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시민성 자리 잡아야 민주주의 위기 극복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시민 교육이 다시 강조되는 배경에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는 유지되고 있으나, 그 내적 토대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놓여 있다. 정치적 양극화, 공론장의 붕괴, 혐오와 배제의 언어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단지 제도나 정치 엘리트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성 자체의 위기임을 보여준다. 최근 헌법 질서를 훼손한 비상계엄 사태 역시 민주주의가 법과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이를 떠받칠 시민적 성찰과 대응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시민 교육은 제도의 공백을 메우는 보완책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어떤 시민성 위에 서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핵심적 과제가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우리가 전제해 온 시민성의 성격 자체를 재검토하는 일이다.
1월 15일 서울 경희궁 내 나무들이 벌목된 경희궁지 생태 기후 환경숲 조성 사업 현장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서울시에 추가 벌목 중단을 촉구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6.1.15. 연합뉴스
근대적 시민성의 형성과 그 한계
근대적 시민성은 시민혁명과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등장했으며,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권리의 주체로서 법과 계약을 통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시민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신분 질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성취다. 오늘날 민주시민 교육 역시 헌법 교육, 선거 참여, 법 준수, 토론과 합의 등이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근대적 시민성은 오늘의 복합적 위기를 감당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인간만을 시민의 주체로 상정하는 인간 중심적 시민성은 자연을 정치의 외부에 두고 생태 문제를 부차화해 왔다. 기후 위기와 생태 붕괴는 인간 사회와 자연을 분리해 사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근대적 시민성은 여전히 이 분리를 전제로 작동한다.
둘째, 책임을 계약과 법적 의무에 한정함으로써 미래 세대, 비인간 존재, 국경 너머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시민성의 핵심에서 배제해 왔다. 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이러한 계약적 책임 개념이 구조적으로 무력함을 드러낸다.
셋째, 책임의 범위가 협소해지면서 민주주의는 단기적 이해관계와 선거 주기에 과도하게 종속되고,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넷째, 시민 참여를 제도적 행위에 국한함으로써 일상의 삶이 지닌 정치적·생태적 의미를 충분히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투표, 공청회, 시민 토론 등은 중요한 민주적 실천이지만, 시민의 삶 전체가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는 인식으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한 결과 민주주의는 특정한 시점과 공간에서만 작동하는 제도로 이해되고, 일상의 소비, 이동, 생활 방식이 갖는 정치적, 생태적 함의는 충분히 성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 전주교구사제단이 26일 전북도청 앞에서 새만금신공항 건설 중단 및 생태계복원 기원 미사 를 드리고 있다. 사제단은 매주 월요일 전북도청 앞에서 미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2026.1.26. 연합뉴스
생태적 시민성의 필요성과 윤리적 심층
이러한 한계 위에서 생태적 시민성은 새로운 시민성의 가능성으로 제기된다. 생태적 시민성은 환경 보호를 덧붙인 시민성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 하려는 시도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 비인간 존재, 미래와 이미 깊이 얽혀 있는 존재로 전제한다.
생태적 시민성에서 책임은 계약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 속에 이미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비계약적 책임성이다. 미래 세대나 비인간 존재와 계약을 맺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책임은 계산 가능성과 상호성의 논리를 넘어 지속적으로 요청된다. 이는 법과 제도가 존재함에도 위기가 지속되는 이유가 책임을 감당할 시민 주체의 형식이 여전히 근대적 개인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임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생태적 시민성은 책임을 규칙 준수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덕성의 차원을 포함한다. 여기서 덕성이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이 삶의 태도와 실천으로 드러나는 성향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와 윤리를 다시 연결하며, 소비·이동·에너지 사용 등 일상의 선택이 곧 정치적이고 생태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인식을 요청한다.
지난 1월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교육 부문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 행진에 참여한 교사, 학생, 지지자들 중 한 어린 시위자가 우리 학교를 존중해 주세요 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교육 노조가 주도한 이 시위는 일주일간의 파업에 이어 진행되었으며, 프랑스어권 정부가 발표한 교육 예산 삭감을 규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6.1.25. EPA 연합뉴스
민주시민 교육의 전환 - 생태 시민을 기르는 교육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시민 교육 역시 전환이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제도에 참여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며 자신의 삶이 타자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할 수 있는 시민을 형성하는 데 있어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를 단지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의 장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넘어,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시민을 요청한다.
이를 위해 민주시민 교육은 지식 전달과 규범 교육을 넘어 경험과 감각, 윤리적 숙고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기후 위기와 생태 문제는 교과서 속 정보로 학습될 때보다 삶의 현장에서 체감되고 성찰될 때 비로소 시민적 의미를 획득한다.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과 환경,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직접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책임이 계약이나 명령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시민을 즉각적인 정치 행위자로 만들기보다, 장기적으로 세계와 함께 살아갈 주체로 형성하는 데 초점을 둔다. 생태 시민을 기르는 민주시민 교육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보다 깊고 지속 가능한 토대로 확장하는 교육적 조건이 된다.
오늘의 민주주의 위기와 생태 위기는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시민이 될 것인가. 근대적 시민성의 성취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도 없다. 시민성은 이제 제도의 문제를 넘어 존재 방식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하며, 민주시민 교육은 바로 이 전환을 사유할 때 오늘의 위기에 응답하는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