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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모차르트, 시대는 천재를 굶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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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데우스(Amadeus) 는 라틴어로 신의 사랑을 받은 자 라는 뜻이다. 과연 신의 사랑을 흠뻑 받았는지, 35년이라는 짧디 짧은 생애 동안 교향곡 41편, 피아노 협주곡 27편, 오페라 22편, 그 밖에 수백 편의 곡을 쏟아냈다. 현대인들이 업무용 이메일 한 통 쓰는 데 끙끙대는 것과 비교하면, 이 사람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는가 싶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 사람, 정작 인간세상에서는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밥벌이가 늘 쪼들렸고,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음악의 신 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살아서는 굶주리고 죽어서 칭송받는, 이 기막힌 공식은 어찌하여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모차르트 초상화, 1781년 경.(위키피디아) 신동 마케팅의 원조, 아버지 레오폴트의 기획력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이자, 어찌 보면 역사상 최초의 자녀 재능 상업화 전문가 였다. 아들 볼프강이 겨우 여섯 살 되던 해부터 유럽순회 연주여행을 시작했으니, 요즘 말로 치면 아이돌을 데뷔시키는 기획사 대표 역할을 아버지가 직접 맡은 셈이다. 어린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각 도시를 돌며 황제와 왕들 앞에서 연주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여제 앞에서는 연주를 마친 뒤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여제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가 일으켜 주자 나중에 당신과 결혼하겠다 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천재는 어릴 때부터 입심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동 마케팅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다. 귀여운 꼬마가 건반을 두드리면 오, 신기하다!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어엿한 어른이 되고 나면 그래서 밥은 먹고 사냐 는 질문이 뒤따른다. 모차르트에게도 그 냉혹한 현실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잘츠부르크의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 모차르트의 생가(위키피디아) 잘츠부르크의 월급쟁이, 천재와 갑질 상사 스물다섯 살이 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Hieronymus Colloredo, 1732~1812) 밑에서 궁정음악가로 일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 막내사원 처지였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하인들과 같은 식탁에 앉혀 밥을 먹게 할 만큼 대놓고 무시했다. 천재는 참다 참다 1781년 결국 사표를 던졌다. 정확히는, 대주교의 부하가 모차르트를 발로 차서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의 역사는 이렇게 깊다. 그리고 그 괴롭힘에 맞서 독립을 선택한 용기, 이것이 모차르트 생애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모차르트 가족의 여행: 레오폴드, 볼프강, 나네를; 카르몽텔레 작 수채화, 1763년 경(위키피디아) 자유음악가의 빛과 그늘, 창작의 자유, 생계의 공포 홀로 빈에서 지내게 된 모차르트는 역사상 보기 드문 시도를 감행했다. 누군가의 후원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음악을 팔아 먹고 사는 자유음악가 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거의 전례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 프리랜서 1인 창작자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처음에는 잘 됐다. 제자도 많았고, 연주회도 성황이었다. 1786년 초연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을 풍자한 내용 때문에 당국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귀족이 하인의 약혼녀를 탐한다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린 것인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질문을 오페라로 던진 셈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보마르셰(Beaumarchais, 1732~1799)가 원작 희곡을 썼고, 이 작품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시대를 뒤흔든 정치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빈의 청중은 변덕스러웠다. 유행이 지나면 외면했고, 귀족들의 후원도 들쑥날쑥했다. 1780년대 후반부터 모차르트의 재정은 급격히 쪼들렸다. 친구 미하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1741~1822)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제발 돈 좀 빌려 달라 는 내용이 수십 통에 걸쳐 반복된다. 천재의 편지가 아니라 월말이면 카드값 막으러 동분서주하는 직장인의 문자 같다.   1770년 1월, 14세의 모차르트(베로나 학파, 잠베티노 치냐롤리 작으로 추정, 위키피디아) 35년의 생애, 인류 음악사를 바꾸다 모차르트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좋은 음악을 많이 썼다 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첫째, 그는 음악의 언어를 보편화했다. 이전까지 서양음악은 철저히 교회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와 협주곡을 통해 보다 넓은 청중에게 음악의 문을 열었다. 음악의 민주화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둘째, 그의 오페라들은 인간의 내면을 그 어떤 문학보다 섬세하게 묘사했다. 《돈 조반니(1787년)》는 단순한 호색한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욕망·처벌을 다룬 철학적 드라마였고, 《마술 피리(1791년)》는 계몽주의 사상을 음악에 녹여낸 작품이었다. 셋째, 그는 이후 수백 년간 음악가들의 교과서가 됐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도 젊은 시절 모차르트에게 배우러 빈에 왔었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도 모차르트를 흠모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모차르트의 음악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고 고백했다.   잘츠부르크의 탄츠마이스터하우스는 1773년에 지어진 모차르트 가족의 거주지였으며, 1996년에 복원되었다.(위키피디아) 1791년 겨울의 죽음도 미스터리, 정확한 묘소 몰라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서른다섯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인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류머티즘열, 신부전, 독살설까지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영화 《아마데우스(1984년)》에서는 살리에리(1750~1825)가 독살했다는 설을 극적으로 다루었는데, 실제 살리에리는 그 혐의를 억울해 했다고 전해진다. 억울한 사람만 손해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더 기막힌 것은 장례식이었다.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간소한 장례미사가 치러졌고, 시신은 공동묘지의 공동매장지에 묻혔다. 정확한 묘소도 모른다. 살아서는 황제 앞에서 연주하고, 죽어서는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는 신세. 이 아이러니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모차르트가 1770년 로마에서 교황 클레멘트 14세로부터 받은 황금 박차 훈장 배지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우리는 천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자,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한국에는 세계가 인정하는 뛰어난 예술가, 과학자, 연구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서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신진음악가는 연주 기회조차 얻기 어렵고, 젊은 연구자는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전전하며, 독립창작자들은 플랫폼 수수료와 생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모차르트가 콜로레도 대주교 발길질에 쫓겨났을 때, 그는 독립을 택했다. 한국의 창작자들은 지금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는가. 독립을 꿈꾸지만 청년예술인 지원예산은 해마다 삭감 논란에 시달린다. 《피가로의 결혼》이 귀족의 횡포를 오페라로 비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오늘 한국에서도 불평등과 갑질을 정면으로 다루는 창작물들이 탄생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 음악. 그 창작자들이 모차르트처럼 밥걱정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사회가 만들어주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또 하나. 모차르트의 신동마케팅 을 떠올리면 어딘지 낯이 익다. 어린나이에 피아노, 바이올린, 각종 경시대회를 휩쓸고, 부모의 기획 아래 성장하는 한국의 영재들. 그 후에 그들이 어른이 됐을 때,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품는가. 신동 시절의 명성이 어른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모차르트의 생애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증명했다.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 1780년경 (요한 네포무크 델라 크로체 작으로 추정); 벽에 걸린 초상화는 모차르트의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위키피디아) 모차르트를 또 굶길 것인가 모차르트는 35년을 살다 죽었는데,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의 연주 홀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모차르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오늘의 모차르트들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술 해서 먹고 살 수 있겠어? 그거 해서 돈이 돼? 이 질문들은 콜로레도 대주교의 발길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천재는 시대를 앞서고, 시대는 천재를 굶긴다. 이 공식을 깨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차르트의 생애를 통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신의 사랑을 받은 자가 인간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만드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18세기 빈도, 지금의 서울도, 천재를 대하는 방식이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다만 우리에게는 역사라는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광장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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