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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보조에서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된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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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돌던 가난한 청년이 있었다. 프랑스 증기선의 밑바닥에서 설거지를 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들의 껍질을 벗기며, 검게 그을린 냄비를 닦던 청년. 그의 이름은 응우옌 신 꿍, 훗날 전 세계가 호치민(Hồ Chí Minh, 1890~1969) 이라 부르게 될 사내였다. 남을 깨우치는 사람 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이름 그대로 한 민족 전체를 일깨워 프랑스 제국주의와 미국의 거대 군사력을 차례로 물리쳤다. 주방 보조의 거친 손이 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독립전쟁의 설계자가 된 과정은 단순한 성공신화 그 이상의 울림을 준다.   1946년의 호치민.(위키피디아) 변신의 귀재, 196개의 이름으로 쓴 독립의 역사 1890년 베트남 중북부 응에안성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세상의 불평등을 목격했다.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식민지배 아래의 지식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몸소 보여주었고, 소년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버티는 것 자체가 이미 투쟁임을 깨달았다. 1911년, 스물한 살의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배에 올랐다. 이후 30년 가까이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을 전전하며 각국의 언어와 사상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8개 국어(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그는 국제통역사로 안락하게 살 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인 독립운동을 택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변신의 연속이었다. 수배 중인 독립운동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사용한 가명만 무려 196개. 그 중 응우옌 아이 꾸옥 (사랑하는 조국 응우옌)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었다. 1940년대에 정착된 호치민 이라는 이름은 그가 지향했던 삶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깨우치고, 그 깨우침을 민족의 등불로 삼았다.   런던 헤이마켓에 있는 호치민 기념 명판.(위키피디아) 논리의 유도로 강대국을 찌르다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립, 1941년 베트남 독립동맹(월맹) 조직. 호치민은 치밀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전격적으로 움직였다. 그해 9월 2일, 하노이 광장에서 낭독된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문은 역사적 역설의 극치였다. 그는 선언문에 미국독립선언서와 프랑스인권선언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구절을 앞세워, 자신들을 억압하던 서구 열강의 논리로 그들을 정면 돌파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닌,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고도의 논리적 유도(柔道) 였다. 그러나 자유의 길은 험난했다.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 뒤이어 개입한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1964~1975).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었고, 이는 한반도의 비극과 닮아 있었다. 호치민은 비록 1969년, 통일을 불과 6년 앞두고 심장질환으로 눈을 감았지만, 그가 뿌린 자주독립의 씨앗은 1975년 사이공 함락과 함께 거대한 결실을 맺었다.   1921년의 호치민,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공산주의 대회에 참석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호 아저씨 의 고무신과 나무집, 도덕적 권위의 힘 베트남 국민들이 그를 지도자가 아닌 박호 (Bác Hồ, 호 아저씨)라 부르는 이유는 그의 검소함에 있다. 국가주석의 신분임에도 그는 평생 인민복에 폐타이어로 만든 고무신발을 신고 다녔다. 화려한 관저 대신 소박한 나무집에 살며 직접 텃밭을 일구었다. 그의 청렴함은 단순한 보여주기 쇼가 아니었다. 그는 개인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유언으로조차 자신을 우상화하지 말고 화장해 전국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비록 당에 의해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영묘에 안치되었지만, 권력과 부를 철저히 분리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유네스코가 1987년 그를 세계의 위대한 인물 로 지정한 것은 그가 거둔 군사적 승리 때문만이 아니다. 식민지의 작은 청년이 보여준 인간적 고결함과 민족을 향한 헌신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호치민이 1957년 동독 방문 당시 슈트랄준트 항구에서 동독 선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빛과 그림자, 혁명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 물론 호치민을 성인군자로만 묘사하는 것은 역사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이어진 토지개혁 과정에 지주로 몰린 수만 명의 인민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희생자 수는 적게는 5만에서 많게는 17만 명으로 추산된다. 호치민은 이후 과오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수행했으나, 억울하게 흘린 피는 되돌릴 수 없었다. 혁명의 이상이 현실의 광기와 결합할 때 발생하는 비극은 호치민조차 피하지 못한 시대의 상처였다. 위대함과 과오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호치민은 1911년부터 1928년까지 이탈리아 밀라노를 포함한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파수비오 거리 왼쪽에 있는 안티카 트라토리아 델라 페사 옆의 이 명판은 그가 일했던 곳 중 하나를 기념하는 것이다.(위키피디아) 지금 한국사회가 호치민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호치민의 서사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몇 가지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첫째, 분단과 통일의 경험이다. 베트남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거쳤지만 결국 통일을 이루었고, 1986년 도이머이(개혁·개방) 를 통해 경제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북핵 위기와 남북관계의 경색이 지속되는 우리에게, 베트남의 사례는 통일 이후 사회통합과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둘째, 민족자주와 실용외교다. 호치민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우방 사이에서도 결코 종속되지 않았다. 오직 베트남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그의 태도는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에 시사한 바가 크다. 동맹은 수단일 뿐, 목적은 자주여야 한다는 명제다. 셋째, 지도자의 도덕성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퇴임 후 비자금이나 사저 논란으로 법정에 서는 한국 지도자들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평생 인민복 한 벌로 살다 간 호치민의 청렴함은 매서운 죽비와 같다. 권력이 곧 치부의 수단이 된 사회에서 호 아저씨 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넷째,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주권자의 의지다. 12·3 계엄 사태 속에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였다. 호치민이 평생 투쟁했던 인민이 주인 되는 나라 의 가치는 촛불과 함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외세뿐만 아니라 내부의 독재적 발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힘은 결국 깨어있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다섯째, 이미지 정치를 넘어선 진정성이다. 선거철에만 전통시장을 찾아 국밥을 먹는 쇼 가 아니라, 평소의 삶 자체가 국민과 닮아 있는 지도자를 갈망하게 된다. 호치민이 사후 수십 년이 지나도 화폐 속의 인물이 아닌 국민의 가슴 속 아저씨 로 남은 비결은 평생에 걸친 언행일치에 있었다.   호치민이 1958년 2월 7일 인도 뉴델리에서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위키피디아) 우리 안의 호치민을 찾아서 호치민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베트남의 심장부 도시 이름으로, 인민의 화폐로, 그리고 국가의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살아 숨쉰다. 물론 그를 우상화하여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행태나 언론통제는 우리가 경계하며 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사 보조 청년이 일궈낸 기적 같은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권력은 화려해야 한다는 착각, 지도자는 인민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오만, 그리고 작은 나라는 거대 강대국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체념에 맞서라고 말이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누가 그런 사람인가? 그리고 지금 당신은 그런 사람을 알아볼 눈을 가지고 있는가? 호치민이 남긴 이 질문은 반세기를 넘어 오늘날 우리를 향해 여전히 묵직하게 날아온다.   호치민(왼쪽에서 세 번째 서 있는 사람)이 1945년 미국 전략사무국(OSS) 대원들과 기념 촬영에 응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 세력과 마찬가지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OSS의 도움을 얻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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