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드는 영화 잘되면 또 국보법 만나지 않을까요 [뉴스] 조성봉 감독이 최초의 4.3 다큐 레드헌트 를 만들었던 1997년은 여전히 제주4·3의 역사가 금기시되던 때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인권영화제 등에 상영된 이 영화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히고 탄압받을 무렵,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초청장이 날아온다. 해외 굴지의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국내에서는 탄압받던 1990년대 후반 이야기를 조성봉 감독에게 들어본다.
지난 15일 민족통일애국청년회(민애청) 주관, 손솔 진보당·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 공동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된 국가보안법 연속 증언 프로젝트 ‘목소리들’ 다섯 번째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지리산 자락 실상사에서 먼저 만난 조성봉 감독은 동네 사람들이 감독을 다 알고 있더라는 얘기에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추념식에서 레드헌트를 언급해서 좀 유명해졌지. 내가 뭐 특별나서는 아니고 운이 좋았지”라며 겸손한 자세로, 하지만 위트 있는 말솜씨로 대화를 이어갔다.
대학 시절은 한마디로 5·18 자체였죠.
카메라를 든 건 기록운동을 하려고 했어요.
레드헌트 를 연출한 조성봉 감독
1981년에 재수를 해서 부산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어요. 대학 시절은 한마디로 5·18이었어요. 광주를 통해서 소위 말해 의식화되는 거 아닙니까. 광주 테이프나 사진들을 보면서. 5·18 진상규명을 위한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투쟁은 나한테 충격이었어요. 그때 방화 투쟁에 함께한 사람 중에 20살 대학생 1학년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죠.
그렇게 대학 생활을 보내다 군대 다녀와서 80년대 중반 부산에 있는 대우어패럴 하청공장에 취직했어요. 부산은 울산, 거제 등과는 달리 십수 명 남짓의 소규모 공장이 많았죠. 원래 거기서 금형 같은 걸 배워서 울산 대공장에 취업할 계획이었는데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겪었어요. 그 과정에 대공장 노동조합들이 생기는 걸 보면서 노동운동은 소위 학출들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더 잘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내가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부산에 철거민 투쟁이 정말 치열했거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다른 지역에는 있었는데 부산에는 영상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술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기록운동을 하려고 한 거죠. 마침 영상 작업이 디지털화되는 초기였어요. 회화나 글 같은 건 아주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하잖아요? 그에 비해 영상은 간단한 기술과 장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노래 운동 하던 후배, 예술 운동 하던 후배들 몇 명이 모여서 하늬영상이라는 팀을 만듭니다.
레드헌트 만들 때 힘들지 않았나,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해요
원래 첫 작품으로 5·18 관련한 다큐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 당시 시대정신이 5·18 광주민중항쟁이었잖아요. 그런데 1995년에 김영삼 정부가 5·18 특별법을 제정해요. 뭐 진상 조사하고 명예 회복한다니까, 그래서 이건 정부가 하는 걸 좀 지켜봐야겠다, 우리는 더 필요한 일을 하자 하다가 영상팀에 있던 제주 출신 친구가 제주 4·3을 다뤄보자고 적극적으로 제기했죠. 내 생각에도 5·18 광주와 4·3 제주는 국가폭력 범죄이고 분단에서 비롯된 같은 궤의 역사라고 생각했죠.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고, 당시 MBC에 다니던 후배들도 잘해봐라,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소재”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90년대는 제주 4·3이 금기시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까 증언을 받거나 할 때 힘든 건 없었냐고 주변에서 많이 물어봐요. 그런데 힘든 것 하나 없었어요. 제주MBC에서 해마다 증언 다큐를 만들어 왔었고, 제주일보에서 독립한 제민일보 기자들이 4·3 특별취재반을 따로 만들어 총 6권의 제주 4·3을 말한다 증언집을 펴낸 상태였죠.
우리가 그걸 참고로 해서 인터뷰된 사람들을 이렇게 찾아서 영화로 엮은 거죠. 그래서 우익 쪽, 가해자 쪽 사람들 말고는 특별히 인터뷰를 기피한 사람은 없었고 거의 다 잘 이야기를 해줬어요. 소위 우익 쪽 인사들도 막 자기가 했던 일을 정당화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러저러한 일이 있었다 소개해주는 정도였고, 또 제주도 출신 팀원이 영화에서 인터뷰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 친구가 열정적으로 나서줘서 잘 만들 수 있었어요.
증언 중에는 그 당시에 국방경비법, 계엄법 이런 걸로 잡힌 사람들이 육지 곳곳의 형무소로 흩어져 갔거든요. 이제 그게 한국전쟁 터지면서 서대문 형무소, 대전 형무소 같은 곳에서 예비검속, 민간인 학살 사건이 터지죠. 그런데 형무소 문이 전쟁 중에 열려버린 거잖아요. 한 형제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거예요. 그러니까 형제가 서로 의논을 해요. 제주도로 갈까 아니면 북으로 가서 인민군이 될까 하다가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기면 안 되니까 각자 따로따로 선택을 하자 해요. 동생은 제주도로 내려오고 형은 북으로 가고 한 거죠. 그 뒤로 형과는 연락이 안 되니까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고.
그 동생이 제주도에 가서 다시 남한 군대에 징집이 돼 한국전쟁에 참여를 해요. 인천상륙작전 때 제주도 출신 해병대 군인이 많았거든요. 이게 왜 그런가 하니 전쟁이 일어나면 반대파로 몰려 더 쉽게 죽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군대에 들어가면 살 확률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비극이죠. 이런 이야기들을 엮어서 1년 정도 작업해서 1997년 초에 레드헌트 가 세상에 나온 거죠. 지금은 유튜브에 다 공개해 놨습니다.
증언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손솔 진보당 국회의원
증언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창민 사회민주당 국회의원
이 다큐는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문구
기록운동만 해서는 예닐곱 명의 팀원들이 먹고살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어차피 배고플 바에 기록운동도 하고 우리 작품을 만들자 의견이 모였죠. 그때가 막 영화제들이 생길 때니까. 마침 삼성에서 만든 다큐 케이블 방송인 Q채널에서 다큐멘터리 영상제를 열어서 이제 레드헌트 를 만들어 출품하자 했죠.
그래서 레드헌트 1편에는 내레이션이 많이 들어갔죠. 그래서 16개 본선 진출작으로 선정이 돼 서울에 갔는데 담당 PD가 제주 4·3은 심의가 절대 안 나온다 하면서 본선작에서 제외하겠다 이렇게 된 거죠. 나도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당황했는데 당시 영상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게 말이 되냐. 그럼 우리도 출품 안 하겠다” 하면서 항의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타협안을 제시한 게 다큐 시작하기 전에 자막으로 이 다큐에서 제시하는 수치, 증언 등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는 자막을 달자는 거였어요. 담당 PD 아버지가 서북청년단 출신이었어요. 그 친구도 제주 4·3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암튼 그래도 다큐 앞에 그런 자막을 넣을 수는 없으니 결국 철회하겠다 결론을 낸 거죠. 사실 그때 욕 많이 먹었어요. 끝까지 싸우지 않았다고, 뒤에서 돈 받았다는 얘기도 돌고. 그때 대상 받았던 사람은 항의의 의미로 대상을 받자마자 바닥에 집어던졌습니다. 이 문제로 이듬해에는 행사 자체가 열리지 않았고 1999년이 되어서야 레드헌트 를 제대로 상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항을 했던 시기였고 제주 4·3을 다룬 영화 한 편 상영하는 게 어려운 시기였죠.
이적표현물이 된 제주 4·3
1997년 9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박이 났다. 왜냐면 Q채널 탄압을 받았으니까.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빨갱이 영화라는데 한번 봐보자 하면서 매진이 됐죠. 부산국제영화제는 당시에 사전 심의제도를 운영했거든요. 그래서 상영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경찰은 그 즈음부터 내사를 시작했던 거 같더라.
같은 달에 홍익대에서 2회 인권영화제가 열렸는데 그 당시 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서준식 선생이 보안관찰법 위반, 또 홍익대에서 영화제를 거부했는데 총학생회와 함께 진행해 주거침입 위반, 그리고 레드헌트가 이적표현물인데 그걸 상영했다는 이유로 구속됐어요. 정확히는 사전 심의를 받지 않고 인권영화제를 개최해 이적표현물인 레드헌트 등을 상영해 음반비디오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이 적용된 거죠. 황당했죠. 인권영화제에서는 열심히 싸웠어요. 학교 측에서 전원 공급을 차단해 야외 콘크리트 계단에서 자체 발전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하고, 발전기가 나가서 영화는 뚝뚝 끊기고. 이제 학생들이 탄압받으니까 영화제는 폐막하고 명동성당, 향린교회 등에서 상영을 이어갔죠. 전국 총학생회와 종교계에서는 상영 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 학생회장이 구속되기도 했어요. 나도 이제 수배가 됐고.
이게 논란이 크게 돼서 베를린 영화제 등 국제 영화제에서도 문제 제기를 세게 했어요. 그 과정에 레드헌트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죠. 98년 2월에 베를린으로 가야 되는데, 나는 수배 상태니 못 가는 거죠. 그래서 좀 이걸 정리하자는 마음에 1월에 부산시청에 가서 여권을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 체포됩니다.
8층에 욕조가 있는 방을 딱 보여주더라고요. 그때 좀 긴장이 됐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왜 보여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경찰이 공돈 먹으며 일하는 건 아닌 게, 들어가자마자 벽에 제주도 사진이 크게 붙어 있고 해당 지역에 제가 증언했던 분들 사진이 다 붙어 있더라고요. 제가 대학생 때부터 했던 기록이 책상 위에 쭉 쌓여 있고. 기소장을 보니까 이렇게 돼 있었어요. 레드헌트 가 제주 4·3 때의 많은 민간인 학살 책임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북측에서 하는 주장과 동일하다, 그래서 이건 이적표현물이라고요. 우습죠.
영장실질심사라는 제도가 본격 도입되던 시점인데 대검찰청 수사관이 국보법 구속영장이 기각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기대하지 마라고 했어요. 그런데 판사가 레드헌트 는 이미 테이프로 나와 있으니 증거 인멸이 안 된다며 구속 영장을 기각해버린 거죠. 국제 영화제에서도 주목하고 탄원서도 보내고 하다 보니 조금 긴장을 했던 것 같아요. 기소 자체도 상당히 무리가 있었죠. 이 다큐가 이적표현물이 되면 부산영화제에서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때 정권도 김대중 대통령으로 바뀌면서 사회 분위기가 달라진 점도 한몫했을 것 같네요. 그래서 서준식 위원장도 무죄가 되고 저도 2003년에 최종 무죄를 받았어요.
결국 베를린 영화제는 못 갔는데, 경찰이 조사를 하면서 영화에 무슨 내레이션이 이렇게 많냐, 영화 재미없다”고 하길래 그래? 그럼 다시 만들어야지 하면서 나온 게 2000년 레드헌트2-국가범죄 예요. 지금은 국가범죄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때는 역사학계에서도 그렇게 안 쓰던 단어였거든요. 해방 이후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게 시대정신이었는데 이걸 빨간색으로 칠해버리고,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거고, 그래서 이건 국가범죄라고 명명한 거죠.
한국 다큐멘터리 대상을 받고 스위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그때는 직접 참가했죠. 그래서 국가보안법 때문에 억압받고 상처받은 분이 많지만 나는 그런 느낌보다는 탄압으로 인해 훨씬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게 돼서 혜택(?)를 받은 거죠. 그때 개인적으로도 ‘야, 이거 다큐멘터리 하나 만드는데 국가가 관심을 가져준다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네’하며 오히려 용기를 줬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만드는 영화가 잘되면 또 국가보안법을 만나지 않을까요?
2000년대 초반 여성가족부가 위안부 할머니들 촬영을 중국 동북 삼성으로 간다고 해서 참여했습니다. 내가 이런 기록 작업을 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하는 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거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에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하는 분들이 레드헌트 를 상영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당연히 갔죠. 그렇게 구럼비(서귀포 앞바다의 용암너럭바위)라는 공간을 처음 보면서 떠날 수가 없겠더라고요. 몇 년을 거기 붙어 있으면서 저항도 하고 기록도 하면서 구럼비-바람이 분다 영화도 냈죠.
지금은 지리산에서 진달래 산천 이라는 지리산 빨치산 영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도 해방 이후를 다루니 레드헌트 만큼 문제적 작품일 수 있겠네요. 이 영화가 나오면 또 국가보안법을 만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대신 영화가 잘 나오면. 못 만들면 관심 안 가질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로 잘 만들어서 다큐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그걸로 인해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더 말하고 폐지를 위해 싸우고 하는 것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인터뷰 내내 자신보다 몇 년 전에 탄압 받았던 이산하 시인을 언급하며 그 분들은 구타도 당하고 힘든 생활을 했지만 자신은 그러진 않았다고 손사래치는 조성봉 감독. 국가보안법 7조 5항 이적표현물 조항은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 소지했을때 처벌하는 조항이다. 그러나 위 사례에서 보듯 단순히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는 이유 만으로 손쉽게 이적표현물로 지정해 다분히 작위적인 기준이 문제로 지적됐다. 레드헌트 에 대한 탄압은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이 창작 활동과 역사 문제를 어떻게 짓누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김태중 시민기자 ktj628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