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연기금 창립, 두 얼굴의 거인 줄리언 헉슬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판다 로고 속에 박제된 한 과학자의 초상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귀여운 판다 로고, 세계자연기금(WWF, World Wide Fund for Nature)의 상징 뒤에는 한 남자의 집념이 서려 있다. 줄리언 소렐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1887~1975)는 단순히 환경운동가에 머물지 않았다. 20세기 생물학의 지도를 새로 그린 설계자였고, 유네스코(UNESCO)라는 거대 국제기구를 출범시킨 행정가였으며, 동시에 우생학 이라는 위험한 유산을 끝내 놓지 못했던 모순의 인물이었다. 오늘, 우리가 그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가 현대 한국사회가 마주한 문제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1922년 줄리언 헉슬리.(위키피디아)
가문의 무게, 일등 이라는 이름의 폭력
헉슬리 가문은 영국 지성사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할아버지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호하던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헨리 헉슬리였고, 동생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 멋진 신세계 를 쓴 올더스 헉슬리였다. 이 집안의 가훈은 명확하고도 잔인했다. 헉슬리는 항상 일등을 한다.
식탁마다 놓인 할아버지의 초상화는 어린 줄리언에게 격려가 아닌 감시의 눈길이었다. 이 압박은 비극을 불렀다. 옥스퍼드에서 일등을 놓친 또 다른 동생 트레베넨은 패배감을 견디지 못하고 19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줄리언 역시 평생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성공해야 한다 는 강박과 싸워야 했다.
오늘날 한국의 초엘리트주의 와 궤를 같이한다. 특정 대학, 특정 직업만을 성공이라 규정짓는 사회적 공기가 한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줄리언의 가계도는 증명하고 있다.
런던 햄스테드 브랙넬 가든 16번지에 있는 영국 문화유산청의 파란색 기념 명판은 줄리언, 그의 동생 올더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레너드를 기리고 있다.(위키피디아)
20세기 생물학의 완성, 현대 종합설
줄리언은 가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42년 출간된 그의 저서 진화: 현대적 종합 은 흩어져 있던 생물학의 파편들을 하나로 모은 기념비적 저작이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 과 멘델의 유전학 을 통합하여 현대 종합설 (Modern Synthesis)이라는 용어를 확립했다.
그는 연구실에만 머무는 학자가 아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과학을 대중화시킨 선구적인 인플루언서 였다. 1937년에는 바닷새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오스카상을 거머쥐며 대중소통의 정점을 찍었다. 데이터와 논문에 갇히지 않고 대중의 언어로 과학을 번역했던 그의 능력은, 오늘날 K-과학 이 지향해야 할 소통의 모델을 제시한다.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와 줄리안이 1893년에 함께 한 모습.(위키피디아)
유네스코의 탄생과 우생학의 굴레
2차 세계대전 직후, 인류는 파괴된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유네스코를 창설했고 줄리언은 초대 사무총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취임 직후 과학과 이성이 인류를 이끌어야 한다 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합리주의는 위험한 지점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인구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강력히 주장했고, 1959년부터는 영국 우생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나치가 우생학을 앞세워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종교계와 정치권의 거센 반발로 그의 임기는 6년에서 2년으로 단축되었고, 1948년 쓸쓸히 유네스코를 떠나야 했다. 지성이 윤리를 상실하거나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때 얼마나 위험한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1918년 영국 육군 정보부대에서 근무하던 줄리언 헉슬리.(위키피디아)
WWF의 창립, 지금 당장 행동하라
실패한 행정가로 남을 뻔했던 그를 구원한 것은 야생의 부름이었다. 1960년 동아프리카를 방문한 줄리언은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를 목격하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귀국 즉시 언론에 기고하며 국제적인 보호기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1961년 4월 29일, 세계자연기금(WWF)이 탄생했다. 창립행사에서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금 이라며 직설적인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WWF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활동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훼손된 자연을 보고 즉각 실행에 옮겼던 그의 결단력은, 재생에너지 전환과 환경 복원이 시급한 오늘 한국사회가 반드시 배워야 할 대목이다.
줄리언 헉슬리와 그의 두 아들 앤서니와 프랜시스.(위키피디아)
줄리언 헉슬리가 현재 한국에 던지는 화두
줄리언의 삶은 거울처럼 우리 사회를 비춘다.
인구 역설과 우생학의 그림자: 줄리언은 인구과잉을 걱정했지만, 현재 한국은 출산율 0.7명대의 인구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해결 방식은 줄리언이 범했던 공학적 접근 이어서는 안 된다. 집값, 교육비, 성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외면한 채 숫자만 맞추려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엘리트주의의 해체: 헉슬리는 항상 일등 이라는 가훈이 비극을 낳았듯, 한국의 서열화된 교육 제도는 수많은 젊은이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 다양한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토양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트레베넨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줄리언은 과학을 도구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한국의 과학자들 역시 연구비 수주를 넘어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윤리 등 사회적 난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줄리언 헉슬리가 할아버지 코미스 헉슬 초상화 아래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1935년쯤 (위키피디아)
우리 안의 줄리언 헉슬리를 넘어서
1975년 2월 14일, 줄리언 헉슬리는 8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진화론을 현대화했고, 인류문명의 수호자인 유네스코를 세웠으며, 멸종위기 동물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생학이라는 시대의 편견에 갇힌 죄인이기도 했다.
동생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 에서 형이 꿈꾸던 개량된 인류 의 미래를 끔찍한 디스토피아로 그려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형이 추구한 이성의 끝에는 통제와 억압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판다 로고를 볼 때마다 줄리언 헉슬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의 빛나는 성취뿐 아니라 그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까지도.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인 도구일 뿐, 그것을 따뜻한 인본주의로 채울지, 아니면 차가운 통제의 수단으로 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줄리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그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줄리언 헉슬리(Anthropologist) | Anthrohol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