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을 건너온 공자의 잔소리 공부 좀 해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죽어서도 참으로 말이 많은 사람
기원 전 551년, 지금의 중국 산둥성 곡부(曲阜) 땅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顏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드린 뒤 낳았다 하여 이름을 구(丘) , 자(字)를 중니(仲尼) 라 불렀다. 성은 공(孔). 그렇다, 공구(孔丘), 흔히 공자(孔子)라 부르는 그 사람이다.
기원 전 479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죽은 뒤에도 2500년 넘게 그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도 동아시아 수십억 인구를 상대로. 참으로 지칠 줄 모르는 어르신이다.
서기 8세기 오도자가 그린 공자(위키피디아)
낙하산도 금수저도 아니었다
공자의 출신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하급 무사였고, 어머니와의 관계는 정식 혼인이 아니었다고 고대 문헌들은 슬쩍 귀띔한다. 요컨대 공자는 금수저도 낙하산도 아닌, 오늘날로 치면 비정규직 무사의 서자(庶子) 비슷한 처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자가 세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는 스스로 나는 어려서 미천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비루한 일에 능하게 되었다 라고 고백한다. 창고지기도 하고 가축도 돌봤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알바를 여러 개 뛴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 공부에는 남달랐다. 스스로 배우고 또 배웠으며, 나중엔 제자를 3000명이나 두었다고 전해진다. 수업료? 받았다. 그것도 명문화해서. 묶은 고기 한 묶음 이상을 예로 갖춰 오는 자라면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 했다. 공자는 역사상 최초의 사립학교 원장이기도 했다.
중국 산둥성 둥핑현의 오래된 주택 마당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공자를 묘사하고 있다.(위키피디아)
천하를 돌아다닌 구직자, 14년의 유세(遊說) 열전
공자는 기원 전 501년 무렵, 쉰 살이 다 돼서야 노(魯)나라에서 제법 높은 벼슬(대사구·大司寇)을 얻었다. 그런데 임금이 제(齊)나라에서 보내온 미녀 악단에 정신이 팔려 정사를 게을리하자, 공자는 미련 없이 짐을 쌌다. 기원 전 497년의 일이다.
이후 기원 전 484년까지 약 14년간, 공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위(衛)·조(曹)·송(宋)·정(鄭)·진(陳)·채(蔡)·초(楚) 등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뜻을 펼쳐줄 군주를 찾아다녔다. 이른바 열국 구직 대장정 이다.
결과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채용은 안 했다. 어진 정치, 예의 회복, 덕으로 다스림… 전쟁과 이익이 판치는 춘추시대(기원 전 770년~기원 전 403년)에 이런 소리를 듣는 군주 입장에서는 말씀은 참 옳은데… 로 대화가 끝나기 일쑤였다. 공자는 천하를 떠돌며 거절당한 구직자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대단하면 대단하고, 고집스러우면 고집스럽다.
중국 산둥성 둥핑현의 오래된 주택 마당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공자(왼쪽 두 번째)를 묘사하고 있다.(위키피디아)
공자 사상의 핵심, 요약하면 사람답게
공자 철학의 뼈대는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仁), 즉 어짊이다. 공자는 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보다 상황마다 다르게 설명했는데, 그 본질을 꿰뚫으면 결국 남을 사랑하라(愛人) 이다.
예는 그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는 형식이다. 공자가 예를 강조한 것은 형식주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형식 속에 진심이 담길 때 사회가 유지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지위에 따른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지,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공자는 또 군자와 소인을 늘 대비시켰다. 군자는 의를 앞세우고, 소인은 이익을 앞세운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되 편당을 짓지 않고, 소인은 편당을 지으면서 두루 어울리지 못한다. 공자가 이 이야기를 기원 전 5세기에 했는데, 왜 오늘날 한국 국회의사당 풍경이 떠오르는 것인지는 각자 생각해보기 바란다.
장 바티스트 모제스 작, 《공자(오른쪽 아래)는 모세, 무함마드와 함께 과거의 가장 위대한 입법가들 중 하나다》(1827년), 루브르 박물관.(위키피디아)
어마어마한데 빛과 그늘 함께
공자가 기원 전 479년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엮어 펴낸 것이 『논어』다. 이 책은 동아시아에서 2000년 넘게 서 자리를 차지했다.
가장 결정적 전환점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기원 전 156년~기원 전 87년) 때다. 무제는 기원 전 136년 무렵 유학을 나라의 공식 학문으로 채택하고, 다른 사상들을 배척했다. 이로써 공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을 넘어 국가통치의 뼈대가 됐다. 그 뒤 과거제도를 통해 공자의 경전을 외워야 벼슬길이 열렸으니, 동아시아에서 공자를 모르면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시절이 무려 1300년 넘게 이어졌다.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년~384년) 때 태학(太學)을 설립하며 유학 교육이 공식화됐다. 조선(1392년~1897년)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었고, 퇴계 이황(1501년~1570년)과 율곡 이이(1536년~1584년)가 조선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뤘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다. 공자 사상이 권력자들에 의해 민중에게 순응의 도구 로 활용된 역사를 우리는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충과 효가 강조되면서 비판과 저항은 불효·불충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이름 아래 오랫동안 억압받았다. 공자 본인이 그것을 의도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가르침은 때로 가르친 자의 뜻과 다르게 쓰인다.
《공자, 중국의 철학자》는 1687년 파리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출판되었다.(위키피디아)
공자님도 기가 막혀 하실 한국사회 모습
지금 대한민국 상황을 공자에게 설명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 해도 흥미롭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 고 했는데,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지도자를 보면 공자는 아마 노나라를 떠날 때처럼 조용히 짐을 쌌을 것이다. 그는 옳지 않은 군주를 섬기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윗자리에 있는 자가 예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는데, 국회에서 고함과 몸싸움이 중계되는 장면을 보면 공자는 아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예기(禮記)』를 던졌을 것이다.
정명(正名)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름과 실제가 어긋난 경우가 너무 많다. 민주주의 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를 흔드는 일이 벌어지고, 법치 라는 이름 아래 법이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구부러지고, 공정 이라는 이름 아래 불공정이 제도화되기도 한다. 공자라면 이름부터 바로 잡아라 고 했을 것이다.
배움의 자세에 대해서도 공자의 한마디는 날카롭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확신만으로 밀어붙이는 정책 결정,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공자는 이 한 문장을 칠판에 크게 써 붙여 주었을 것이다.
송나라 시대의 효경 삽화에 묘사된 증자(오른쪽)가 공자(가운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박물관에서 꺼내야 할 공자의 가르침
공자를 그저 제사상에 모셔두는 고리타분한 어르신으로만 보면 손해다. 그의 가르침에는 오늘날에도 빛나는 통찰이 있다.
하나, 배움은 멈추지 않는다. 공자는 나이 들어서도 끊임없이 배웠다.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자 라고 했다. 학벌과 학위로 배움을 재단하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둘, 지도자의 도덕성은 제도보다 강력하다. 공자는 법과 형벌만으로 다스리면 백성이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진다고 했다. 덕으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로잡는다고 했다. 법망을 피해가는 것이 능력이 되어버린 사회, 귀에 익지 않는가.
셋,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라. 공자의 가르침은 거창한 제도개혁보다 일상의 관계, 가족과 이웃과 동료사이의 성실함에서 출발한다. 큰 말만 앞서고 작은 실천이 없는 정치문화에 대한 조용한 채찍이다.
중국 진해에 있는 공자묘의 첫 번째 정문.(위키피디아)
2500년 된 잔소리를 다시 듣는 이유
공자는 기원 전 479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죽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의 말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2500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그 시대에 맞서 외쳤던 것들, 즉 지도자의 도덕성, 배움의 태도, 이름과 실제의 일치, 사람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은 어느 시대에나 드물고 어느 시대에나 절실하다.
한국 사회가 공자에게서 배울 것은 유교적 위계질서의 부활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공자가 진짜 원했던 것,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지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다.
산둥성 취푸시 공림묘에 있는 공자릉(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