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100년 앞서 양심적 병역거부 입법한 토머스 하비

100년 앞서 양심적 병역거부 입법한 토머스 하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정치인이 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념을 버리는 사람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버리는 사람. 영국 의회사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의원은 열일곱 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토머스 에드먼드 하비(Thomas Edmund Harvey, 1875~1955)는 유독 눈에 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당의 전쟁을 반대하다가 쫓겨났고, 그러고도 의회로 돌아와 다시 양심을 외쳤기 때문이다.   에드먼드 하비.(위키피디아) 착한 형, 부유한 집안, 그리고 불편한 신념 하비는 1875년 1월 4일 영국 리즈의 유복한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생인 작가 윌리엄 프라이어 하비(William Fryer Harvey, 1885~1937)는 훗날 어린 시절 회고록 『우리는 일곱이었다(We Were Seven)』에  형제 중 가장 친절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형 톰 이라고 썼다. 그렇다.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착한 형이었다. 착한 형이 자라 착한 의원이 되는 것, 이것이 기적처럼 들린다면 우리가 얼마나 정치에 상처받았는지를 방증한다. 그는 부스텀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세기의 윌리엄 펜(1644~1718) 이후 처음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한 퀘이커 교도로 알려져 있다. 퀘이커 교도가 옥스퍼드에 입학하기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단순한 학벌 자랑이 아니라 소수자로서 관문을 뚫은 이야기다. 옥스퍼드 졸업 후 그는 런던 이스트엔드의 사회 개혁 공동체인 토인비 홀(Toynbee Hall)의 관리자가 되었으며, 1910년 1월 리즈 서부 선거구에서 자유당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토인비 홀이란 무엇인가. 1884년에 설립된 이 공동체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이 런던 빈민가에 직접 들어가 살며 노동자와 이주민들을 돕는 곳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현장 밀착형 시민운동 센터 인데, 하비는 그 책임자로서 교육, 법률 지원, 공동체 조직 등을 이끌었다. 스펙 쌓으러 간 게 아니었다. 정말 살았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의회의 분위기는 전쟁 지지 일색이었다. 국민감정도 불타올랐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인 하비에게 전쟁이란, 신앙과 양심의 차원에서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비는 전쟁 발발과 함께 의회 개인비서 직을 사임했으며, 프랑스전선에서 퀘이커 전쟁피해자구호위원회를 대표해 구호 활동에 직접 뛰어들었다. 영국이 참전을 결정한 1914년 8월 3일의 밤, 그는 의회에서 허버트 헨리 아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852~1928) 총리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는 이 전쟁이 유럽 여러 나라 대다수의 국민에게, 우리나라뿐 아니라, 민중의 전쟁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이 말을 하는 데 용기가 얼마나 필요했을지 짐작해 보라. 전쟁 지지 열기가 넘실대는 의회에서, 자기 당 지도부에게, 이 전쟁은 잘못됐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오늘날 한국국회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상상해 보면… 글쎄, 상상이 안 된다. 그게 문제다.   윌리엄 프라이어 하비의 저서(김성수 시민기자 소장)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법으로 만들다 하비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16년에 찾아온다. 동료 퀘이커 의원 아놀드 라운트리(Arnold Stephenson Rowntree, 1872~1951)와 함께, 그는 1916년 군복무법(Military Service Act 1916)에 양심 조항 을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항으로 인해 군사징집에 양심적으로 반대하는 시민은 징집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보수당 의원 조지 레인폭스(George Lane-Fox, 1870~1954)는 이렇게 비꼬았다. 우리 모두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면, 나라가 세계의 힘에 의해 결국 소멸될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존중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그다지 존중하지 않습니다. 비꼬는 솜씨만큼은 현대 정치인 못지않다. 그러나 역사는 레인폭스가 아니라 하비의 손을 들어줬다. 법안은 양심 조항과 함께 통과되었고, 이는 근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법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하비는 훗날 이렇게 썼다. 위대한 국가가 전쟁 한복판에, 원칙적으로나마, 시민 개개인의 양심의 권리를 인정했다. 원칙적으로나마  라는 단서가 뼈아프다. 법이 생겼다고 현실이 곧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원칙을 법에 새겨 넣는 일, 그것이 하비가 한 일이었다.   아놀드 라운트리의 1918년 선거 홍보물(The conscience of the nation: the work of three Quaker MPs during World War I | Quaker Strongrooms) 자리를 잃고, 다시 돌아오고 전시 반전 활동으로 지역구 자유당원들의 신임을 잃은 하비는 1918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소신 발언의 대가는 언제나 가혹하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1923~1924년 잠깐 듀즈베리 선거구에서 자유당 의원으로 복귀한 뒤, 1937년에는 잉글랜드 합산 대학 선거구 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1945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그가 의회에 없는 동안에도 손을 놓지 않은 일이 있다. 1921년부터 그는 리즈의 암리 감옥을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방문하는 독립적 교도소 방문자가 되었다. 자신이 집에 있는 모든 일요일, 30년 동안 그는 수감자들을 찾아갔다. 30년이다. 선거 때만 민심 챙기는 의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1912년 하비와 그의 아내 아이린 초상화(A politician of conscience: Thomas Edmund Harvey (1875-1955) and conscientious objection - The History of Parliament) 전쟁이 끝나도 싸움은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하비는 다시 같은 자리에 섰다. 이번에는 무소속의원으로서, 당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를 다시 한 번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1945년 7월 의회를 떠난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퀘이커교도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1955년 5월 3일, 리즈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와 평생 교류했던 동료 퀘이커교도 윌프리드 앨럿은 이렇게 썼다. 내가 하비를 만날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가 선한 일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그의 부고를 쓴 《요크셔 포스트》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 개혁가들 가운데 이처럼 지속적이고 견고한 활동 기록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하비가 퀘이커 구급대 제복을 입고 아내 아이린과 함께 있는 모습. 1915년 프랑스 세르메즈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A politician of conscience: Thomas Edmund Harvey (1875-1955) and conscientious objection - The History of Parliament) 한국에서 읽는 하비, 시사점과 배울 점 하비의 삶은 멀리 있는 영국 이야기지만, 한국 현실에 얹어 읽어도 낯설지 않다. 첫째,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 한국은 2018년 대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뒤늦게 인정했다. 하비가 이 권리를 법에 새기기 위해 싸운 것이 1916년이다. 꼭 100년이 걸렸다. 늦었지만 왔다. 그러나 지금도 대체복무제도가 충분히 정착됐는지, 양심을 이유로 한 거부가 진정 존중받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둘째, 공천 탈락이 두려운 정치인들에게. 하비는 당의 전쟁 지지 방침에 반대하다 공천을 잃었다. 오늘날 한국 의원들은 공천권을 쥔 지도부의 눈치를 보느라 소신발언을 자제한다. 하비는 공천이 날아가도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리고 결국 의회로 돌아왔다. 신념은 자리보다 오래 갈 수도 있다.  셋째, 제도보다 사람. 하비는 30년 동안 매주 감옥을 찾아갔다. 제 도개혁을 외치는 것과, 매주 일요일 실제로 감옥에 가는 것은 다르다. 한국의 수많은 사회개혁 담론이 발표 이후 현장에 닿지 못하는 것과 대조된다. 넷째, 소수의 원칙 이 다수의 상식이 된다. 그는 전쟁 중에 반전을 외치면 매국노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그 목소리가 역사의 양심으로 남아 있다. 소수의 원칙이 다수의 상식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원칙이 없었다면, 상식도 없었다.   하비가 1916년 병역법에 추가한 수정안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이유로 병역 면제를 보장했다.(A politician of conscience: Thomas Edmund Harvey (1875-1955) and conscientious objection - The History of Parliament) 착한 형이 되는 일 토머스 에드먼드 하비는 영웅의 서사를 가지지 않은 영웅이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 총을 들지 않았다. 그는 혁명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법으로 만들고, 일요일마다 감옥을 찾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동생은 그를 가장 친절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형 이라 불렀다. 정치에서 착한 형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급진적인 행동일지 모른다.   리즈 헤딩글리에 있는 하비의 옛 집에 붙어 있는 파란색 기념 명판(위키피디아)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