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인간 괴테, 83년을 살며 평생 배웠다 [사람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이름부터 길다. 살았던 세월도 길었다. 83년. 요즘도 83세까지 사는 게 쉽지 않은데, 18~19세기에 그 나이까지 살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업적이다. 게다가 그는 그 긴 세월을 그냥 축내지 않았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자연과학자, 정치가, 화가. 명함을 열 장은 만들어야 할 사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초인적 멀티플레이어 쯤 되겠는데, 정작 그 말은 괴테에게 쓰기엔 너무 가볍다.
괴테 초상화, 1828년(위키피디아)
프랑크푸르트의 부잣집 도련님, 세상을 뒤흔들다
1749년 8월 28일, 지금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난 괴테는 사실 출발점이 꽤 유복했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1710~1782)는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1731~1808)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다. 쉽게 말해, 흙수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는 흥미롭게도, 부잣집 도련님이 가장 가난하고 절망적인 청춘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점에서 괴테를 특별하게 기억한다.
1774년, 스물다섯의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했다. 이 소설 하나로 유럽 전역이 들썩였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짝사랑에 괴로워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였는데, 이것이 당시 청년들에게 어마어마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전역에서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파란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입고 다녔고, 급기야 실제로 따라 자살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인류 최초의 모방자살 유행 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이를 베르테르 효과 라 부른다. 소설 하나가 사회현상이 된 것이다. 괴테는 당황했다.
나는 그냥 내 짝사랑 실패담을 썼을 뿐인데요.
물론 그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의 생가(위키피디아)
바이마르의 정치인 괴테, 시인도 세금을 걱정했다
1775년, 스물여섯의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1757~1828)의 초청을 받아 바이마르로 이주한다. 그리고 이후 10년간 실질적인 행정관료로 일했다. 광산감독, 도로 건설관리, 재정위원회 의장까지. 낭만적인 시인이 도로포장 예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괴테를 단순한 문학가와 구별하는 지점이다. 그는 세상이 시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이마르 시절, 괴테는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와 역사적인 우정을 쌓는다. 둘 다 독일 문학의 봉우리인데, 처음엔 서로 별로 안 좋아했다. 실러는 괴테를 너무 귀족적이고 차갑다 고 했고, 괴테는 실러를 좀 과격하다 고 여겼다. 그러다가 1794년 어느 학술강연 뒤에 우연히 대화를 나누면서 의기투합했다. 이후 두 사람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황금기를 함께 이끌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원수가 동지가 되는 건 정치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실러 초상(위키피디아)
『파우스트』, 60년을 쓴 불굴의 집념
괴테의 최고 걸작 『파우스트』는 60년에 걸쳐 완성됐다. 1부는 1808년, 2부는 그가 죽기 직전인 1832년에 탈고됐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학자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인간의 욕망·지식·구원에 관한 서양정신사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방대한 작품의 핵심 주제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라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도 허무함에 빠지고, 악마와 손을 잡고, 사랑하는 여인 그레트헨을 파멸시키고, 온갖 권력과 욕망을 추구하다가, 결국 그 끝없는 추구자체 때문에 구원받는다. 쉬지 않고 노력하라 는 메시지인데,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번아웃이 와도 멈추지 마라 쯤 될 것 같아 살짝 섬뜩하기도 하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괴테가 말한 노력 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38세의 괴테,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그린 초상화, 1787년(위키피디아)
자연과학자 괴테, 뉴턴에게 시비를 걸다
괴테는 문학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식물학, 광물학, 해부학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빛과 색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해 『색채론』(1810)을 펴냈는데, 여기서 그는 아이작 뉴턴(1643~1727)의 광학이론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뉴턴이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색이 나온다 고 했다면, 괴테는 색은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고 주장했다. 과학사적으로는 뉴턴의 손을 들어주지만, 괴테의 색채이론은 훗날 화가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틀려도 영향력이 남는 것이 진짜 거인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아이작 뉴턴 초상화(위키피디아)
나폴레옹과의 만남, 황제가 시인 앞에 경의를 표하다
1808년, 에르푸르트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와 괴테가 만났다. 당시 유럽을 제패한 황제가 59세의 괴테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신은 진정한 인간입니다.
칼을 든 자가 붓을 든 자에게 경의를 표한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원정 중에도 챙겨 다녔다고 하니, 전쟁터에서 짝사랑 소설을 읽는 황제의 모습이 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나폴레옹 초상화(위키피디아)
괴테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
자, 여기서 잠깐 고개를 한반도 쪽으로 돌려보자.
괴테가 살았던 시대의 독일은 지금의 한국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수십 개의 소국으로 쪼개져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던 18세기 독일.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고, 내부정치는 여전히 뜨겁게 들끓고, 세대갈등과 경제불안이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21세기 한국. 시대는 다르지만 질문은 비슷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혼란 속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
첫째, 괴테의 삶은 전문가 만능주의 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좁은 전문성만을 요구한다. 어릴 때부터 한 우물만 파도록 몰아붙이는 입시체제, 직무 기술서에 딱 맞는 사람만 뽑는 채용문화. 그러나 괴테는 시인이면서 행정관이었고, 과학자이면서 화가였다. 넓게 보는 눈이 오히려 각 분야를 더 깊게 만든다는 것을 그의 삶이 증명한다.
둘째, 『파우스트』의 정신, 멈추지 않는 추구 는 오늘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묻는다. 지금 한국 청년들은 추구를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추구할 대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파트 청약, 주식, 코인이 꿈의 자리를 대신하는 현실. 괴테는 파우스트에게 욕망을 허락했지만, 그 욕망이 타인을 짓밟는 순간 파멸이 시작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사회의 경쟁 구조가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인지를 되물을 때다.
셋째, 괴테와 실러의 우정은 오늘의 진영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에 서로 못마땅했던 두 거인이 대화를 통해 협력의 황금기를 열었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형은 어떤가. 대화는 사라지고 진영만 남은 자리에서, 괴테와 실러 같은 건강한 긴장과 협력 은 가능한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 더 높은 곳을 향하는 것, 이것이 괴테가 몸으로 보여준 지혜였다.
넷째, 83세까지 현역으로 살았던 괴테의 생애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에 새로운 상상력을 요청한다. 그는 73세에 열여덟 살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1804~1899)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그 실연의 아픔으로 시를 썼다. 노년도 삶이라는 것, 늙어서도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이를 소비기한 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괴테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더 많은 빛을(Mehr Licht!)
괴테가 임종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로 알려진 것이 있다. 더 많은 빛을!(Mehr Licht!) ,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그 말이 괴테라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더 밝은 것을 원했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보기를 원했다.
혼탁한 시대일수록 빛을 찾아야 한다. 소음이 진실처럼 포장되고, 분노가 지혜인 척 행세하며, 편 가르기가 정의의 이름을 빌리는 시절일수록, 더 많은 빛을 이라는 외침은 더욱 절박하게 들린다.
괴테는 1832년 3월 22일 바이마르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평생 붙잡으려 했던 질문들은 아직 살아있다. 그 질문들이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땅에서 다시 울린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가.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빛을 향하고 있는가.
괴테와 울리케, 마리엔바드의 하인리히 드레이크 조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