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기본조차 모르는 대법원장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씨의 이혼 소송은 말 그대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언론이 ‘세기의 이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재벌 기업의 경영권이 위태로울 수 있는 막대한 규모의 재산 분할 소송이라 대법원의 판단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13일 국회 법사위 대법원 국정 감사장에서 눈을 감은 채 입을 꾹 닫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대법원의 심리는 대법관 12명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전합)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재명 공직선거법 사건을 대법원 소부에 배당했다가 곧바로 전합으로 돌린 이유를 천대엽 처장은 그렇게 설명했다. 반면, 최태원-노소영의 ‘재산 분할 소송’ 상고심은 전합이 아닌 소부에서 2심 판결을 뒤집는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이재명 소송처럼 나라의 명운이 바뀔 수 있는 소송은 아니어서 전합 아닌 소부에서 결정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장삼이사의 그렇고 그런 이혼 소송이 아니라 재벌 기업의 경영권이 바뀔 수도 있어 세간의 관심이 쏠린 소송인데, 원칙대로 전합에서 심리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혹시 재벌 총수에게 유리한 결정을 기대하고 그랬던 건 아닐까 의심한다면, 과대망상이고 지나친 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까마귀가 날아오른 것과 배나무에서 배가 떨어진 건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게 인간의 심리라는 말이다.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배나무 아래에선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다. 괜히 오해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거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날까라는 속담도 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것인데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지 말라는 거다. 속담에는 세상사, 인간사의 이치가 담겨 있다. 그래서 속담에는 과학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대법원 판사 12인 .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최태원-노소영 재산 분할 소송에서 대법원이 2심 판결을 뒤집는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걸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오비이락의 트집일 수 있다. 그런데, 2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이재명 공직선거법 재판의 상고심은 어떤가. 오비이락이고 이하부정관인가. 굴뚝에서 연기가 폴폴 나는데도 아궁이에 불 때지 않았다고 하는 오리발인가. 2심 판결은 재판부가 대법원 판례까지 참고하여 심사숙고했고 완벽에 가까운 판결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이 있던 날에 대선을 치렀어도 이재명 대통령은 넉넉히 당선되었을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주도했다는 ‘희대의 파기환송’은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인 이재명의 대선 출마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그랬던 게 아닌가. 재판의 외관은 그렇다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마침 사려던 제품이 포장을 뜯었다가 다시 포장한 흔적이 있다면, 그 제품을 사겠는가. 음료수를 사려다 보니 병마개를 돌린 흔적이 보이는데도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하며 그 음료수를 사겠는가.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하자가 있는 물건은 아닌지 두 번, 세 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신뢰할 수 없어 그 마트에는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이고 세상의 이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나 행태, 즉 외관이 실질을 지배할 때도 많다. 우연이라 해도 까마귀가 날아오를 때마다 배가 떨어진다면 까마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배나무 아래에서 선비가 갓끈을 고쳐 맬 때마다 배가 하나씩 없어진다면, 그 선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재판도 그렇다. 외관이 공정하지 않으면 재판의 결과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해괴한 계산법으로 내란 수괴 윤석열을 풀어줬던 지귀연 판사의 구속 취소 결정이 그러하고,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완공기일에 맞춰 날림 공사 하듯 초고속으로 진행된 ‘희대의 파기환송’ 또한 그러하다.
두 재판은 외관에서 신뢰를 잃었다. 윤석열을 풀어준 그 결정은 지귀연 판사의 독자적인 결정이었을까? 혹시 외부로부터 압박이나 회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실제로 이뤄진 건 아닐까? 눌러도 눌러도 그런 의심이 자꾸만 머리를 들고 나온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주도했다는 ‘이재명 선거법 사건 파기환송’도 그렇다. 외관은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았고 선거 개입의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과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증폭되고 있는데,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법권 독립’을 호신용 주술처럼 암송하며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고기 맛을 묻는 질문에 장금이는 홍시 맛이 난다고 했다. 왜 홍시 맛이 나느냐 물으니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이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장금이는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장금에게 ‘희대의 파기환송’에 대해 물으면 선거 개입의 맛이 난다고 답할 것이다. 판결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전제는 존중받을 만한 판결이어야 한다. 외관이 공정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는 판결을 하고서는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건 국민을 무시하는 억지이고 강요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추석을 앞두고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면접 여론조사를 보면 조희대 대법원장이 주도한 ‘파기환송 결정’에 대해 응답자의 47%는 사법부의 정치 개입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퇴해야 한다’고 답했다. 사퇴할 필요 없다 는 답변은 39%였다. SBS가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에 의뢰하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찬성 48%, 반대 35%였다. 원전 공론화 때처럼 시민들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숙의 과정을 거쳤다면 사퇴 여론은 압도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사진, mbc 화면 캡처
그럼에도 조희대 대법원장은 요지부동이다. 법원 안팎에서 결자해지 하라는 질타가 쏟아져도 오불관언, 고장 난 녹음기처럼 ‘사법부 독립’을 반복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그처럼 꿋꿋하게 버티는 건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수구 카르텔의 한 축인 족벌 언론이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니 그럴 것이다. 조선일보를 보면 그런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사설은 신문사의 얼굴이다. 중요한 현안과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신문사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고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 검색 시스템인 ‘빅 카인즈’에 접속해 대법원의 ‘파기환송’이 있었던 다음 날(5월 2일)부터 대선 선거일(6월 3일)까지 조선일보의 사설을 검색했더니 거의 매일 ‘파기환송’과 관련한 사설을 게재했는데, , , , , , , 등 한결같이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을 헐뜯거나 대법원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판사들을 비난하는 ‘조희대 감싸기’ 글이었다.
대선 기간에 ‘파기환송’과 관련하여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판하는 조선일보의 사설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조선일보의 칼날은 언제나 사법부 불신을 자초한 조희대 대법원장이 아닌 대선후보 이재명을 향해 있었고, 이재명의 대선 출마를 막지 못하여 속이 몹시 쓰렸는지 조선일보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혐오’를 줄기차게 쏟아냈다. 유권자들의 합리적 판단을 돕는 선거 보도가 아니라 심리전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선거 개입이었다.
조선일보의 ‘조희대 감싸기’는 대선 이후에도 계속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조선일보는 , , , 등의 사설을 통해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언론의 생명은 신뢰다. 신뢰를 잃은 언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거짓과 왜곡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언론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악이다. 법원은 더욱 그러하다.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조선일보 3월 11일자 지면
윤석열에게 조선일보는 감시견이 아니라 후견인이고 동업자였다. 기자로 밥 먹고 살아온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금 윤석열은 구치소에 있다. 대선후보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이 있던 시절의 조선일보 지면에서 이제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보인다. 언론의 신뢰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조선일보는 몇 년째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희대의 파기환송’은 이재명 후보의 대선 출마를 원천 봉쇄하려는 ‘정치 재판’이었다는 의심과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고, 구체적인 근거가 드러나면서 의심의 단계를 벗어나 사실의 단계로 증폭되고 있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앞장서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허물었다는 비판에도 조희대 대법원장은 아무 말이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했다는 비난이 쏟아져도 의연한 건지 비겁한 건지 ‘입꾹닫’으로 일관하고 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고 있는데도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았단다. 아궁이의 불이 번져 사법부라는 집을 태울 기세인데도 조희대 대법원장은 조선일보 같은 주류 언론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서 그런지 ‘사법부 독립’을 호신용 방패 삼아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러다 진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한 줌 재가 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