위를 받은 전쟁 옹호자 1901년 보어전쟁(제2차)에 자원해 군의관으로 일시 복무한 뒤,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수십 편 써내며 애국심을 진작시키고 외국 언론의 비난에 맞섰다. 보어 전쟁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벌인 식민지 전쟁이다. 영국은 강제수용소까지 운영하며 수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냈다. 코난 도일은 영국의 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글을 썼다. 당시 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애국적 행동이었겠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제국주의를 옹호한 꼴이다. 1902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코난 도일 자신은 보어전쟁을 정당화 하는 수필을 써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관보에는 이유가 명시되지 않았으니 셜록 홈즈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기사 작위를 받을 때도 처음엔 주저했다가 어머니의 설득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 양반, 마흔 넘어서도 어머니 말씀은 거역 못하는 마마보이 였던 모양이다.   시드니 페이지트 작, 셜록 홈즈 초상화, 1904년. 진보적 칼럼니스트의 얼굴 흥미롭게도 코난 도일은 제국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진보적인 면모를 보였다. 아일랜드에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제로 칼럼을 썼고, 큰 반향을 얻어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아일랜드의 자치를 적극 지지했다. 결국 1922년 아일랜드는 자치권을 얻었고, 1937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그는 죄를 뒤집어쓴 무고한 피고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인도계 영국인이 범죄 누명을 쓴 사건에서, 그는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진실을 밝혀냈다. 또한 벨기에 레오폴드 2세(Leopold II, 1835~1909)가 콩고에서 자행한 만행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제국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지식인이라는, 모순적이지만 당시로선 그나마 양심적인 모습이었다. 가정, 정치, 사회, 군사, 경제, 사법, 언론, 국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로 치면 종합 칼럼니스트였다. 지방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정치참여까지 시도했으니, 작가의 사회적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던 셈이다.   도일의 출생지 맞은편에 세워진 에든버러의 셜록 홈즈 동상은 1970년경에 철거되었다.(위키피디아) 망령과 대화하는 기사 양반 말년의 코난 도일은 조금 이상한 길로 빠진다. 첫째 아들 킹슬리(Kingsley, 1892~1918)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자 심령술에 빠져들었다.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다고 믿고, 영매들을 신봉했다. 과학적 추리를 강조하던 셜록 홈즈의 창조자가 정작 자신은 비과학적 미신에 매달렸다. 그는 심령술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며 기존 종교와 비교하는 작업까지 했다. 친구였던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 1874~1926)와는 이 문제로 결별하기도 했다. 후디니가 영매들의 속임수를 폭로하자, 코난 도일은 화를 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마이링겐의 홈즈 동상과 영국 교회. (위키피디아) 영국 사회에 남긴 유산, 과학과 추리의 대중화 코난 도일이 영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과학적 추리의 대중화다. 셜록 홈즈는 단순히 재미있는 탐정이 아니었다. 그는 지문, 발자국, 흙먼지 같은 증거를 통해 사건을 해결했다. 당시로선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실제 범죄 수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셜록 홈즈는 백년이 넘도록 전 세계에서 영화, 드라마, 연극, 만화로 재탄생하고 있다. 셜록 홈즈가 실존 인물인 줄로 아는 사람도 있다. 허구의 인물이 현실을 넘어선 셈이다. 이는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인물이 단순한 소설 속 캐릭터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가 추리, 공상과학, 모험, 역사 등 소설의 다양한 장르를 개척한 점도 중요하다. 〈잃어버린 세계〉 같은 작품은 이후 수많은 공상과학 소설에 영향을 줬다. 한 마디로 도일은 장르 문학의 선구자였다.   아서 코난 도일의 집, 사우스 노우드의 테니슨 로드, 오른쪽에 파란색 명판이 있다. (위키피디아) 진보와 보수 사이에 선 모순적 인간 코난 도일은 모순덩어리였다. 제국주의 전쟁을 옹호하면서도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했고, 과학적 추리를 강조하면서도 심령술을 믿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정의로운 지식인이었지만, 동시에 영국 제국의 전쟁을 정당화한 애국자였다. 이런 모순은 사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지식인의 전형이기도 하다. 계몽과 야만, 이성과 미신, 자유주의와 제국주의가 뒤섞여 있던 시대. 코난 도일은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이다.   1973년 런던 크로이던 자치구 런던 SE25 5RT 사우스 노우드 테니슨 로드 12번지에 그레이터 런던 시의회가 세운 파란색 명판. (위키피디아) 셜록보다 흥미로운 코난 도일 셜록 홈즈는 불멸이 됐지만, 코난 도일 본인은 복잡하고 모순된 인간이었다. 의사로 실패하고 작가로 성공했으며,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죽였다가 어머니 때문에 되살렸고, 제국주의자이면서 정의로운 칼럼니스트였으며, 과학주의자이면서 심령술사였다. 그는 1930년 7월 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Steel True, Blade Straight) 라고 새겨져 있다. 과연 그랬을까? 그보다는 복잡하고, 모순되며,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다 가 더 정확한 평가로 보인다. 코난 도일이라는 이름은 추리소설 그 자체다. 그의 인생도 하나의 미스터리다. 셜록 홈즈가 풀 수 있었을까? 아마 그도 고개를 저었을 법하다. 왓슨, 인간은 가장 복잡한 수수께끼야. 도일과 그의 가족, 1924년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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