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 위험한 몽상가의 귀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이 외침을 내지른 사람,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실 자기 자식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맡긴 인물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외치면서 정작 본인의 자식 양육은 고아원에 아웃소싱한 셈이니, 요즘 말로 하면 워라밸을 설파하면서 직원에게 주 70시간 일시키는 대표님 과 묘하게 닮아있다. 그러나 위선이 있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가진 폭발력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틀린 삶을 살면서도 옳은 말을 했고, 그 말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 곳곳에서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다.
루소.(위키피디아)
제네바 시계공 아들이 세상을 뒤집다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마저 루소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가버렸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 그는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판화견습공, 하인, 음악교사, 악보 필사자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가 서른여덟 살이 되던 1750년,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디종(Dijon) 학술원이 논문공모를 냈다. 주제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인류의 도덕에 기여했는가? 루소는 나무 밑에서 이 공모문을 읽다가 이른바 계시 를 받았다고 훗날 고백했다. 그의 답은 당대 지식인들과 정반대였다.
아니요, 오히려 타락시켰습니다.
이 도발적인 답이 1등을 차지했고, 루소는 하루아침에 유럽 지식계의 문제아로 떠올랐다.
루소가 태어난 집은 제네바 그랑뤼 40번지에 있다.(위키피디아)
루소가 남긴 세 가지 폭탄
첫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착하다
루소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본래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인데, 문명과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사회제도가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1755년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불평등의 뿌리를 사유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 이라고 말한 첫 번째 인간이 문명사회의 진정한 건립자 라고. 요즘 말로 하면 부동산 투기꾼이 이 모든 불행의 원조 라는 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1762년에 펴낸 『사회계약론』은 더 직접적이었다. 루소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공익을 향한 의지가 주권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권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인민 전체에게 속한다고 못 박았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파리와 제네바에서 금서가 되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금서 처분을 받은 책이 훗날 혁명의 교과서가 된 것은 역사의 오래된 아이러니다.
셋째, 아이를 아이답게 키워라
같은 해 발표한 교육 소설 『에밀』에서 루소는 당시의 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8세기 유럽에서 아이는 그저 작은 어른 으로 취급받았다. 루소는 이에 맞서 어린 시절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고, 자연 속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교육을 역설했다. 지금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당시로서는 시험 점수와 암기로 아이를 기계처럼 굴리던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으면 통쾌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루소가 1735년부터 1736년까지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와렌과 함께 살았던 레 샤르메트는 현재 루소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위키피디아)
루소가 불러일으킨 폭풍들
루소 사후 11년이 지난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졌다. 혁명가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손에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돌진했다. 혁명의 사제(司祭)로 불리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1758~1794)는 스스로를 루소의 제자라 자처했다. 루소의 사상은 미국 독립선언(1776년)에도 영향을 미쳤고, 19세기 민주주의운동, 20세기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물론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은 훗날 전체주의의 논리로 왜곡되기도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도, 심지어 20세기의 독재자들도 인민의 의지 를 앞세워 개인을 짓밟았다. 좋은 사상도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흉기가 된다는 것을 루소의 유산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베네치아 칸나레조 968번지에 위치한 토마소 퀘리니 소유의 수리안 벨로토 궁전은 루소가 프랑스 대사 비서로 재직하던 시절 프랑스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위키피디아)
루소가 대한민국에 보내는 편지
자, 이제 서울로 오자. 루소가 만약 오늘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어떤 기사를 쓰고, 어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였을까?
첫째, 루소는 사유재산을 불평등의 뿌리로 보았다. 한국의 상위 10%가 전체 부동산 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소유하고, 상위 1%가 전체 자산의 약 20% 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 루소의 말은 18세기의 먼지를 털고 생생하게 살아 돌아온다. 수십억 짜리 아파트 옆에 고시원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 이것이 루소가 말한 문명의 타락이 아니면 무엇인가.
둘째, 루소가 『에밀』에서 그토록 비판한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3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더욱 화려하게 진화해 있다. 학원버스는 밤 열 시에도 달리고,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의 경험 대신 수능족보 를 파고든다. 루소가 환생한다면 강남 학원가를 보고 경악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다.
내가 상상한 인간 타락의 끝판왕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셋째, 루소의 일반의지 는 어느 특정 집단이나 권력자의 의지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공익을 위한 의지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민심 은 매일 서로 다른 진영이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국민은 한 광장으로 나오고, 또 다른 국민은 다른 광장으로 나가는 풍경. 루소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반의지는 다수결이 아니라 공익의 문제다. 광장의 크기를 세기 전에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를 먼저 물어라.
넷째, 루소는 지나친 도시화와 인공적인 삶의 방식을 경계했다.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한 도시에 몰려 사는 서울, 지방은 텅 비어가고, 공동체는 해체되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각자의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 루소가 꿈꾼 것은 이런 세계가 아니었다.
1766년, 아르메니아 파파카와 전통 의상을 입은 루소의 초상화, 알란 램지 작.(위키피디아)
위험한 몽상가의 유효기간
루소는 1778년, 파리 근교 에르므농빌(Ermenonville)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치열하게 싸웠고, 친구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도 결별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했다. 그의 삶 자체가 모순덩어리였지만, 그 모순 속에서 뿜어낸 사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지금 한국에서, 이 말은 여전히 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하다. 루소가 위험한 이유는 그가 꿈꾼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는 계속 위험할 것이다.
파리 팡테옹 지하묘지에 있는 루소의 무덤.(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