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진화하는 유기체…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망 속에서 태어났다. 6월 항쟁의 승리로 쟁취한 이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안착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지만 서른여덟 해가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현행 헌법은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전, 그리고 디지털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이다. ‘문화 국가’에 대한 담론이 성숙하지 못했던 시절의 규범이기에, 오늘날 국민이 체감하는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과 격차 해소라는 시대정신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헌법을 고정된 화석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며 진화하는 ‘유기체’로 바라보아야 한다.
2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5·18정신헌법전문수록개헌국민추진위원회와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실이 연 에 참석한 김영록 전남도지사(왼쪽 두번째부터), 감기정 광주시장, 우원식 국회의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 민주당 정청래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진보당 전종덕 원내부대표,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 겸 원내대표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2.25. 연합뉴스
‘연성 헌법 정신’과 ‘해석적 개헌’의 지혜
헌법 개정이 늘 정치적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좌초되는 경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제안하는 핵심 철학이 바로 ‘연성 헌법 정신’이다. 이는 헌법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유지하되, 변화하는 사회 상황에 맞춰 필요한 조항을 유연하게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방식이다. 미국 헌법이 수정 조항(Amendments)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가듯, 우리도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특히 갈등이 첨예한 권력 구조 문제는 ‘해석적 개헌’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조문을 전면 수정하지 않더라도, 현행 헌법 제86조와 제87조가 규정한 국무총리의 행정 통할권과 국무위원 제청권을 문언 그대로 실질화한다면 충분히 ‘책임총리제’를 구현할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법률의 합헌적 해석처럼 헌법을 운용하는 ‘묘(妙)’를 발휘하여 협치와 분권의 정신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
헌법 전문의 ‘균등’ 가치와 실질적 균형 발전
우리 헌법 전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이라는 극심한 불균등 상태에 놓여 있다. 이는 헌법이 지향하는 ‘균등’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황이다.
진정한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서는 단순히 예산을 배분하는 차원을 넘어, 헌법적 가치를 현장에서 실현하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명문화하고 자치 입법권과 재정권을 확고히 보장하는 분권형 개헌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노동과 복지의 상생 모델을 구축하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한 이익 공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헌법 제32조(근로의 권리)와 제120조(자원의 이용)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디지털 시대, 정보주권을 가진 국민의 권리
1987년 체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정보화 사회의 위협과 기회에 대해서도 헌법적 대안이 필요하다. 이제 정보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헌법재판소가 판례로만 인정해 온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헌법 조문에 명시해야 한다.
정보의 주체로서 내 정보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필요하다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힐 권리’는 디지털 시대 인격권의 핵심이다. 또한 AI 알고리즘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 국가의 정보 격차 해소 의무를 명시하여, 디지털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 권리 역량은 정보 활용 능력, 인권 보호 역량, 그리고 연대와 협력이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10일 국회에서 개헌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3.10. 연합뉴스
다양성이 꽃피는 문화 국가의 완성
나아가 ‘문화적 권리’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현행 헌법 제9조의 전통문화 계승 차원을 넘어,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미디어 접근이 어려운 소외계층을 위한 ‘정보문화 향유권’을 신설하고, 다문화 사회에 걸맞은 ‘문화 다양성’을 헌법적 가치로 수용해야 한다. 문화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와 함께 만드는 매니페스토 개헌
헌법은 정치인들만의 계약서가 아니다. 헌법은 ‘국민의 문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공동체의 가치와 지향점을 담은 사회적 합의의 총체이자,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일상을 규정하는 삶의 양식이다.
불행히도 오랜 시간 개헌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국민은 개헌의 최종 단계인 투표에서만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1937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헌법이 결코 ‘법률가와 정치가의 계약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문서(Layman s Document)’여야 함을 강조했다. 헌법의 본질적인 힘은 전문적인 법 기술이 아니라 국민의 보편적인 이해와 동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개헌은 혐오와 분열을 넘어 연대와 포용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권력 싸움이 아닌, 내 삶이 바뀌고 지역이 살아나며 디지털 세상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헌법은 오직 국민의 의사에 의해 제정되고 개정되어야 하는 주권자의 엄중한 약속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