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니 핵물질 추적해 지상핵실험 금지 이끈 프랭클린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물리학 박사가 되고, 아이들의 젖니로 핵실험을 막고, 대학교를 상대로 임금차별 소송을 걸어 이기고, 기술문명의 어두운 그늘을 해부한 책을 쓰고, 94세까지 살다 간 사람은 누구일까.
마블 영화 주인공이냐고? 아니다. 캐나다 물리학자 우르술라 마르티우스 프랭클린(Ursula Martius Franklin, 1921~2016)이다.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의 삶과 생각은 지금 한국에 오히려 더 뜨겁게 들어맞는다.
우르술라 프랭클린이 2006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의 매시 칼리지에서 열린 우르술라 프랭클린 선집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수용소 벗어나 박사까지, 도덕적 빚 을 진 사람
1921년 9월 16일,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우르술라는 루터교 고고학자 아버지와 유대계 미술사학자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이었다. 1940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그는 1943년,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갔다. 스물두 살이었다. 부모와 따로 수용된 채 혹독한 추위 속에서 파손된 건물을 수리하는 노역을 18개월 했다. 두 발과 다리에 박힌 동상은 평생의 통증이 됐다. 어머니 쪽 친척들은 대부분 가스실에서 생명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베를린 대학교로 돌아가 1948년 실험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49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보통사람이라면 세상에 등을 돌릴 만도 한 삶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는 이것을 도덕적 저당 (moral mortgage)이라 불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스실에서 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 이 삶은 어쩌다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빚을 갚는 방식으로 그는 94년을 살았다.
1953년 미국의 핵무기 실험. 프랭클린은 이러한 지상 실험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위키피디아)
여성으로 금속공학자가 된다는 것
1952년 독일계 유대인 공학자 프레드 프랭클린(Fred Franklin, 1921~2016)과 결혼한 프랭클린은 1967년 토론토 대학교 금속·재료공학과 최초의 여성교수가 됐다. 1984년에는 토론토 대학교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학교수(University Professor) 칭호를 받았다. 이것이 단순한 최초 기록이 아닌 이유는, 당시 공학분야에서 여성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버텼다. 그리고 혼자만 올라가지 않았다. 동료 여성교수들과 함께 토론토 대학교를 상대로 임금차별 소송을 제기했고, 2002년 대학 측은 이전 여성교수들이 부당하게 적은 임금을 받았음을 공식 인정했다. 소송 하나로 과거의 불의까지 바로잡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여성이 지식탐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아왔기 때문에 심각하게 빈곤해져 있다.
여성과학자들은 남성 동료들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다른 목적으로 도구를 쓴다고 그는 믿었다. 그 다양성 없이는 과학도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고도 믿었다.
프랭클린이 2006년에 출간한 평화주의, 페미니즘, 기술, 교육 및 학습에 관한 책의 표지.(위키피디아)
젖니로 핵실험을 막다
1960년대 초, 핵실험 버섯구름이 줄줄이 피어오르던 냉전 시대, 프랭클린은 여성의 목소리 (Voice of Women)라는 단체의 연구위원장으로서 기막힌 작전을 구상했다. 핵폭발 낙진 속 방사성 물질인 스트론튬-90이 어린이들의 뼈와 치아에 축적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프랭클린은 캐나다 전역에서 어린이들의 유치(젖니)를 수집해 분석했다. 과학적 증거는 냉정하고 명확했다. 실제로 핵실험이 아이들의 몸에 독을 심고 있었다. 1963년 이 자료를 바탕으로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같은 해 대기권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무기가 아닌 아이들의 이로 핵실험을 막은 것이다. 이보다 통쾌하고 평화로운 승리가 또 있을까.
고대 중국의 청동 정(鐵). 금속공학자로서 프랭클린은 이러한 의례용 그릇을 제작하는 데 사용된 규범적인 방법을 설명했다.(위키피디아)
1989년에 이미 오늘을 말하다
프랭클린이 1989년 캐나다 방송국 CBC에서 한 연속 강연이 기술의 실제 세계 (The Real World of Technology)라는 책으로 묶였다. 30년이 넘은 지금 읽어도 놀랍도록 날카롭다.
그는 기술을 두 가지로 나눴다. 하나는 전일적 기술 : 도예가, 대장장이처럼 장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 전체를 스스로 통제하는 기술이다. 다른 하나는 규정적 기술 : 공정을 잘게 쪼개 각 단계를 다른 사람이 담당하도록 만든 기술, 즉 조립라인의 논리다.
문제는 이 규정적 기술이 공장을 넘어 행정, 교육, 의료, 사회 전반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쓸 기회를 잃고 지시에 따르는 데 길들여진다. 프랭클린은 이것을 순응의 문화 (culture of compliance)라고 불렀다.
그는 또 오늘날 소셜 미디어를 예언이라도 하듯 경고했다. 방송과 광고가 만들어내는 가짜 현실 이 실제 현실을 대체하고, 일방향 소통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다고. 1989년의 경고가 오늘날 더 실감나게 들리는 것이 씁쓸하다.
많은 기술 체계는 실제로 반(反)인간적이다. 기술은 해결책의 원천으로, 사람은 문제의 원천으로 취급된다.
프랭클린은 이와 같은 가정용 재봉틀을 이용한 바느질이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는 열악한 작업장에서 값싼 옷을 생산하는 산업화로 이어졌다고 썼다. (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프랭클린
자, 이쯤에서 이 이야기를 바다 건너 한국으로 가져오자.
첫째, 순응의 문화 문제. 수십 년간 표준화된 입시 경쟁이 아이들을 잘게 쪼개진 공정의 부품으로 만들었다. 정해진 답이 있고 그 답을 빨리 고르는 사람이 이긴다 는 논리가 학교를 넘어 직장과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 프랭클린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교육은 사람이 기술을 통제하도록 가르치는가, 아니면 기술의 지시에 따르도록 훈련시키는가?
둘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프랭클린은 군사 연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무기수출국이 되어가고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소가 방산연구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라는 말로 모든 것을 묻기 전에, 프랭클린의 질문을 한 번쯤 빌려 쓸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셋째, 여성과학자 이야기. 한국 여성연구원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랭클린이 1967년에 개척한 자리를, 한국여성들은 현재도 여전히 개척 중이다.
넷째, 기술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문제. 배달 플랫폼 노동자들은 알고리즘이 짜준 동선을 따라 달린다. 요양보호사들은 전산 입력 업무에 치여 정작 사람을 돌볼 시간이 줄어든다. 프랭클린의 언어로 말하자면, 돌봄이라는 가장 전일적인 행위를 가장 규정적인 기술로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평화의 재정의. 한반도에서 평화는 여전히 전쟁이 없는 상태 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프랭클린의 말처럼 평화란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자 두려움의 부재 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해고 통보를 두려워하며 사는 것, 집값 폭등으로 청년들이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 그것도 프랭클린의 기준으로는 평화가 아니다.
가장 안전한 사람들이 가장 불안정한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 우르술라 프랭클린 명예교수의 말이다. (Celebrating women of impact: a Q&A with Ursula Franklin - U of T Engineering News)
94년의 삶이 남긴 것
우르술라 프랭클린은 2016년 7월 22일, 94세 나이로 토론토에서 숨을 거뒀다. 남편 프레드 프랭클린은 얼마 뒤 아내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아내가 세상을 뜰 때까지 같은 요양원에서 곁을 지켰다. 1964년 함께 퀘이커 교도가 돼 평화와 정의를 신앙으로 여겨 온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그의 기록 중에는 캐나다 왕립기마경찰이 수십 년 사찰하며 작성한 575쪽 분량의 감시 보고서도 있었다. 평화를 외친 물리학자 할머니를 국가가 사찰한 것이다. 한국이라면 낯설지 않을 풍경이다.
1995년 토론토 교육청은 그의 이름을 딴 우르술라 프랭클린 아카데미 를 열었다. 지역사회 봉사, 탐구중심 학습, 교과통합을 원칙으로 하는 이 학교는 지금도 운영 중이다.
프랭클린은 생전에 자주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내가 퀘이커 교도라는 혐의로 고발된다면, 유죄를 선고받을 만한 증거가 내 삶에 있는가?
신념을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이 질문. 한국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도 자기 이름 앞에 한 번쯤 붙여볼 만하지 않을까.
내가 ---라는 혐의로 고발된다면, 유죄를 선고받을 만한 증거가 내 삶에 있는가?
빈칸에 무엇을 넣고 싶은지, 그것이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것이다.
연구실에서 우르술라 프랭클린 (9) Feature story: The woman who made technology human | Linked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