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계절, 역사의 비극과 마주하는 묵직한 영화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오월이 다가온다. 이 때만 되면 몸 어딘가가 저릿거리는 이들이 있다. 마음의 생채기를 치유하지 못한 이들이다.
반 세기가 다 되어가는 일 때문에 마음을 헤집는 이들은 요즘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의 참화에다 미국, 이스라엘과 이란, 레바논의 전쟁 때문에라도 더 아려온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그렇게 지독한 수난을 당한 민족이 저리도 무감하게 이란과 레바논을 맹폭하는 데 앞장서고 세계인들의 염원을 아랑곳않고 절멸 을 되뇌이는 모습을 보며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이즈음이다.
이렇게 찬란한 계절이 반짝이는데 상영관 컴컴한 구석에 들어가 인류가 역사 속에서 겪었거나 지금 맞고 있는 고통과 비극을 되새겨보는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힌드 라잡의 생전 모습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가장 시간적으로 가까운 ‘힌드의 목소리’다. 2024년 1월 29일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이슬람권 적십자)에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온다. 구조를 요청한 이는 여섯 살 여자아이 힌드 라잡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응대 요원은 한시라도 빨리 구조할 인력을 투입하자고 하지만 적신월사의 경험 많은 상관은 이스라엘 군의 투입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사코 말린다. 실제 힌드의 목소리가 영화에 흘러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오히려 이 작품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 23일 개봉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은 눈을 70여년 전의 폴란드로 돌린다. 포스터가 모든 것을 말한다. 독일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폴란드로 이사를 간 여덟 살 소년 브루노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이 일하는 농장을 보게 되고, 소년 슈무엘을 만난다. 철조망 건너편에 있는 슈무엘과 우정을 쌓게 된 브루노는 사라진 슈무엘 아빠를 찾기 위해 비밀 작전을 궁리한다.
왜 사람들이 파자마를 입고 있어요? 브루노는 순진하게 묻고, 그의 누나는 선전 정책에 좌우돼 아무렇게나 유대인 증오를 드러낸다. 브루노의 아버지는 권력 앞에 한없이 비굴하다. 억압을 아무렇지 않게 체제의 근거로 삼던 시절,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보면 좋을 것 같다.
영화는 2006년 출간돼 300만 부나 팔린 존 보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마크 허먼 감독이 연출해 2008년 미국에서 개봉했고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 등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졌는데 처음으로 정식 개봉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그린 꽃잎 은 개봉 30주년을 맞아 다음달 14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관객을 만난다. 꽃잎 은 한 남자가 강변에서 정체불명의 소녀를 만나 그녀의 악몽에 차츰 휘말려 드는 과정을 담았다. 무너진 소녀의 삶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마주하는 영화다.
우묵배미의 사랑 (1990), 경마장 가는 길 (1991) 등을 연출한 장선우 감독의 작품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상업영화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로 데뷔해 강렬한 연기력을 선보였던 배우 이정현은 1996년 대종상영화제와 청룡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5월18일생 포스터 에스디와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5월18일생 도 다음달 14일 개봉관에 걸린다. 이 작품은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그 날 광주에서 태어나 비운의 유년 시절을 보낸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5·18 민주화운동 현장을 본 송동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항쟁 며칠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날의 비극이 50년의 여러 삶을 어떻게 할퀴었는지를 기록하고 증언한다.
영화 비정성시 포스터 에이썸 픽쳐스 제공 연합뉴스
광주민주화운동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 대만의 2·28 사건 을 소재로 한,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 주연의 비정성시 (1990)는 다음 달 6일 재개봉한다. 1947년 2월 28일 대만 독립 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만 원주민들을 본토에서 건너온 장제스 정부가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영화는 이 사건을 소재로 역사의 파고에 휩쓸린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다. 대만 출신의 거장 허우샤오셴 감독이 만든 영화는 대만 뉴웨이브 사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 내 이름은 포스터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 연합뉴스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로 이재명 대통령이 적극 추천하고 염혜란의 빼어난 연기로 입소문이 난 내 이름은 도 지난 15일 개봉돼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15일 개봉한 이 영화는 영옥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신우빈 분)과 그의 어머니 정순(염혜란 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쁜 기억을 묻고 살던 정순은 과거를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4·3사건의 아픔이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평가를 토대로 하는 CGV 에그지수가 93%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24일까지 14만여 명이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