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해고 압력, 싱가포르는 3만5000명 재교육…AI가 갈라놓은 금융권 [교육] 싱가포르가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금융권 일자리 충격에 대응해, 해고 대신 대규모 재교육을 선택했다. 미국과 유럽 금융사들이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개선을 이유로 인력 감축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흐름과 대비되는 선택이다.
8일(현지시각) 블룸버그에 따르면, 싱가포르 통화청(MAS)과 정부, 현지 3대 은행은 은행 종사자 약 3만5000명 전원을 대상으로 AI 리터러시와 실무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AI 확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고용 충격을 최소화하고, 생산성 향상을 인력 재편이 아닌 업스킬링으로 흡수하겠다는 전략이다.
OCBC, DBS, 유나이티드 오버시즈 뱅크(UOB) 등 3대 은행은 향후 1~2년간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AI 교육을 진행한다. 은행 본사에서는 실제 업무에 AI를 적용하는 실습형 워크숍이 상시 운영되고 있으며, 정부는 교육비와 임금의 상당 부분을 보조하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와 정부, 현지 3대 은행이 손잡고 은행원 종사자 3만5000명 전원을 대상으로 AI 리터러시와 실무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나섰다./ 챗gpt 생성이미지
프라이빗 뱅커 ‘하루 일’이 10분으로
싱가포르 은행권은 이미 에이전트형 AI를 실무에 깊숙이 도입하고 있다. OCBC의 프라이빗 뱅킹 조직에서는 문서 작성과 리서치, 고객 대응을 지원하는 5개의 AI 에이전트가 도입돼, 과거 하루 종일 걸리던 작업이 10여 분 안에 끝나는 수준까지 효율이 개선됐다.
이 과정에서 금융당국은 AI의 허위 정보 생성 문제를 주요 리스크로 보고, 안전장치 검증을 요구했다. 은행들은 오류 발생 시 대응 절차와 직원 매뉴얼을 제출했고, MAS는 자체 엔지니어 검토를 거쳐 시스템이 충분한 통제 장치를 갖췄다고 판단해 도입을 승인했다.
싱가포르의 접근법은 기술을 먼저 도입하기보다, 규제 신뢰를 선행 확보한 뒤 현장 적용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AI 확산 과정에서 규제 충돌과 사회적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생산성, 싱가포르는 고용 안정
이와 달리 미국 금융권에서는 AI 도입이 생산성 향상과 함께 인력 축소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JP모건체이스와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등 주요 은행 경영진은 AI가 업무 효율을 크게 높이면서 장기적으로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골드만삭스는 AI 활용 확대를 전제로 한 인력 감축 가능성과 채용 속도 조절 방침을 내부적으로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기술을 두고도, 미국이 비용 효율과 인력 구조 조정에 무게를 두는 반면 싱가포르는 재교육을 통한 전환 흡수를 택한 셈이다.
해고보다 재교육”… 정부·은행의 역할 분담
AI 도입 효과는 생산성 지표로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OCBC와 DBS에서는 기존에 한 시간 걸리던 고객 주문 서류 작성이 10~15분으로 단축됐다. DBS는 내부 AI 비서가 매달 100만 건 이상의 프롬프트를 처리하고 있으며, 고객센터 통화 처리 시간도 최대 20% 줄었다. UOB는 전 직원에게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을 제공하고 300개 이상의 AI 활용 사례를 전사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컨설팅 업계는 관계관리자 1인당 관리 고객 수가 기존 50명 수준에서 60~70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비용 절감과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진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DBS가 AI 도입을 통해 향후 세전 이익을 최대 17%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 은행들은 대규모 정규직 해고를 피하고 있다. OCBC와 UOB는 AI 관련 인력 감축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DBS도 정규직은 유지하되 향후 3년간 계약직과 임시직 약 4000명을 자연 감소 방식으로 줄일 예정이다.
AI 전환의 그늘… 세대 간 격차와 새로운 불안
싱가포르 금융권의 AI 재교육은 부트캠프 형태의 집체 교육과 현업 연계 과제로 구성된다. 직원들은 AI가 만들어낸 허위 정보를 직접 식별하고, 규제에 맞는 활용 방식을 익힌다.
코로나19 시기 고용 대책으로 출범한 국가 직업 위원회와 은행금융연구소는 금융사와 함께 직무를 재설계하고, 중견·신입 인력을 대상으로 최대 90%의 급여를 보조하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만 현장의 체감은 엇갈린다. 16년차 프라이빗 뱅커는 고객 문서 작업 시간이 크게 줄어 대면 시간이 늘어난 반면, 조직의 성과 기대치가 함께 높아져 압박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40년 이상 근무한 고령 직원들은 낮에는 영업, 밤에는 온라인 AI 강의를 듣는 이중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싱가포르국립대 조헨 비르츠 교수는 지금 인력을 대거 줄였다가 몇 년 뒤 다시 채용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이라며 재교육을 통해 기술 전환을 흡수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