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경의 ESG 딥다이브】아리셀 참사, 반ESG 경영의 민낯…산업안전 ‘실효성’ 확보 관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울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관광객,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K-뷰티와 K-푸드, 그리고 글로벌 무대에서 각광받는 K-컬처는 오늘날 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 단순히 무엇을 먹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질서와 시민의식, 깨끗한 거리와 성숙한 공공 매너까지 포함한 우리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어울리지 않는 이면의 문화가 있으니, 바로 산업안전 문화다. OECD 최고 수준의 산업재해사망률, 특히 건설업의 경우 OECD평균의 2배가 넘는 수치로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산업안전 문화 역시 그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이다. 새 정부 출범 후 5대 국정목표 중 ‘기본이 튼튼한 사회’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관련 정책 강화가 포함된 이유이기도 하다.
예견된 비극 아리셀 화재, 반ESG경영의 총합체
지난 9월 23일, 근로자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화재 사고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대표와 총괄본부장에게 각각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회사와 협력사의 주요 경영진에게도 징역 1~2년 또는 벌금형을 부과했다. 아리셀 법인에는 8억원의 벌금, 인력 파견 협력사 2곳과 설비 유지보수 업체에도 각각 수천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되는 등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가장 중형의 판결로 기록됐다.
근로자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화재 사고는 단순한 안전불감증의 결과가 아니었다. 경영진은 생산 효율을 이유로 방화벽을 철거하고 대피 통로에 가벽과 잠금장치를 설치하는 불법 구조 변경을 감행했다. 리튬 배터리의 화재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나, ‘근로자의 기본인권’과 연계된 안전조치 대신 ‘경영자 이윤 우선’을 위한 통제와 효율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상시근로자 수를 50명 이하로 인건비 부담 및 법적 안전 의무를 최소화하고, 상시근로자 수를 넘는 파견근로자를 장기간 활용한 점은 제도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대표적 사례다. 그 과정에서 무허가 파견업체를 자회사로 운영하는가 하면, 품질검사 조작, 불량품 은폐까지 이어진 운영은 안전·품질·윤리의 전 영역에서 의도적이고 구조적인 위반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2021년 이후 최소 네 차례 화재가 발생했고 사고 발생 20여 일 전 2800개의 배터리에 발열 이슈가 발생한 사실을 경영진이 인지했음에도 생산을 강행했고, 결국 참사는 현실이 됐다. 이는 산업안전의 문제를 넘어 기업의 기본적인 책임에 정면으로 반하는 반ESG 경영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노동안전 종합대책, 실효성 확보가 관건
정부는 2025년 9월 소규모 사업장과 취약노동자를 위한 안전설비 지원, 교육훈련 강화, 감시·감독 확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중대재해 공시의무 신설 등 포괄적 노동안전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고용노동부 중심에서 벗어나 8개 부처가 참여하는 범부처 협업체계를 구축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행 방식의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아리셀이 자발적으로 위험성평가를 제출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돼 산재보험료 감면 혜택을 3년 연속 누렸다는 사실은 제도가 형식적으로 운용될 경우 실효성을 잃는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효성 있는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수적이다.
첫째, 부처 간 정보 통합 플랫폼 구축이다. 범부처 협업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부처간 정보 공유 체계가 선행돼야 한다. 중대재해 이력뿐 아니라 하도급법 위반, 환경법규 위반, 노동법 위반 등 기업의 전반적 컴플라이언스 이력이 통합 관리되고 공유돼야 한다. 한 영역에서의 법규 위반은 다른 영역에서의 위반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이자 밀접하게 연계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형식적 평가를 넘어선 실질 심사 체계 운영이다. 서류 검토와 형식적 현장 점검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불시 점검, 내부 제보자 보호 강화, 현장 노동자 면담 의무화 등 다층적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인센티브 혜택을 받은 기업에 대한 사후 모니터링 강화 및 문제 발견 시 즉각 인증 취소 등 환류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경제적 인센티브 구조의 확실한 재설계다. 징벌적 손해배상, 공시 의무화, 신용평가 반영 등 다각도의 제재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위반으로 얻는 이익이 적발 시 경제적 불이익보다 확실하게 작거나, 또는 준수했을 때의 기대효용보다 낮아야 한다. 특히 현재 ESG평가 결과 및 이에 따른 금융 혜택 등 이행에 따른 기대효용은 상당부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안전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 금융지원, 입찰 가점 등 준수 기업에 대한 실질적 보상도 강화되어 제도준수 동기를 높여야 한다.
산업안전, 비용이 아닌 지속가능한 경영의 초석
중대재해처벌법에 이어 노동안전 종합대책이 발표되면서, 산업안전을 위한 법·제도적 기반은 이미 마련됐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키느냐 하는 실행의 진정성이다.
K-컬처가 세계를 매료시키는 것은 단순히 콘텐츠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디테일에 대한 집착, 완성도를 향한 끈기, 그리고 사람을 향한 진정성이 있다. 산업안전 역시 마찬가지다. 법규 제정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시스템이고, 형식이 아닌 문화로 뿌리내리게 하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지속적 노력과 진정성이다.
산업안전은 단기 이익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가 아니며, 기업의 장기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것이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숙해져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K-컬처가 되길 기대한다.
☞이선경 상무는
이선경 켐토피아 ESG전략실 이선경 상무는 신한증권과 대신증권에서 채권 크레딧 애널리스트와 주식 애널리스트를 거쳐 CJ경영연구원과 CJENM, CJ제일제당 등에서 전략기획, 재무전략/IR 팀장, 대신경제연구소에서 ESG센터장을 역임했다. 2024년 설립한 ESG공시 및 공급망 컨설팅 기관인 그린에토스랩이 켐토피아에 흡수되어 ESG-EHS를 연계한 플랫폼 개발 및 ESG정책 및 규제 대응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이선경 상무는 국민연금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대형금융기관의 ESG모델 및 ESG적용 프로세스 구축, ESG 평가 등을 장기간 수행했고, 정부 기관의 공급망 ESG플랫폼 구축, 환경DB분석 및 산업별 환경성 평가체계 수립하는 등 국내외 ESG 정책 규제 연구 및 ESG 체계 구축 실무 경험을 보유한 ESG 전문가이다. 다수의 정부 기관 및 에너지 유관기관에서 ESG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