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선관위, 정말 정신 차렸을까 [뉴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지난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노 전 위원장은 임기 중에 세 차례나 배우자와 함께 해외 출장을 다녀왔고, 선관위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애쓴 사실이 17일 뒤늦게 알려져 눈총을 받고 있다. 2026.6.5 연합뉴스
6·3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투표소 숫자가 계속 불어났다. 처음엔 몇 곳이었다. 다음 발표엔 더 늘었다. 그다음 발표엔 또 늘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할숫자는 어쩌면 아직도 그 밑바닥을 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선관위의 잘못은 투표용지 부족만이 아니었다. 었다. 첫 번째 잘못은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전수 조사해서 정확한 숫자를 내놓았다면 여론이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선관위는 발표할 때마다 숫자를 조금씩 더했다. 마치 드러난 만큼만 인정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국민은 그걸 모두 봤다. 아니, 국민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숫자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민주주의의 기술 장치는 선거다. 선거의 관리자는 선관위다. 그 관리자가 투표용지를 부족하게 인쇄하고, 모자란 숫자도 제대로 집계하지 못했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담당자 한 명의 부주의가 아니다.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다. 조직 관리의 체계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작동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용납될 수 없다.
수뇌부 몇이 물러났다. 언론은 책임 수습 이라 불렀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수뇌부가 물러나는 것으로 투표용지가 되살아나는가. 누락된 표 한 장의 무게가 사라지는가. 그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에게, 그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하게 만든 상황을 모두 지켜본 유권자에게 누가 사과했는가. 중앙선관위원장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우리는 봤다. 하지만 그 사과가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약속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무엇 하나 약속하지 않았다.
사퇴는 책임이 아니다. 사퇴는 그저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진짜 책임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관련자를 가리고, 다시는 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지금 선관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수뇌부가 떠난 자리에서 남은 사람들은 조용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고요다.
이 조용함을 그냥 넘겨선 안 된다. 선거는 4년에 한 번, 혹은 2년에 한 번 돌아온다. 그때마다 우리는 투표용지를 받아 들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다. 그 한 표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사한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투표함에 들어간 내 표가 온전히 셈해졌는지, 이제는 그것조차 믿을 수 없게 됐다.
선관위는 정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수뇌부 몇 명이 바뀐다고 조직이 바뀌지 않는다. 조직 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관리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 앞에 투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최고 책임자부터 말단까지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선관위는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선관위는 유권자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그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 선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제대로 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당신들, 정말로 정신을 차렸습니까?
선관위가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답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지난달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집배원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공보물을 우편함에 넣고 있다. 2026.5.24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래는 아내가 겪은 이번 지방선거의 한 단면이다. 다소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전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새벽 일찍 동주민센터로 향한 아내의 손에는 장갑도, 기대 같은 것도 없었다. 매년 해본 일이기 때문이다. 공보물 우편물 작업 아르바이트,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현장은 예상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공간은 턱없이 좁았다. 사전에 정리조차 안 된 우편물 더미가 보조 일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당 공무원은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준비가 덜 된 현장에서, 준비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 공무원뿐이었다. 간식 한 번 없었고, 공무원 눈치만 봐야 했다. 이른 오후면 끝난다던 작업은 저녁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경기도 일산의 지인은 달랐다. 앉아서 작업했고, 간식도 나왔다고 했다. 같은 나라, 같은 선거, 같은 날. 그런데 현장은 달랐다. 어떤 동주민센터는 보조 인력을 사람으로 대접했고, 어떤 동주민센터는 그저 일손으로 대했다. 이럴 거면 보조 인력을 더 불렀어야 했다. 준비 없이 사람으로 때우는 방식, 그 피해는 일당 몇 만 원짜리 시민에게 돌아갔다.
선거는 투표소에서만 치러지는 게 아니다. 그 새벽, 좁은 주민센터 한 켠에서도 치러지고 있었다.
며칠 뒤 집에 공보물이 도착했다. 큰 정당 후보들의 것은 화려했다. 이력과 치적이 빼곡하고, 사진도 선명했다. 잘 살아온 사람의 연보처럼, 페이지마다 자신감이 넘쳤다. 명함인지 종이 쪼가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들도 있었다. 인쇄도 흐릿하고, 공약도 몇 줄 적기 버거워 보였다.
돈의 크기만큼 달라진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전과 등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작은 용지에 적게 하는 꼼수 가 있다는 것이었다.
더 씁쓸한 건 따로 있었다. 선거 공보물이 발송되는 즈음에는 우편함 속에 공보물이 수북이 쌓였다. 골목 재활용 수거함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것도, 초라한 것도 함께 버려졌다. 아무도 뜯지도, 읽지도 않는 공보물 발송을 위해 새벽부터 아내를 비롯해 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땀을 흘렸다. 누군가의 공약이 우편함 아래 바닥에 밟히고 있었다.
이쯤에서 물어야 한다. 지금 모든 국민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뉴스도, 쇼핑도, 민원도 손안에서 해결한다. 그런데 선관위는 여전히 종이 공보물을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보낸다. 왜인가. 관행이기 때문인가. 법이 그렇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관행과 법을 바꿔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선관위가 유권자 명단으로 문자 한 통을 보내면 된다. 후보 이름과 QR 코드 하나. 그것으로 유권자는 거대정당 후보의 공약도, 군소정당 후보의 공약도 동등하게 펼쳐 볼 수 있다. 화려한 인쇄물도, 흐릿한 종이 쪼가리도 필요 없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모든 후보는 같은 크기의 글자로 놓인다.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 제공
민주주의는 선택의 자유다. 하지만 선택이 공정하려면 정보가 공평해야 한다. 거대정당 후보의 이름은 알아도 군소정당 후보의 공약은 모르는 선거, 그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공보물의 차이가 유권자 선택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 그 출발선을 같게 만드는 일이 선관위의 임무다. 투표용지만 관리하는 게 선관위의 일이 아니다. 모든 후보가 공평하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환경, 모든 유권자가 공평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구조, 그것을 설계하고 책임지는 것도 선관위의 역할이다.
다음 선거는 정말 달라졌으면 한다. 조태희 시민기자 jotaehu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