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는 740년 전 이 귀족의 국민대표 소집 으로 시작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프랑스 출신 영국 귀족 시몽 드 몽포트(Simon de Montfort, 1208?-1265)라는 인물을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 중세 귀족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회 라는 제도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사람이 귀족이었다니. 재벌 총수가 노동조합 설립을 도운 격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발견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그림 속 시몽 드 몽포트, 서기 1250년쯤.(위키피디아)
프랑스인이 영국 귀족이 된 사연
시몽은 1208년경 프랑스 몽포트 가문에서 태어났다. 1230년대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3세(Henry III, 1207~272)의 총애를 받으며 레스터 백작이 되었고, 왕의 누이 엘레노어(Eleanor, 1215~1275)와 결혼까지 한다.
오늘날로 치면 프랑스 출신이 영국 왕실 사위가 된 셈이다. 이쯤 되면 인생 역전! 을 외쳐야 할 판이다. 그런데 이 사람, 가만 앉아서 편안한 귀족 생활을 누리지 않았다.
1238년 몽포트와 결혼한 잉글랜드의 엘레노어는 14세기 초 잉글랜드 왕가의 계보에 묘사되어 있다.(위키피디아)
왕에게 칼을 겨눈 귀족의 배짱
1250년대 들어 헨리 3세의 무능한 통치와 막대한 세금 징수에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왕은 교황청과 손잡고 시칠리아 왕국까지 손에 넣으려다 국고를 탕진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해외 땅 투기에 국민 세금을 쏟아 부은 격이다.
1258년 시몽은 귀족들과 함께 왕을 압박해 옥스퍼드 조례 를 받아냈다. 귀족 15명으로 구성된 자문회의가 왕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헨리 3세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Pope Alexander IV, 1199?~1261)를 조르고 졸라 조례를 무효화시켰다.
참다 못한 시몽은 1263년 반란을 일으켰다. 처남인 왕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레스터의 헤이마켓 기념 시계탑에 있는 몽포트 동상.(위키피디아)
루이스 전투, 역사를 바꾼 하루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에서 시몽의 군대가 왕군을 격파했다. 헨리 3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1세, Edward I, 1239~1307)는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시몽이 보인 행보가 놀랍다.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지 않았다. 대신 1265년 1월, 전례 없는 일을 벌였다. 귀족뿐 아니라 각 주에서 기사 2명씩, 각 도시에서 시민대표 2명씩을 불러 모은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평민대표 가 참여한 의회였다. 이 시몽의 의회 (De Montfort s Parliament)가 바로 현대 의회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스트 서식스에 있는 1264년 루이스 전투( 현장.(위키피디아)
불과 1년, 그러나 역사는 바뀌었다
하지만 시몽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로였던 왕자 에드워드가 탈출해 군대를 재정비했다.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Battle of Evesham)에서 시몽은 참패하고 전사했다.
시몽의 정치 실험은 불과 1년 남짓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가 연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에드워드 1세는 즉위 후 1295년 모범의회 (Model Parliament)를 소집하면서 시몽의 방식을 따랐다. 평민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의회가 제도화된 것이다.
13세기에 제작된 양피지 그림으로, 1265년 우스터셔주 이브샴 전투 후 몽포트의 시신이 훼손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740여년 전 시몽 드 몽포트의 실험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권력은 견제 받아야 한다. 시몽이 왕에게 맞선 이유는 간단했다. 왕이 멋대로 세금을 걷고 멋대로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사법부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누가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지 뜨거운 논쟁이 있다. 시몽은 왕도 법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헌법 제1조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를 실천한 셈이다.
둘째, 대표성은 정당성의 원천이다. 시몽이 평민 대표를 불러 모은 것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백성들의 동의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함을 알았던 것이다. 여론조사만 보지 말고, 진짜 국민 대표를 모아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셋째, 개혁은 기득권과의 싸움이다. 시몽 자신이 최고 기득권층인 귀족이었다. 그런데도 왕권에 맞섰고, 평민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재벌 개혁, 사법 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그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기득권에 안주하는 경우가 많다. 시몽처럼 자기 계급을 배신할 배짱이 필요하다.
넷째, 실패해도 씨앗은 남는다. 시몽은 전쟁에서 졌고 비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가 심은 씨앗은 살아남았다. 30년 후 그의 방식이 제도화되었고,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다. 1960년 4·19가 이듬해 5·16으로 짓밟혔고 1980년 5월 광주가 피로 물들었지만, 그 씨앗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꽃피웠다.
미국 하원 의사당에 있는 시몽 드 몽포트 조각.(위키피디아)
역사는 영웅이 아닌 제도를 기억한다
영국인조차 시몽 드 몽포트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만든 제도는 살아있다. 영국 의회는 물론이고, 미국 의회, 한국 국회까지 그의 실험에 빚을 지고 있다.
시몽은 성인 군자가 아니었다. 야심가였고, 때로 잔인했다. 완벽한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소집한 의회에 여성은 없었고, 농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세금 쓰는 일에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간단한 원칙이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 한국, 우리는 어떤가. 세금은 내는데 정책 결정과정은 불투명하고, 대표자들은 대표하지 않는다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시몽이 21세기 한국에 온다면 이렇게 불호령을 내리지 않을까. 700년 전 내가 시작한 제도를 이렇게 발전시켜 놓고도, 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느냐?
우스터셔주 이브샴 수도원에 있는 드 몽포트의 무덤 자리에 1965년 세워진 기념비.(위키피디아)
700년 전 실험이 오늘을 만들었다
시몽 드 몽포트가 1265년 1월 소집한 의회에 참석한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귀족들 틈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이었다. 왕과 귀족만이 나라 일을 결정하던 시대에, 평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비록 작은 틈이었지만, 그 틈은 점점 넓어졌다.
오늘 한국, 우리는 그 틈을 넓힐 것인가, 다시 좁힐 것인가. 시몽 드 몽포트의 이야기는 700여년 전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시몽 드 몽포트의 문장.(위키피디아) 영국 레스터에 있는 드 몽포트 대학교는 축구선수 박지성이 졸업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