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만신창이의 세상을 보라” 한 영화감독의 외침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직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 직설을 알아듣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의 신작 도 영화가 시작되고 16분이 지나기까지, 도통 어둠이다. 스크린이 어둡다. 그건 단순히 밤이라는 설정 때문만이 아니다. 사실은 이란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 어두운 이란 사회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이란 밖 사람들의 무지한 인식에 대한 표현인 셈이다. 그러니 좀 답답하더라도 영화 앞부분을 잘 인내하고 봐야 한다.
납치 사건으로 번진 ‘그저 단순한’ 운전사고
영화의 시작은 한 사내가 임신 중인 아내와 어린 딸을 차에 태우고 어둠 속에서 운전하며 가다가 뭔가를 치는 사고를 내는 장면이다. 아내는 아이에게 아빠가 동물(강아지)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며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다 신의 뜻’이라고도 말한다. 영화에서 제목으로 차용된 남자 아내의 이 말은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이한 변명, 용납할 수 없는 합리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남자와 가족은 그저 사고였을 뿐인 사고를 절대 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차 안의 음악소리를 좀 줄이고 뒷좌석에서 콩콩 뛰며 춤을 추는 딸아이를 자제시켰다면 운전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저 사고였을 뿐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의 차는 사고 후 문제가 생기고, 남자는 늦은 밤 외딴곳에서 차를 임시 수리에 맡기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이 남자는 하루 전 그 외딴곳에 있었던 남자의 추적을 받다가 갑자기 납치당한다. 이때부터 얘기는 뒤집힌다. 납치한 남자가 이야기의 화자, 즉 주인공이 되고, 납치당한 남자는 반대로 대상이 된다. 영화는 곧 소동극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소동은 꽤 비극적이다 못해 참담한 것이 된다.
납치범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그는 과거에 반체제 선전 선동 및 공모 혐의로 체포돼 극악한 고문을 당했다. 그를 고문했던 남자가 일명 외다리 에크발(에브라힘 아지지)이었다.
운전사고 낸 이 외다리가 그 고문 기술자 외다리일까?
바히드의 눈은 늘 가려져 있었다. 바히드가 고문 기술자를 알아봤던 이유는 그가 걸을 때마다 들렸던 의족 소리 때문이었다. 바히드가 지금 막 납치한 인물도 의족을 사용하고 있다. 바히드는 자기가 고문 기술자라고 생각하는 이 의족 남자를 사막에 데려가 생매장해 죽이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남자가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자 바히드는 망설인다. 자칫 엉뚱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히드는 외다리 에크발을 알아볼 만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서점을 운영하는 살라르가 있고, 웨딩 사진기사인 시바(마리암 아프사리), 그녀의 친구인 골리(하디스 하크바텐)도 만난다. 골리는 알리(마지드 파나히)라는 남자와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시바는 바히드를 하미드(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란 남자에게까지 안내한다. 바히드, 살라르, 시바, 골리 그리고 하미드 모두 외다리 에크발에게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하미드)은 외다리의 뺨에 흉터가 있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며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뛰기 시작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집단 살인극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납치된 남자는 자백을 하게 될까? 진실을 말하게 될까?
바히드로 시작된 이 고문 피해자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그만 여기서 끝내자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이 지경까지 왔으니 물러설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바히드가 몰고 다니는 밴 뒤에는 관이 실려 있다. 그 안에 에크발로 추정되는 납치한 남자를 수면제 먹여 재운 후 끌고 온 상태다. 일행 모두는 이제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이란은 결코 성스러운 나라가 아님을 폭로해 온 영화감독들
이란은 대표적인 신정(神政) 사회이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후 강고한 이슬람 국가를 운영하며 반혁명 세력 및 친(親)기독교 서방 세력에 대해 정치적 탄압을 넘어 비밀경찰을 동원한 고문과 감금을 일삼아 왔다. 다수의 지식인, 여성 운동가(예컨대 히잡 착용을 반대하는 시위 여성), 인권 변호사에 대한 탄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모든 언론출판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데에 있다.
그중 영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야말로 가장 심상치 않은 상태이다. 히잡 반대 시위의 문제를 다룬 의 감독과 배우들이 대부분 유럽으로 망명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영화계는 끊임없이 자신들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아 왔다. 덴마크에서 살아가며 영화를 만드는 알리 아바시 같은 감독마저 (2023)를 통해 이란 사회에도 윤락과 연쇄살인이 존재함을 보여줬다. 신성한 알라의 나라는 다르다는 이란 사회가 감추려 했던 현실이다. 그만큼 이란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를 이란 영화들은 서슴지 않아 왔다. 이란은, 한편으로는 인구 천만에 가까운 테헤란 같은 가장 현대적인 메가시티를 지닌 첨단 국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고문의 나라이다.
그런 사회를 직설적으로 비판해 온 대표적인 감독이 자파르 파나히이다. 그는 정부의 강한 규제를 받아 왔으며 2010년에는 아예 이란 사법부로부터 향후 20년간 영화 제작을 불허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파나히 감독은 그에 굴하지 않고 2011년에는 란 제목의, ‘영화가 아닌 척하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2015년에는 택시 안의 블랙박스를 이용해 촬영한 란 작품을 만들며 줄기차게 영화 투쟁을 이어 왔다.
대체로 이런 자파르 파나히의 노력에 대해 칸과 베를린 등 유수 영화제들이 주요 부문 시상이라는 화답을 이어 왔다. 이번 역시 올해 칸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지난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자파르 파나히와 이번 작품을 초청한 것은, 이란 사회의 개방을 촉구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 역시 계엄 사태를 딛고 더 나은 민주적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반면교사급 정치적 의지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자파르 파나히가 이제 이란 사회도 어쩌지 못할 만큼 대가급 감독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보복이냐, 용서냐, 중립이냐, 더 많은 논쟁이냐
영화 속 인물들의 자기 고백이 눈물겹다. 신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니며 에크발에게 보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골리는 예비 신랑에게 자신이 3시간 동안 목에 교수형 줄을 걸고 서 있었으며 자신을 천국에 보내지 않으려면 순결을 잃게 해야 한다며 에크발 일당에 강간당했던 일을 고백한다. 맹세코 예식 전에 이 얘기를 당신한테 하려고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골리와 함께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강경론자 하미드 역시 남자가 자신을 발가벗겨서 고문실을 질질 끌고 다녔다며, 그 수치의 고통을 토로한다. 고문을 당하면 영혼이 망가진다. 고문의 공포는 쉽게 잊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잊히지 않는다. 늘 같은 꿈을 꾸게 되고 일상에서도 겁을 집어먹고 살게 된다.
살라르(서점 주인)의 소개로 바히드가 만나서 끝까지 동행하게 되는 시바(웨딩 사진기사)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저들과 똑같이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바 역시 마지막에는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게 된다. 자파르 파나히가 이 영화로 제시한 해법, 곧 고문을 고문으로 치유하려는 행동 양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살라르나 시바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골리나 하미드가 될 것인가. 어정쩡한 중립의 영화 속 주인공 바히드는 어쩌면 자파르 파나히 자신의 얼터 에고(분신)일 것이다. 바히드가 됐든 파나히가 됐든, 혹은 우리 자신이 됐든 이 문제 앞에서는 늘 고민하고 어쩔 줄 몰라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치역사적 문제에 관한 한 영원한 해법은 없다는 것, 더 많은 논쟁이야말로 진정한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자파르 파나히가 말하고자 했던, 궁극의 주제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온 세상이 진리 향한 투쟁을 요구하지 않는가
억압과 제재 속에 아이들 영화만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 마지드 마지디의 ) 이란 영화계가 정치적 의지와 투쟁으로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을 연이어 만들어 내고 있다. 진리를 향한 투쟁은 늘 칭송받아야 한다. 영화는 종종 텍스트 분석 ‘따위’는 걷어치워야 한다. 자파르 파나히의 은 정치적으로 분노하는 것,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차이를 얘기하는 영화이다. 더 나아가 분노의 방법론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근데 그게 꼭 이란에만 해당하는 얘기일까. 지금의, 만신창이가 된 세상을 보라.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파르 파나히의 외침이다. 그 목소리를 잘 들어 보시기들 바란다. 지난 10월 1일 개봉했다. 11일 현재까지 전국 누적 관객 수는 1만 961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