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 남자, 총알에 스러졌지만 꿈은 살아남았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다. 키 177센티미터, 체중 77킬로그램, 목사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었고, 연설을 하면 청중이 울었으며, 감옥에 갔다 오면 더 유명해졌다. 보통사람 같으면 감옥 한 번에 이력서에 흠집 났다며 조용히 살았겠지만, 그는 달랐다. 감옥에 갈수록 지지자가 늘었으니, 어찌 보면 가장 기묘한 성공 방정식을 가진 인물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29~1968).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929년 1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도 마틴 루터 킹(1899~1984)이다. 아들이 더 유명해졌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뿌듯하면서도 조금 억울했을지 모른다. 킹은 열다섯 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열여덟 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스펙 이 남달랐다.
1964년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위키피디아)
버스 뒷자리의 반란, 한 자리가 역사를 바꾸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1913~2005)라는 여성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시내버스에서 백인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 시절 미국 남부에서는 버스 앞자리는 백인 전용, 뒷자리는 흑인 전용이었다. 심지어 앞자리가 꽉 차면 흑인이 자리를 내줘야 했다. 버스 요금은 똑같이 냈는데도 말이다. 이쯤 되면 버스회사 입장에서는 흑인손님이 봉 이었던 셈이다.
파크스가 체포되자 몽고메리 흑인공동체가 들고 일어났다. 381일의 버스타기 거부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스물여섯 살의 킹 목사였다. 381일이면 꼬박 1년이 넘는다. 걷고, 자전거 타고, 이웃 차에 얹혀 다니면서 버텼다. 미국 법원은 결국 1956년 버스좌석 분리정책이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한 자리가 법을 바꾼 것이다.
킹 목사의 어린 시절 애틀랜타 집(위키 피디아)
꿈 하나로 20만 명을 모으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수도 한복판 링컨기념관 앞에 20만 명이 모였다. 킹은 거기서 그 유명한 연설을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원고에는 없던 즉흥 대목이었다는 말도 있고, 연설 전 어느 지인이 해 준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역사에 길이 남은 그 문장은, 어쩌면 그날 그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었는지 모른다.
그 꿈의 내용은 이랬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라. 백인아이와 흑인아이가 형제자매처럼 손잡는 나라. 지금 들어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 꿈을, 1963년에는 목숨 걸고 외쳐야 했다. 그게 문제였고, 그게 역사였다.
1964년, 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나이 서른다섯. 당시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상금을 몽땅 운동기금으로 내놨다. 요즘 같으면 유튜브 채널 열고 강연 다니며 먹고살텐데, 이 분은 그러지 않았다.
1956년 3월 22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법원을 나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부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의 키스를 받으며 웃고 있다.(위키피디아)
총알은 사람을 죽이지만 꿈은 못 죽인다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 킹은 모텔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서른아홉 살에 생을 접었다. 범인 제임스 얼 레이(1928~1998)는 이듬해 체포됐다. 암살 이후 미국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비폭력을 가르친 사람의 죽음이 폭력을 불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토록 잔인하다.
그러나 총알이 못해낸 일이 있다. 꿈을 죽이는 일이다.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은 그의 운동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1961~ )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을 때, 사람들은 킹의 이름을 떠올렸다. 킹이 꿈꾼 나라가 조금씩, 더디게, 그래도 앞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론 그 나라가 완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1973~2020) 사건이 터졌을 때, 킹이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다시 거리로 나섰을 것이다.
킹 목사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시민권 운동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위키피디아)
그가 남긴 방법론, 비폭력 저항
킹의 가장 큰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니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이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1948)에게서 배운 이 방식은, 맞으면서도 맞서지 않고, 쓰러지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천은 지독히 어렵다.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면 지배자는 더 강한 폭력을 꺼낼 핑계가 생긴다. 그러나 평화롭게 저항하면, 폭력을 쓰는 쪽이 누구인지 세상이 본다. 킹은 그것을 알았다.
앉아있기 운동, 자유 승차운동(Freedom Riders), 행진, 불매운동. 모두 같은 원리다. 불편하고, 느리고, 돈도 안 되는 방법. 그러나 역사를 바꾸었다.
1962년 11월의 킹 목사(위키피디아)
한국에서 킹을 읽는다는 것, 우리의 버스 뒷자리는 어디인가
자, 이제 지구 반대편 이야기를 꺼낼 차례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는 계엄령 선포라는 초현실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시민들이 맨몸으로 국회 앞에 모였다. 군인들이 철수했다. 계엄은 여섯 시간 만에 해제됐다. 촛불이 다시 켜졌다.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 현실에서 반복됐다. 킹이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당신들, 이미 알고 있군요 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국사회에서 킹의 유산이 던지는 시사점은 여럿이다.
첫째, 법 앞의 평등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킹은 법이 바뀌길 기다리지 않았다. 잘못된 법에 몸으로 맞섰다. 한국에서도 노동권, 이주민권리, 장애인 이동권, 성소수자 인권 등 아직 버스 뒷자리에 앉혀진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선로에 드러눕는 장애인 단체를 보며 불편하다 고만 말한다면, 1955년 몽고메리 시민들과 뭐가 다를까.
둘째, 지도자는 제도가 만들지 않는다. 킹은 어떤 공직도 없었다. 당선된 적도, 임명된 적도 없다. 그냥 목사였다. 그런데 20만 명이 따랐다. 말과 행동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사람을 꼽아보라고 하면,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 간극을 시민이 채워야 한다는 것이 킹의 교훈이다
셋째, 분노는 연료지만 방향이 없으면 폭발한다. 킹은 분노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분노를 조직하고, 방향을 잡고, 비폭력이라는 틀에 담았다.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쏟아지는 분노는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그 에너지가 어디로 가느냐다. 혐오로, 진영 다툼으로, 소모적 논쟁으로 흩어지는 걸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 연대는 피부색을 가리지 않았다. 킹의 운동에는 백인 지지자도 있었다. 유대인 종교인도 함께 행진했다. 우리 편 만 모아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킹은 알았다. 한국 사회의 여러 운동이 종종 자기들끼리의 언어와 문화 속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면, 킹의 연대 방식에서 배울 것이 있다.
킹 목사는 1963년 흑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다 체포되었다.(위키피디아)
꿈은 유통기한이 없다
킹이 쓰러진 지 57년이 지났다. 그의 꿈은 완성됐는가. 아니다. 그래서 아직도 읽힌다. 완성된 꿈은 박물관에 가지만, 미완의 꿈은 거리에 산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7년 민주화, 2016~2017년 촛불, 2024년 계엄 저지 빛의 혁명. 우리도 꿈을 꾸며 걸어왔다. 그 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거리로 나간다. 킹이 그랬듯이.
총알은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꿈은 죽이지 못한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1963년 6월 22일 린든 B. 존슨 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이 마틴 루터 킹 목사, 벤저민 메이스, 그리고 다른 시민권 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