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럽 연기금의 ‘블랙록 결별’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근 네덜란드 금속산업 연기금(PME)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BlackRock)에게 맡겼던 주식 운용 자금을 전액 회수했다. 이어 지난 9월에는 네덜란드 보건복지 연기금(PFZW) 역시 블랙록에서 약 145억유로(약 25조1750억원), 리걸앤제너럴(LGIM)에서 150억유로(약 26조390억원)를 각각 회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유럽의 연기금들은 더 이상 ESG를 고려한다”는 운용사의 말뿐인 선언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기후·자연·사회 리스크를 실제로 관리하고 있는지,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시하고 있는지를 잣대로 자본을 냉정하게 재배분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위탁 운용사 교체가 아니다. ESG와 지속가능성이 이제 ‘선언적 가치’를 넘어, 연기금의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을 가르는 ‘생존의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러한 유럽발(發) 충격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국민연금을 비롯한 한국의 연기금과 자본시장은 이 거대한 지각변동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핵심은 ESG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사의 자격 요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ESG는 투자 철학의 문제를 넘어섰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훼손, 공급망 인권 이슈 등은 재무제표 밖의 변수가 아니라, 장기 수익성과 가입자 보호라는 연기금의 본질적 임무를 좌우하는 구조적 상수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유럽 연기금들은 운용사 선정 시 지속가능성 공시의 충실성, 기후 전환 전략의 신뢰성, 그리고 의결권 행사와 같은 주주 관여(Engagement)의 실효성을 엄격히 따진다. 아무리 덩치 큰 글로벌 운용사라도 이 기준에 미달하면 가차 없이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블랙록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과 함께 정치적 이유로 ESG를 배격하는 ‘Anti-ESG’ 흐름이 거센 반면, 유럽에서는 오히려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은 ESG”가 퇴출 사유가 되고 있다.
이런 균열 속에서 한국은 현명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우리가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어정쩡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미국의 반(反)ESG는 정치적 역학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수 있지만, 유럽의 ESG 강화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표준이자 규범으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본시장이 글로벌 정합성을 유지하고 경쟁력을 갖추려면, 지속가능성 공시와 ESG 기준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와 연기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지속가능성 정보공시 의무화 로드맵을 하루빨리 확정하여 자본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야 한다. 공시는 단순한 규제 대응용 보고서가 아니다. 이는 장기 리스크를 조기에 식별하고 자본 배분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핵심 인프라다. ‘과거 성과’가 아닌 ‘미래 적응력’을 평가할 데이터가 필요하다.
둘째,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위탁운용사 평가 기준에 ‘ESG 실행력’을 명시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단순히 ESG 정책이 있느냐가 아니라, 실제 포트폴리오가 변화하고 있는지, 전환 금융을 실행하고 있는지, 스튜어드십 코드를 얼마나 실효성 있게 행사하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셋째, 수탁자 책임의 범위를 재정의해야 한다. 단기적 재무 성과에만 매몰되지 않고, 기후와 사회 리스크를 방치함으로써 발생할 장기적 손실을 회피하는 것 또한 국민 재산을 지키는 수탁자의 책무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네덜란드 연기금의 결정은 ESG는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무늬만 ESG인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다. 지금 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글로벌 연기금 생태계에서 형식적 기준만 쫓는 수동적 변방으로 남을 것이다. 지속가능성 공시와 ESG 강화는 비용이 아니라, 연기금의 신뢰와 수익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레벨을 높이는 유일한 해법이다.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는 국내 ESG 전문가로 꼽힌다. 양춘승 상임이사는 서울대 경제학 학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너지정책학 석박사 출신으로 2007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설립을 주도했고 현재까지 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양춘승 이사는 2008년에 국내 최초로 글로벌 금융기관 주도의 기후 관련 정보공개프로젝트인 CDP를 국내에 도입해 운영 중이다. 이후 RE100, EV100(전기차 전환 캠페인), PCAF(탄소회계 금융협의체), SBTi 등 국제적인 이니셔티브를 도입하며 우리나라 금융과 기업의 지속가능성 경쟁력 제고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