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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폰트라, 청년 지성과 시대 고민 …새 문화운동 모색

폰트라, 청년 지성과 시대 고민 …새 문화운동 모색
[사람들]
김민기에게는 별명이 몇 개 있다. 청개구리 시절 양희은이 붙여준 것은 ‘석구’였고, 학전 시절 스스로 지은 자호가 ‘뒷것’이었다. 1970년대 말 노래패 후배들과 작업할 때 자청한 것은 ‘맹갈이’였다. 별명의 성격은 비슷했다. 나서지 않고 구석에 붙박이가 되어, 물정에 어둡고, 변화에 둔감하고, 제가 할 일만 하는 ‘맹’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민기는 세상이 그러건 말건, 가요계가 들썩이건 말건, 두억시니처럼 입 꾹 다물고 제 마음에 가는 것들에 천착했다. 당시 시인 김지하 등 문화운동가들이 고민하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압도적인 폭력에 꺾이지 않고 질기게 맞설 수 있는, 그리하여 폭력의 시스템을 밑에서부터 허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기존의 시나 소설, 연극이나 무용, 미술과 노래의 형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문화적 형식과 내용이 필요했다. 김민기는 김지하가 활동하던 폰트라와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이 주도하던 원주그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진은 1991년 겨레의 노래 공연후 자리를 함께한 세사람. 왼쪽부터 장일순, 김민기, 김지하. 사진출처:강원도민일보 이미 대학가에서는 탈춤, 굿, 판소리 등 전통적 민중 연희를 소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형식에 당대의 고민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나 ‘비어’가 나왔고, 1972년부터 새로운 형식의 극 혹은 굿이 잇따라 출현했다. 미술에서는 현장성이 강화된 사실주의 미술운동이 싹텄다. 당시 김지하는 1970년 6월 담시 ‘오적’ 필화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선고유예로 풀려난 후 강원도 원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반부패, 사회운동을 돕다가 경찰 수배를 피해 서울에서 잠행하고 있었다. 그는 당초 ‘오적’과 관련한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중형이 예상됐지만, 마침 그해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펜클럽(국제 문인 단체) 대회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말 많은 문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있는데, 그들의 눈앞에서 비판적인 시를 썼다는 이유로 중형을 때렸다가는 박정희 정권의 체면은 구겨져 버린 휴지장 꼴이 되기가 십상이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실린 김지하의 담시 오적 . 김지하는 구속되고, 사상계는 폐간되는 등 필화사건을 겪었다.  김지하는 출소하자 장일순 선생의 요청에 따라 원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원주교구청 기획위원으로 지학순 주교를 보좌하면서 1971년 10월 5일부터 3일간 원주는 물론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반부패 규탄 궐기대회를 기획했다. 그는 규탄대회가 정점에 올랐을 때 몰래 원주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잠입해, 문화운동 패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김지하와 함께 이런 고민을 하던 이들은 대부분 서울대 미대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었고 따라서 김민기는 그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실천적 문화운동의 전설적인 선배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1971년 겨울, 앨범 가 발매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김민기는 미대 선배 오윤의 손에 이끌려 한 모임에 갔다. 오윤은 미대 회화과 3년 선배로 당시 한국적 리얼리즘을 구현하기 위한 고민과 실천에서 이미 전설이 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소설 ‘갯마을’ 작가 오영수였고, 그의 누나 역시 서울대 미대에선 보기 드문 열혈 투사였다. 김민기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1969년) 오윤은 임세택, 오경환 등 동기생들과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했다. 오윤이 죽는 날까지 밀고 나간 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한국미술의 민중적 형식을 창조했다. 오윤과 함께 간 곳(김지하의 기억으로는 영화배우 신성일의 동생으로 역시 미대 회화과에 재학 중이던 강명희의 집이었다)에는 당대의 문제적 인물 김지하를 비롯해 강명희, 임세택, 안인학 등이 있었다. 김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폰트라’(‘쓰레기 위에 시를’의 영어 표현인 poem on trash의 첫 음절을 딴 약자)였다. 새로운 민족문화 운동을 도모하던 전위적인 모임이었다.  1987년 출간된 김지하 담시 모음집 표지. 그림은 오윤의 작품이다. ‘폰트라’에는 이들 외에도 미학자 김윤수, 문학평론가 염무웅, 시인 이성부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구 근대주의를 어떻게 한국적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극복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또 문화운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의 고민은 민중 주체의 민족적 형식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의 문제로 모아졌다. 물론 학술 단체는 아니었다. 놀며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김민기는 그동안 막연히 연민하고 안타까워했던 사회적 약자를, 그곳에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중’으로 만나게 된다. ‘민중’은 이후 70년대 김민기의 삶과 고민과 실천을 집약하는 열쇠 말이 되었고, 민중적 형식은 그가 예술적 실천에서 고민하고 추구하고 실천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민기에게 ‘민중’은 정치적 주체이기보다는 시대의 모순을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에 가까웠다. 김민기는 2006년 4월 에스비에스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김지하의 영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게, (김지하 형의 글을 통해) 한국말이 살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을 보거나 읽다 보면 혀가 따라가더군요. 그걸 알고서야 말이란 게 ‘(정형의)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로구나’ 깨달았죠. 너무 놀라웠습니다.” 1970년대 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은 김민기를 김지하의 친동생이거나 아니면 동생쯤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만큼 둘은 함께 붙어 다녔고, 서로를 존중했고, 일을 함께했으며, 차례로 탄압받았다. 당시 김지하는 문화예술의 ‘민중 주체성’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를 1970년 일약 대한민국 문화예술 지성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한 담시 ‘오적’은 이에 대한 고민의 문학적 성과물이었다. 그해 5월 에 게재된 담시 ‘오적’은 잡지가 발간되자마자 판매 금지 및 회수 조처가 떨어졌다. 이에 맞서 신민당은 6월, 당 기관지에 이 시를 전문 게재하면서 1970년대 최대의 필화 사건으로 발전했다. ‘오적’의 내용과 구조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치부를 서사시 형태로 신랄하면서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김지하는 이런 내용을 판소리처럼 서사와 운율이 일체가 되는 형식으로 담아냈다. 그가 말하는, 이른바 시의 민족적 형식을 창출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가의 정치, 사회, 문화운동의 열쇠 말은 ‘민족’이었다. 김지하 역시 시대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수렴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7개 대학 2천여 명이 모여서 치른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에 집약돼 있다. ‘민족적 민주주의’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일제의 관동군 출신으로서 친일 출세주의자라는 약점을 호도하기 위한 구호였다. 김지하는 조사에서 그 위선과 허구성을 낱낱이 밝혔고, 박정희 정권과 함께 민족적 민주주의를 종식해야 할 이유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요컨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란 사대주의, 매판주의, 봉건주의이며, 따라서 박정희 정권을 장례 지내 반(反)외세, 반(反)매판, 반(反)봉건에 기반한 진정한 민족자주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랬던 김지하의 문제의식은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강조점이 민족에서 ‘민중’으로 옮겼다. 민중 문학론의 효시로 여겨지는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1970년)와 민족학교 강의 초록인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70년)에는 이런 그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두 에세이에서 그가 제시한 민족문화 운동의 과제는 민중적 형식의 창조였으며, 그것을 ‘민중 미학’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주그룹을 이끌었던 지학순 주교(사진외쪽)와 무위당 장일순. 사진출처:  무위당사람들  이런 전환에는 그가 참여했던 ‘원주그룹’의 영향이 컸다.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신부와 당대의 실천적 사상가였던 무위당 장일순이 이끌던 원주그룹은 당시 ‘민중과 함께, 민중 속으로’라는 기치 아래 영성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을 모색하고 또 실천했다. 김지하는 장일순의 권고로 원주그룹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대학과 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났다. ‘새 시대 기획’이 학생 중심의 ‘대학’ 내에 머무른다면 선언적 차원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시선을 ‘학원’에서 ‘민중의 현장’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음은 논문 에서 박상은이 전하는 김지하가 주장한 ‘민중적 형식’에 대한 설명이다. 는 김지하가 선배 시인 김수영의 모더니즘과 소시민주의를 비판하며 그 대안을 찾고자 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현실의 가장 날카로운 요청의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도구로 민요와 민예를 재해석하고, 비애와 암흑의 정서에서 벗어나 민중적 예술 형식의 풍자와 해학 정신에 근거한 ‘저항적 풍자’의 가치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소리, 민요, 탈춤 등 (전통적인) 민중적 형식은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 간의 ‘현실적 구체적 모순’ 속에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이제 그 표현만 남고 ‘그들 생활의 적합성’은 사라졌으므로 ‘지금-여기’의 시인으로서 이 민중적인 것들을 전유하여 ‘새로운 효력을 지닌 형식’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지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김지하를 ‘두목’으로 삼고 자신을 ‘한목’으로 자처한 문리대 연극반의 임진택은 이런 김지하의 주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문리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지금까지 판소리꾼으로 살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니던 임진택은  연국반에서 김지하를 만나 민중예술 운동으로 나아갔다.  임진택은  연국 금관의 예수에 김민기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사진은  김지하의 오적을  판소리로 만들어 발매한 김지하 창작 판소리 1집앨범. 나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 계기는 시인 김지하 선배와 만남이다. 김 시인은 문학 연극 미술 영화 민속 등 어느 종목에건 통달하지 않은 데가 없었고, 나의 몫은 그의 민중 연극관을 마당극으로 창출해 내는 일과 그의 정치적 담시를 판소리로 수행해 내는 일이었다. 나는 사석에서 사람 웃기는 솜씨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지만, 그것이 풍자와 해학이라는 민중 예술적 기능으로 전화할 수 있었던 데는 순전히 김 시인의 발견과 독려에 힘입은 바 컸다.” 임진택은 김민기와 고교 동기동창으로, 김민기와 한평생 문화예술계에서 따로, 또 같이 일해온 지기였다. 1972년 김지하가 주도한 연극 전국 가톨릭 교구 순회공연에 김민기를 ‘포섭한’ 것도 임진택이었다. 임진택은 숫기 없는 김민기를 연극반이나 가면극연구회 활동에도 끌어들여, 1970년대를 이들과 엉켜 지내게 했다. 임진택은 자신에 대한 영향을 넘어 김지하가 김민기, 채희완, 오윤 등 ‘문화운동 1세대’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이렇게 전했다. 김지하는 ‘민중론’을 중심으로 활성화하는 민주화운동의 담론을 대학의 문화패와 접속한 장본인이었다. 문화운동 1세대가 당대의 민중 지향적 상상과 조우하고 이를 공공의 목적으로 삼게 된 것은 김지하를 통해서이다. 각기 전공 혹은 서클 활동을 통해 음악, 춤, 연극, 미술 등에서 깊은 예술적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김지하와의 만남 속에서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지향을 공유했다. 각자 시기와 만남에서 편차가 있었으나 김민기, 김석만, 채희완, 임진택, 이애주, 김영동, 오윤 등 문화운동 1세대로 불린 인물들은 197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1972), (1973), (1974) 등 김지하가 중심적으로 개입하여 창작한 작품의 공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다. …문화운동 1세대는 김지하를 매개로 반정권, 반독재의 사회 비판적 사유를 강화해 나가던 당대 사회의 민주화 요구와 만나게 되며, 이를 통해 1세대의 유미주의는 ‘민중’을 위한 ‘예술’, ‘전통’ 찾기라는 토대를 세우는 방향으로 전환한다.”(임진택의 평론집 머리말 중. 1990년) ‘폰트라’로 돌아가자. 다음은 김지하가 자신의 회고록 에서 폰트라의 출범 과정, 성격 그리고 김민기와의 만남을 술회한 대목이다. 다소 길지만 관련 대목을 그대로 전재한다. 그 무렵 내가 자주 어울린 선배와 친구들은 김윤수(金潤洙) 형님과 염무웅(廉武雄) 형, 그리고 시인 이성부(李盛夫) 형과 오숙희(吳淑姬) 선배, 또 오 선배의 그림 그리는 후배나 친구들이었다. 예술이나 민족 통일, 특히 서구 근대주의와 우리의 처지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서로 통하고 함께 술을 마시며 민족문화 운동에 관해 의견을 나누곤 했다. 함께 오(吳) 선배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는 일도 한두 번 있기는 있었으나 대체로는 낮과 저녁에 만나고 밤에는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나이가 든 것이다. 내가 종암동에 살 때다. 문리대 선배요, 당시 공화당의 엄민영(嚴敏永) 씨가 운영하던 ‘정경연구’(政經硏究)의 편집장으로 있던 안인학(安仁鶴) 형님이 가끔 우리와 함께 어울릴 때가 있었는데 형님이 워낙 기발한 분이어서 우리 패거리 이름을 단박에 지어냈다. ‘폰트라’. 영어로 ‘PONTRA’로서(poem on trash, 쓰레기 위에 시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의 줄임말이라고 널름 받아 젖혔다. 멋진 이름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견이었다. 이 그룹은 아무런 체제도, 약관도, 구속도 없었지만 분명한 방향(方向)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훗날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 운동 이었다. ‘폰트라’는 오윤이 중심이 된 미술에서의 ‘현실동인(現實同人)’의 탄생을 유도하고 지원했으며 김민기(金敏基)의 노래를 듣고 그가 새로운 차원으로 성큼 나아가는 데에 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문학(文學)과 연극에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대화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고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우 신성일(申星一) 씨의 동생이기도 한 미대 회화과 강명희(姜明姬)의 집에서 오윤과 임세택(林世澤) 그리고 안인학 형님과 내가 둘러앉아 듣는 가운데, 그 무렵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갓 들어온 김민기(金敏基)의 노래를 듣던 기억이 새롭다(그때 김민기는 이미 대학 생활 3년째였다). 세 곡을 내리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길’ ‘혼혈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찢어지고 해진 청바지에 잠바를 걸치고 기타를 치며 심상치 않은 우울 속에서 저 밑바닥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깊고 애잔한 저음으로 미군 부대 근처에 버려진 혼혈아의 슬픔을 지극한 데까지 들어 올려 노래 부르는 ‘혼혈아’, 그리고 ‘길’에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갈래 길의 혼돈이 가져오는 아린 상처를 건드리는 듯 고통에 가득 찬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그러나 노래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절제된 통곡이었고 거센 압박 속에서 여러 가지 색채로 배어나고 우러나는 깊디깊은 우울의 인광(燐光)이었다. 인학 형의 한마디, ‘사람 자체가 폰트라로군!’ 민기를 끌어들인 오윤 왈, ‘한국의 밥 딜런이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이야! 삿갓 이후 지하 이후의 계승자로군….’ 참으로 민기는 음유시인이었다. 우리가 헤어진 뒤 여름 한 날, 나는 서울대 의대(醫大) 함춘원(含春園)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그때 마침 가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민기의 독특한 우울투성이 저음을 듣고 귀를 바짝 기울였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자기 나름의, 신세대 나름의 입을 꽉 다문 대담한 출사표(出師表)였다. 그리고 ‘아침이슬’은, 곧 일어나기 시작하는 새 노래 운동의 시작이었다. 언뜻 생각이 미치는 것은 저것이 필경 금지곡이 되리라는 거였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여지없는 ‘불온’이었다. 좌우간 그 노래를 들으면서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황톳길’이 나오고 ‘서울 길’이 나오고 또 이제 저처럼 강렬하고 아름답고 애틋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아침이슬’까지 나왔다. 과연 우리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가야 할 것인가. ‘폰트라’의 한 불문율(不文律)로서 과제(課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내는 것이었다. 그 방향 진단의 한 형태가 미술에서는 바로 ‘현실동인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김지하의 오윤 편) 기왕에 ‘현실동인 제1 선언’까지 나왔으니 오윤에 대한 소개도 필요하겠다. 다음은 미술평론가 유홍준이 2016년 에 기고한(2월 21일치) ‘민중미술의 전설 오윤을 다시 만나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거기에다 오윤에겐 전통 민중 연희라는 예술세계가 뼛속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오윤은 겉보기엔 이지적이지만 속에는 딴따라의 심성이 그득하여, 기타도 잘 치고 춤도 잘 추었다. 그래서 채희완, 이애주, 김민기, 임진택 등 수많은 후배 연희 패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판소리 완창을 녹음하기 위해 남도로 내려갔다. 특히 동래 학춤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그의 외가 쪽으로는 동래 학춤의 전승자도 있었다. 춤꾼 채희완은 오윤 그림 속 춤사위는 여지없는 경상도 굿거리의 덧보기춤이라고 했다. 거기에다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 같은 현장성과 현재성을 부여했다. 오윤의 ‘춘무인추무의(春無仁秋無義,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게 없다)’, ‘칼노래’ 같은 춤 시리즈는 그가 전통 민중 연희라는 오염되지 않은 우물 속에서 오랫동안 길어 올린 정화수였다.” 오윤은 폰트라 모임에 김민기를 소개했다. 김민기가 노래를 부르자 안인학은  ‘사람 자체가 폰트라로군!’ 이라고 했고, 오윤은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어 김지하는  ‘음유시인’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사진 왼쪽은 오윤의 생전모습, 오른쪽 사진은 박노해 시집, 표지(목판화).        오윤은 늘 자신의 예술적 고뇌를 이렇게 고백했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운동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나는 말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오랜 침묵이 있었기에 민중미술이 태동할 때 누구보다 일찍 민중적 형식을 제시할 수 있었다.” 오윤은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였던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 등 4명의 작가와 김지하, 김윤수 2명의 평론가와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고, 김지하가 기초한 ‘현실동인 제1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적 리얼리즘 운동을 제창한 것이다. 당시 전시회도 함께 할 계획이었지만, 개막일 하루 전 정권의 개입으로 전시회는 무산됐다. 이들은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서 ‘민족미술론’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단순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에 토대를 두면서도 사실의 극복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단지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변형이나 과장 같은 능동적 표현을 통해서 더 높은 진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실 동인’의 이런 정신은 미술 집단 〈현실과 발언〉으로 이어졌다. 오윤을 비롯해 강요배, 김건희(윤석열의 부인 김건희가 아니다),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박불똥, 박재동,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 등 젊은 작가 40여 명이 1979년 11월 19일 창립을 선언한 미술운동 집단이다. 은 1980~199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이끄는 깃발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동인이 고민했던 것은 창립부터 모임을 이끌던 오윤이 1960년대부터 고민해온 ‘미술의 언어 기능 회복’이라는 화두였다.   오윤의 무호도 오윤은 전두환 정권이 6월 항쟁으로 허리가 꺾이고 난 뒤인 1987년 7월 요절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세상을 뜨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시대의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 채 캔버스에 그 꿈만 담았다. 그는 김지하의 시집 과 이원수의 전래 동화집 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비롯하여 민주화운동 및 투쟁을 지원한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을 제작했다. 그가 자신에게 붙인 별명은 소설 의 등장인물 개도치. 개와 도야지처럼 우직하고 미련하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폰트라는 물론 청개구리 홀에서 활동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서울대 미대 출신이나 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이 눈에 띈다. 지금은 사회의식 진공 상태의 공간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1960년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서울대 미대에는 하늘을 푸르게 하고, 사회를 맑게 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고, 형제애를 회복하고, 모두를 아름답게 하려던 이들의 양산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온갖 영웅들이 시대의 환부에 칼질, 아니 붓질하던 곳이었다. 그 속에서 선배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이웃과 약자에 대한 김민기의 막연한 연민은 역사와 현실의 토대 위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오윤만큼이나 말 없는 ‘벙어리’였던 그는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저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대의 모순과 고통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섰다. 충돌 아니 ‘피격’은 피할 수 없었다. 상징적 사건이 1972년 4월 터진다. 앨범 와 그의 노래가 시장에서, 방송에서, 무대에서 일제히 사라졌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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