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라···맷돌,해바라기,참새를 태운 잠수함까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프로테스트 포크’의 전진기지를 꿈꾸던 내쉬빌이 문을 닫을 즈음인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문화 살롱에서는 ‘맷돌 공연’이 처음 열렸다. 근거지도 없고, 동인의 이름조차 없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음악적 성과를 공유하고 세상에 알리자는 공연이었다. 칠레에서 비올레타 파라의 가족이 1964년부터 시작한 ‘파라 가족의 페냐’, 모임이나 동아리를 뜻하는 스페인어와 비슷한 형태였다. 이 ‘페냐’는 머잖아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촉발했다.
깃발처럼 전면에 내건 ‘맷돌’이 시사하는 것처럼, 참가자들은 한국 포크 외에 민요 등 우리의 음악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리거나 모던 포크와 결합한 노래를 창작하려 했고, ‘맷돌 공연’을 통해 정기적으로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아타우알파 유판키나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가 1950년대 시도했던 것을 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맷돌 무대가 모던 포크, 국악 포크 말고도 전통 탈춤과 판소리까지 선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72년 9월 26일 맷돌 특별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 사진. 김민기를 포함해 4월과 5월, 송창식, 신창균, 서유석, 양희은 등이 출연했다.
양희은이 맷돌 특별공연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참가 가수들이 합창하는 것으로 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사운드네트워크
공연은 첫 회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7월 5일까지 매주 열렸다. 공연에는 이수만, 김민기, 양병집, 양희은, 박성원, 4월과 5월 등 포크 가수 외에도 국악인 이금희 등이 무대에 올랐다. 남북 7·4 공동성명 이튿날 열린 네 번째 공연에서는 곧 사기극으로 드러나게 될 남북 공동성명의 벅찬 감동을 무대에 담기 위해 관객 3백여 명과 출연자가 다 함께 부르는 ‘우리의 소원’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트 성격의 포크 무대가 ‘통일의 기대감’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축원의 무대가 됐다.
맷돌 공연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3개월 뒤 서울의 명동 시공관(국립극장)에서 9월 26일 특별 확대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에선 장현종, 임진수, 이탄 등 시인 6명에게 의뢰해 받은 가사에 송창식, 김민기, 백순진, 김광희 등이 작곡한 노래를 선보였다. 이백천의 사회로 열린 이 공연에는 김민기와 양희은은 물론 서유석, 송창식, 김도향, 4월과 5월 등 당시 청년문화를 이끌던 가수들이 무대에 대거 올랐다. 연예 주간지 은 ‘아름다운 시에 아름다운 노래를,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를 다 함께’라는 제목 아래 출연자의 대담을 싣기도 했다.
실황 음반 에는 민속 포크의 고전 ‘진주 낭군’, ‘타박네’가 수록돼 있고, 국악의 장단과 가락이 섞인 김민기의 ‘새벽길’, ‘서울로 가는 길’이 포함돼 있다. 1970년대 중후반 대학가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던 노래들이었다. 가야금 2대와 기타 2대로 반주한 ‘사월과 오월’의 ‘딩동댕’, 혹은 ‘딩동댕 지난 여름’은 실험적인 국악 포크를 대표하는 노래였다. 국악 포크의 길을 연 김도향의 ‘벽오동’과 ‘맷돌’도 선을 보였다.
당시 전통 국악인들은 실험적 국악 포크 ‘딩동댕’을 듣고는 대번에 역정을 냈다고 한다. 다시는 그런 노래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낙담한 ‘사월과 오월’을 위로하고 격려한 것은 김민기였다. 박제화되어 있던 국악을 우리 시대에 되살릴 계기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새로운 음악의 민족적 형식을 찾으려고 했던 그에게 ‘딩동댕’의 시도는 신선했다. 그의 평가처럼 ‘딩동댕’은 송창식이 개작해 부르면서 곧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랐다.
민요 되살리기 운동의 성과는 단연 서유석이 부른 ‘진주 낭군’(원제는 진주난봉가)와 ‘타박네’로 나타났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나라에 밥 딜런 등의 프로테스트 포크를 소개했던 그는 1970년대에 들어와 남미 누에바 칸시온의 출발점이었던 이 운동에 앞장섰다. 양병집이 채록한 민요를 그는 당대의 정서에 맞게 편곡해 세상에 알렸고, 이후 두 노래는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한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맷돌 공연에서 서유석이 부른 진주낭군과 타박네는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사진은 서유석이 MBC 방송에서 타박네를 부르는 모습. 유튜브영상 캡쳐
‘맷돌 공연’의 마침 곡은, 참가한 가수 전원과 관객이 함께 부른 ‘아침이슬’이었다. 공연의 기획자이기도 했던 김민기는 그만큼 한국 포크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불온한 면면이 빼곡한데도 ‘맷돌 공연’이 그렇게 열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공연에서 노래 ‘돌멩이’를 불렀던 신창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최고 실력자 가운데 한 명으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신직수의 아들이어서 아무도 공연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연 당시 ‘신창균=신직수 중정부장 아들’이라는 소문의 진위는 명확하지 않다. 대중음악 평론가 최규성은 그의 부친이 보사부 장관이었다고 했고, 김민기는 중정부장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1972년 당시 신직수는 법무부 장관이었고, 중정부장이 된 것은 1973년이었다. 신직수에겐 신창균이라는 큰아들이 있긴 했지만, 김민기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30대에 요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창균 덕분에 김민기가 ‘나는 새도 그 위세에 놀라 떨어진다’라고 하던 중정부장 관저에도 갔었다고 하니, 그의 말을 의심할 도리가 없었다. 맷돌 공연 당시 신창균의 부친은 법무부 장관이었으니, 김민기가 신창균의 집 중앙정보부장 관저에 간 것은 맷돌 공연이 종료된 뒤였을 것이다. 1970년대 보사부 장관 가운데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은 신현확뿐인데, 그가 장관에 오른 것은 1975년이었다. 그에게는 신창균이라는 아들이 없었다.
신창균은 서강대 출신으로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동안 방황했다. 신예 포크 가수들 사이에서 기타 연주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불온한’ 청년들과 어울렸다. 신창균은 특히 김민기를 따랐다고 하는데, 김민기는 마음을 줄 정도로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맷돌공연 현장사진. 서울신문에서 발행한 선데이서울에 실린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출처: 부산일보(김형찬 제공)
맷돌 공연의 공신은 공교롭게도 정부 기관지 이었다. 마지막 공연을 주관한 기관이 바로 이었다.
‘내쉬빌’은 저항적 ‘한국 포크’의 창작과 발표의 무대였다. 청개구리 홀의 역할을 유지하면서 좀 더 포크 본령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에 비해 ‘맷돌 공연’은 남미의 누에바 칸시온을 한국에서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트 포크를 지향했던 두 교두보는 그해 말 ‘유신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맷돌에 이어 등장한 것이 김의철의 ‘해바라기 홀’ 노래모임이었다.
1973년 가톨릭 여성회관에 자작곡 발표의 장을 마렪란 김의철.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베수비오는영원하다
김의철 역시 ‘청개구리’ 2세대였다. 청개구리 홀이 폐관하고, 내쉬빌과 맷돌 공연마저 중단된 데다, 민청학련 사건까지 덮쳐 실의에 빠진 김의철이 ‘청개구리의 부활’을 꿈꾸며 명동 가톨릭 여학생회관을 찾아간 것은 1973년 4월이었다. 청개구리 홀이 있던 서울YWCA 건너편이었다. 책임자인 콜레트 누아르 수녀님은 화끈했다. 김의철의 청을 듣고는 두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홀 하나를 내줬다.
얼마든지 쓰세요.”
김의철은 이곳에서 매주 토요일 ‘자작곡 발표회’와 함께 ‘함께 부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청개구리 홀처럼 관객 참여형 공간이었던 이곳에서 김의철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노래 ‘해바라기’를 불렀고, 그래서 공간의 명칭도 ‘해바라기 홀’이 되었다. 이곳은 곧 포크를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 서로의 작품을 나누고 발표하는 장이 되었다. 노래 ‘해바라기’는 당시 소련의 국화와 같은 이름이라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이 되었지만, 해바라기 홀은 토요 공연을 통해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 이주호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포크 가수들이 탄생하고 자란 요람이 됐다.
해바라기 1집앨범. 이정선 한영애 이주호 김영미가 초창기 멤버다.
사진 왼쪽부터 김영미 이정선 한영애 이주호. 사진출처: 부산일보(김형찬 제공)
김의철은 해바라기를 저항적인 자작곡 중심의 무대로 이끌었고, 김민기는 그런 김의철을 양병집, 정태춘 등과 함께 지원했다. 해바라기는 곧 대학가의 화제가 되었고, 그 불온한 기미를 알아차린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공연할 때마다 홀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김의철은 결국 이들의 압력에 밀려 1975년 이정선에게 무대를 넘겼다. 이정선은 해바라기 홀을 저항적 포크 및 통기타 무대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화려한 사운드를 실험하는 무대로 전환했지만 불과 1년 뒤 문을 닫아야 했다.
김의철은 해바라기 홀을 이끌면서 1974년 그룹 ‘해바라기’도 결성했지만, 해바라기 홀을 떠나면서 그룹 해바라기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룹 해바라기는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 등 4인조 그룹으로 재편됐고, 1980년대를 풍미하던 이주호, 유익종의 듀오 ‘해바라기’로 이어졌다.
해바라기 노래 운동이 끝나고 30년 뒤인 2006년 4월 30일, 바로 그 해바라기 홀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김의철은 첫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고교 2학년 때 만들었다는 ‘연인’이라는 곡에 이어 ‘해바라기’ ‘불행아’ ‘군중의 함성’ 등을 불렀다. 그리고 1973년 4월 아무 조건 없이 해바라기 홀을 선뜻 내준 누아르 수녀가 고마워 그 자리에서 썼다는 ‘감사합니다’라는 노래도 불렀다.
이 작은 음악회는 2003년 7월 결성된 음악 집단 ‘청개구리’가 기획한 것이었다. 음악 집단 ‘청개구리’는 1970년 개관한 ‘청개구리 홀’의 정신을 잇고자 김의철을 중심으로 조직된 음악인 모임이었다. 이들은 옛 청개구리 홀 자리에 들어선 건물의 1층에 ‘청개구리’라는 공간을 개관하고, 공연을 이어왔다.
‘해바라기’의 뒤를 이어 저항적 포크의 운동성을 강화하며 등장한 노래 집단이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다. 1975년 2월 동숭동 성베다교회에서 탄생한 이 동인은 순수하고 진실한 민족의 얼이 담긴 창작 노래로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고 경종을 울린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얼핏 듣기에는 계엄 포고령과 비슷하지만, 유신정권이 듣기에는 매우 불쾌한 내용이었다. 1집에 실린 동인 소개를 읽어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사진출처: 국민일보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독일 잠수함에서 수병으로 근무했다. 잠수함은 밀폐된 공간이다. 당시는 산소 측정 장비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토끼였다. 토끼는 산소가 부족하거나 압력이 커지면 귀에 돌출한 혈관이 사람보다 빨리 파열한다. 더 심해지면 죽음에 이른다. 어느 날 토끼가 죽었다. 호흡곤란 증세와 함께 혈관이 터졌다. 토끼를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선택된 것이 게오르규였다. 그는 토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살아 있는 ‘산소 측정기’ 노릇을 했다. 훗날 게오르규는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문인들의 사명은 잠수함의 토끼와 같다고 했다. ‘진정한 문인들은 현실이라는 세계가 지닌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비하여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줘야 한다.’ 당연히 진통이 따를 것이다.”
각자가 잠수함 속 참새가 되어, 우리 사회 위기의 징후를 고발하는 것을 ‘참새를 태운 잠수함’ 동인의 역할과 활동 목표로 삼은 것이다. ‘함장’ 구자룡은 동인이자 친동생인 구자형에게 한 말에서 그 취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잠수함은 한국 사회를 상징하고, 그 사회가 순수와 진실이라는 산소가 희박해지면 노래로써 정화하고 경종을 울리라는 뜻이다. 참새는 진실(眞)을 노래하는 힘없는 서민을 말한다.”
이 동인에는 음악다방 DJ 출신인 구자룡과 구자형 형제 이외에 한돌, 곽성삼, 강인원, 전인권, 명혜원, 남궁옥분, 유한그루, 이종만, 개그맨 이홍렬 등이 참여했다. 정태춘도 한동안 함께했다. DJ 최성원, 작곡가 최성호, 작사가 최종욱과 명혜원, 진행자 권영임, 유성찬이 승선하기도 했다.
‘잠수함’은 1975년 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창작곡으로만 첫 공연을 열었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7개월 뒤 열린 두 번째 공연에는 서유석, 윤연선, 하남석 등 유명 가수들도 참여했다. 두 차례의 공연에서 용기를 얻은 이들은 서울 동숭동의 성공회 성베다교회 김니니안 신부의 도움으로, 매주 토요일 ‘참새와 잠수함’ 무대를 마련했다. 공연은 인공조명을 쓰지 않고 촛불만 켜고 진행했다. ‘잠수함의 폐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다가, 유신체제의 ‘폭압과 폐쇄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으로 발전해 ‘잠수함’은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사실 촛불 조명만 쓰게 된 계기는 첫 공연 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가자들과 관객들은 촛불 조명의 분위기와 상징성에 매료돼 이후에도 일부러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흔들리는 촛불 불빛 속에서만 공연을 진행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 앨범 표지.
유신체제 아래서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이들을 받아준 것은 일부 성당과 교회뿐이었다. 특히 가톨릭 서울교구는 이런 정치적 난민들에게 관대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은 1년 뒤 동숭동 시대를 접고, 명동의 가톨릭 여학생회관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에 따라 가톨릭 여학생회관에서는 한동안 ‘해바라기’와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공연이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이때 사회자로 유명해진 인물이 바로 이홍렬이었고, 지금은 거물이 된 전인권, 강인원도 당시엔 명동 일원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던 가요계의 ‘핏덩이’였다.
1977년, 회비만으로 공연 개최가 가능해지자, 총무 구자형은 실력 있는 회원을 충원하기 위해 서울 시내 대학을 돌며 노래꾼을 모았다. 그때 합류한 이들이 서울대 노래 동아리 ‘메아리’의 박용범, 한동헌, 홍익대의 엄기명, 이화여대 방송반의 안혜경 등이었다. 한동헌은 1980년대 중후반 민중가요의 대중적 기지였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대표를 역임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명성과 함께 일부 동인들의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하나둘 제각기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남궁옥분을 시작으로 전인권, 강인원이 그룹 ‘따로 또 같이’를 결성해 독립했다. 1979년 2월 곽성삼이 중심이 되어 앨범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제작했지만, 곽성삼과 유한그루도 곧 독립했다. 이후 잠수함은 사실상 어둠 속의 항해를 중단했다. 이로써 청개구리 홀에서 발원한 한국 포크 운동의 명동 시대는 일단락됐다.
청년 가객들 사이에서 한국 포크 가운데 ‘프로테스트 포크’의 기운이 퍼져나갈 때 일찌감치 그 정점을 찍은 노래가 있었다. 1972년 초 연극 에서 김지하의 노랫말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그것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노래 운동, 민중가요의 뿌리가 된 노래였다. 하지만 그 무게가 너무 압도적이었던지, 그 뒤를 잇고 또 능가하는 ‘프로테스트 포크’는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