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과 이태원, 애도의 권리와 의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여 동안에 큰 죽음 에 대한 추모가 둘 있었다. 1948년 여순사건과 2022년 이태원 참사, 75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 개의 죽음은 무엇보다 많은 숫자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비극이며 재난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크기보다 그 죽음이 망자의 것만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닌 죽음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진정으로 애도되지 못했던 죽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죽음들이 비극과 재난이었다면 그것은 그 죽음 자체만큼이나 우리 사회, 이 나라가 이들 죽음을 어떻게 취급하고 어떻게 다뤘는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 죽음에 대해 한국 사회가 보인 모습은 한국은 과연 어떤 사회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살아왔는가를, 살고 있는가를, 아니 어떤 나라를 만들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한다. 그것이 두 개의 죽음 중의 하나, 이태원 참사 3주기를 하루 앞둔 오늘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밤에 이태원의 골목에서 일어났던 참사, 그러나 어쩌면 진짜 참사는 참사의 발생 그 순간이라기보다 그 후에 펼쳐진 3년간의 지옥같은 시간들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지금에도 그 참사를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맞이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25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이태원 참사 3주기 시민추모대회가 열리고 있다. 2025.10.25 연합뉴스
김민석 국무총리가 19일 전남 구례군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 열린 여수·순천 10·19사건 제77주기 합동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2025.10.19 연합뉴스
지난 19일 전남 구례에서는 여수·순천 10·19사건 합동추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선 다시는 이런 국가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나왔다. 여순사건 특별법에 따라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도 공표됐다. 구례 산동면의 비극을 추모한 노래 산동애가 를 창극으로 구현한 음악이 연주됐다고 하는데, 그 애절한 음악보다도 산골 마을의 한 면에서만 희생자 숫자가 1000여 명이라는 것이 국가폭력 의 규모와 참혹성을 얘기해 줬다.
평화 메시지를 낭독한 도올 김용옥은 여순반란을 여순민중항쟁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빛의 혁명을 소리치게 됐다 고 했다. 시대를 부여안고 고뇌하는 철학자는 이 사건을 항쟁 으로 명명했지만 이를 그 이름으로 부를지, 사태 라고 부를지, 혹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그것은 사건 발생 73년 만에야 마련된 특별법에 따라 앞으로 정해질 문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특별법 제정 이후 네 번째 정부 지원으로 치러진 이번의 행사에서 사람들이 봤던 것처럼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추모하는 것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여순 사건이 대한민국 최초의 계엄령으로 이어진 국가폭력의 시작이었다는 점이 지난해 계엄 사태와 겹치며 이 사건의 진실규명은 단지 과거를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뒤늦은 추모가 어떤 역사의 역사의 지연과 퇴행을 낳는지를 절감케 됨으로써 너무도 지연됐던 일의 시작이 갖는 의미를 새기게 된다.
그러나 그 70년 만의 추모와 애도의 시작조차 참으로 힘든 일이 되고 있다. 이 추모식 당일 제1야당 대표는 여순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한 다큐 영화 를 공개관람하고 윤석열 면회 소식을 당당히 공개했다. 이른바 ‘보수 논객’ 조갑제 씨와 정규재 씨는 이재명 대통령이 여순사건에 대해 페이스북에 적은 글을 놓고 대통령 참칭자가 몰래 쓴 글이 아닐까?”라는 식의 비판을 했다.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됐으며, 그러나 그 숫자보다 살아남은 이들과 유가족들은 오랜 세월동안 침묵을 강요받으며 슬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고 유가족을 위로한 이 대통령의 말은 대통령이 대통령이어야 할 이유의 하나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들에겐 그것이 대통령이 가져서는 안 될 불순한 생각으로 비치는 듯하다.
여순 14연대 좌익 반란사건을 왜곡,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항명이라고 미화하고 국군의 정당한 진압을 국가폭력이라고 매도한 글을 과연 진짜 대통령이 썼을까 라고 이들은 비난했다. 국가폭력이라는 말은 좌파들의 전유물”이라고, 국가는 당연히 폭력을 독점하며 경쟁하는 폭력을 제압하고 처벌한다”는 말에서는 정당한 폭력의 독점과 정당한 행사로서의 국가 에 대한 몰이해에다 국가의 존재 이유라 할 국민의 죽음에 대한 무례가 보인다. 그 자신이 말하듯이 과연 어떤 사고작용에서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말들이다. 이들의 발언을 상세히 전하는 조선일보는 여순사건 특별법에서 내린 사건의 정의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여순사건특별법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처럼 여순사건에 대한 특별한 법 은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 그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과 이유들을 밝히기 위한 우리 사회의 너무도 늦어졌지만 반드시 있어야 했던 당연한 결의, 그러나 그 당연한 과정이 너무도 쉽지 않았기에 특별한 결의가 필요했었던 수십년간의 피눈물과 땀의 결과다. 70여년 간 묻혀 있었던 죽음이며 갇혀 있었던 죽음이며, 제대로 불려지지 못했던, 죽어 있었던 죽음을 이제서야 부르려 하는 한국 사회의 뒤늦은 인간됨, 나라됨을 보여주려는 것의 첫 시작이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죽은 이들에 대해 누구를 애도하고 누구를 애도하지 않는지를 나누면서 사회와 국가는 일부 생명은 애도 가능한 삶 으로, 다른 생명은 애도 불가능한 삶 으로 구분한다고 설명한다. 자국민이나 공인된 영웅, 또는 미디어가 중요하게 다루는 대상의 죽음은 대대적인 보도와 추모를 받는다. 반면 애도 불가능한 삶은 전쟁의 희생자, 난민, 빈민 등 정치적, 경제적 약자들의 죽음으로, 이들의 상실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어 공적 영역에서 상실 로 인정받지 못한다. ‘애도 불가능한 삶’이란, 애초에 살 만한 삶 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을 때도 상실 로 계산되지 않는다고 했다.
부당하게 지워진 삶은 죽음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부인당한다. 이들은 자국 안에서의 난민 이며,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며, 죽었으나 죽지 않은 인간 이다.
19일 서울에서 열린 여순 사건 추모식에서 90을 넘긴 노인들이 손수 젯상을 차리고 명부 접수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77년의 한을 토해 내는 그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그조차 불가능했었기에, 죽은 가족의 이름을 꺼내는 것부터가 불순한 일로 금지 당했었기에 이들은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듯했다. 그것은 어느 진혼제보다도 비통한 축제일 것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국가의 의무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쫓아낸 이들, 밀어낸 이들, 추방해버린 죽음에 대해 이제 그 이름을 겨우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옛 현인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며 사이불망자수(死而不亡者壽)라고, 죽되 잊히지 않는 것, 그것이 오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얻는 사후의 영예에 대한 말이지만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풀어보자면 죽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진정한 사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그 죽음을 잊을 수 있어야 죽은 이들을 떠나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 떠나야 할 이들이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그 나라는 나라로서의 존재로 장수할 수가 있다. 나라로 지속될 수가 있으며 지속될 가치가 있다. 그것이 애도에 실패할 때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다.
국가의 제1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3년 전 이태원 골목에서 이유 없이 스러져간 159명의 죽음을 이 나라는 잊지 않고 있는가. 온전히 떠나보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물음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 물음은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 이름들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불려지기라도 했던가. 그러니 우리는 3년 전의 그날을, 또한 77년 전의 그날을 오늘에도 여전히 살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