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가축보다 못한 하등동물 이었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65년 5월, 여섯 살의 나는 열 살 형과 함께 남대문 근처에서 놀고 있었어요. 왜 거기 있었는지, 왜 놀고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아요. 갑자기 어른들이 우리를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이유도 몰랐고 설명도 없었습니다. 부랑아 취급을 받았던 것이죠.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그 이름이 지닌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철문 소리, 긴 복도, 아찔한 냄새가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아이들이 훌쩍였고, 낮에는 이유 없는 매질이 이어졌어요. 어른들 곁엔 늘 몽둥이가 놓여 있었죠. 말을 듣지 않으면 맞아야 한다는 엄포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립아동보호소에서 (학교를 보내주진 않았지만) 취학연령대인 형은 윗동에 머물렀고 더 어린 그는 아랫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달려와 형이 맞고 있다고 했다. 울면서 형에게 달려갔을 때, 형은 머리를 감싸고 피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쩌면 응급조치만 했어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형은 그날 선배들에게 맞아 그렇게 세상을 하직했다. 1967년 2월 17일이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아동수용자카드에 기록된 장인성 씨 기록. 형 장인덕의 사망에 대한 세부사항은 당시 시설에서 모두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 ‘송장차’라고 불리는 흰색 지프차가 왔습니다. 형의 시신을 실은 차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어른들이 둘러섰고 나는 형을 불렀습니다. 차가 움직였고, 나는 울면서 형을 부르며 뛰었습니다. 자꾸 넘어지면서도 일어나 형을 목이 쉬도록 불렀어요. 차는 멀어졌고, 먼지가 일었습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 먼지 속으로 형이 사라졌습니다. 훗날, 형의 기록을 찾으려고 시립아동보호소를 찾아갔지만, 형에 대한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죽음과 함께 기록마저도 소멸된 것이죠.” 장인성 씨가 기억하는 형과 시립아동보호소, 1960년대 중반의 모습이다.
형 사망 한 달 후 장인성씨는 오류애육원(오류마을)으로 전원조치되었다. 1967년 3월 18일이었다. 그곳에서도 늘 배가 고팠다. 배고픔은 소리가 났다. ‘꼬르륵’, 몸 안에서 비명이 터지는 소리였다. 고아원에서의 하루는 늘 그 소리로 시작했고, 그 소리를 참는 것으로 끝났다. 밥이었지만 배를 채우는 음식은 아니었고, 국이었지만 건더기는 없었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듯 먹고 나면 더 허기가 졌다. 배고픔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마치 뱃속에 작은 짐승 하나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밤에 몰래 식당엘 들어가 어둠 속에서 간장을 훔쳐 먹었어요. 물을 부어 희석시켜,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짠맛이 목을 긁고 내려가면 잠시나마 허기는 피할 수 있었어요. 고아원에는 개가 몇 마리 있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더 호강하는 존재들이었죠. 가끔 그 개들에게 음식물을 갖다 주는 심부름을 하기도 했는데, 개 우리로 가는 길에 양동이를 내려놓고 손을 넣어서 아직 씹을 수 있는 것, 삼킬 수 있는 것을 집어 먹었어요. 개들이 보기 전에, 어른들이 보기 전에, 급하게 입에 넣었습니다. 수치심보다 배고픔이 먼저였습니다. 사람이 개밥을 먼저 훔쳐 먹고, 그 다음 개에게 양동이를 밀어주는 풍경이 너무 희한하기만 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등동물이었으며, 그곳의 진리였다. 오류애육원에서의 하루는 자신들의 시간이 아니었다. 평일엔 고아원의 각종 공사에 투입되었고, 주말이나 방학 시즌에는 용인 소재 고아원 소유 농장으로 끌려가 중노동에 시달리곤 했다. 노동체험이라는 이름으로 소 40 ~ 50마리 분뇨를 치워야 했고 손과 발은 늘 똥물에 잠겨 있었다. 숨을 쉬면 축사 냄새가 폐까지 스며들었다. 사람의 밥보다 먼저 만들어야 하는 소여물이 훨씬 더 중요했고, 아이들의 허리는 늘 굽어 있었다. 원생들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쓰임새 있는 노동력이었다.
불이 꺼지면 하루가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취침시간은 쉼이 아니라 호출이었다. 낮은 목소리, 공포스러운 웃음끼, 따라오라는 손가락질, 불러내는 방식만 다를 뿐 결말은 늘 같았다. 폭력은 일상이었다.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 움직임이 느렸다는 이유, 숨소리가 거슬렸다는 이유, 선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맞을수록 아픈 감각은 곧 사라지지만, 맞을 걸 안다는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몸은 언제나 멍으로 기록했다. 성폭행은 더 깊은 침묵 속에 있었다. 밤에 불려간 아이가 어떤 얼굴로 돌아오는지, 그곳에서는 그것이 ‘문화’처럼 굳어 있었다. 거부는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1970년대 초반 장인성 씨가 머물던 오류애육원의 모습.
그 시간 속에서 기억나는 가장 또렷한 얼굴이 있다. 그를 집중적으로 괴롭히던 선배, 정모 씨. 예닐곱 살 더 많은 나이, 힘의 차이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는 때리는 쪽이었으며,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발소리만 들려도 몸이 먼저 굳었다. 도망치기로 결심한 건 용기가 아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였다. 거리로 나가면 자유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유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탈출은 죄가 되고, 죄에는 형벌이 따랐다. 그래도 또 도망쳤다. 남아 있으면 형처럼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학년이던 해, 마지막으로 담을 넘었다. 잡히지 않았고,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이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더 정확한 단어였다.
오류역에서 무작정 기차를 탔어요. 석탄 실은 화물열차를 몰래 타고 전라도 어디쯤에서 내렸는데, 어떤 목사를 만났어요. 그날 하루, 나는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밥상이 차려졌고, ‘더 먹어라’는 말을 들었는데,그 말이 그렇게 낯설었습니다. 배가 찢어질 것 같아도 멈추지 않고 먹었습니다. 언제 또 굶을지 모르니까. 그 목사님은 어느 농부 집 양아들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형태만 아들이었죠. 새벽이면 일어났고, 해가 져도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들어 가듯 목이 마른 날이었어요. 마루에 놓인 소화제 상자를 보고선 주스처럼 마셨습니다. 쓴맛이 올라왔고 그 다음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이었죠. 흰 천장, 소독약 냄새. 살았다는 안심보다 먼저 떠오른 건 공포였습니다. 또 중노동이 시작될 거라는 예감 때문에 다시 도망쳐 기차를 탔고 도착한 곳이 서울역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그는 앵벌이 집단에게 붙잡혔다. 어쨌든 숙식은 해결되니 그들과 함께 일을 했다. 얼굴엔 연탄가루를 잔뜩 바르고 옷은 찢어진 누더기를 걸친 채, 바닥에 널브러져 구걸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 10원, 비닐우산을 100원에 팔았다. 그곳에선 20여명의 앵벌이가 함께 일을 했다. 맞지 않으려면 일단 많이 벌어야 했다. 그들이 제공해 준 식사는 곰팡이 핀 빵이나 버려진 음식이었다. 잠은 인근 판자집에서 해결했다. 서울역 인근 가정집에서 훔쳐 입거나 버려진 옷을 주워 입기도 했다.
어느 날, 신문을 팔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가와 음식을 사줬습니다. 경계심보다 배고픔이 앞섰죠. 그렇게 북아현동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열다섯 즈음이었어요. 그곳에서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아현시장 부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리에서 하루를 벌었습니다. 숙식은 근처 달동네, 맨 꼭대기 집이었죠. 숨이 차오를 만큼 올라가야 했지만, 올라가면 밥과 따뜻한 잠자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덜 맞았어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곳은 천국이었어요. 함께 사는 사람에게 맞지 않는 밤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다방 앞에서 구두를 닦던 어느 날, 발밑에 지갑 하나가 떨어져 있었는데, 수표와 현금이 가득했어요. 지갑을 들고 형들에게 갔더니, 그들은 내 손에 5천 원을 쥐어줬습니다. 1970년대 중반이니 그 가치가 상당했죠. 시장에서 이것저것 배불리 사 먹었어요.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이 그날따라 무척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더군요. 내가 주운 지갑을 들고, 두 형제가 도망쳤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종점도 목적지도 없었다. 문이 열렸을 때 보인 건 광화문이었다. 그곳에 구두 닦는 부스를 찾아갔다. 솔질, 약 바르기, 천으로 문지르기.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구두 잘 닦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구두가 상자째 차에서 내려진 어느 날 청와대 직원의 신발을 뭉텅이로 닦기도 했다. 한번은 ‘한국에서 구두를 제일 잘 닦는 사람’이라며 NHK 방송에서 찍어가기도 했다. 어느 날, 율산그룹 빌딩의 고위층이 불러 그곳에서 전속처럼 일하기 시작했다. 돈이 모여들었다. 정말로 쓸어 담는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하루 벌이의 절반은 부스 대장에게 상납했고, 절반은 그의 몫이었다. 주머니가 묵직해졌다. 동전 소리, 지폐의 감촉. 돈이 있다는 건 맞지 않고 굶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계산을 했다. 오늘 얼마를 벌었는지, 내일은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오류애육원(오류마을)에 기록된 장인성 씨 관련 수용자카드.
삼청교육대가 시작될 무렵, 광화문 인근은 이유 없는 불심검문이 일상이었고, 나도 그 검문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호적이 없었어요. 신분증도, 주민등록도 당연히 없었죠. 이름을 증명할 종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간첩 아니냐’고 말했는데, 질문이 아니라 마치 판결처럼 느껴졌어요. 차에 태워 남산 안기부 지하벙커로 끌려갔어요. 간첩이라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죠. 물고문, 전기고문의 고통이 한계를 넘자 저는 혀를 깨물었지만,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문은 계속됐어요. 다음날이 되어서야 고아원출신이라는 단서들이 나왔나 봅니다. 고문은 사라졌지만, 사과는 없었어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풀려났습니다. 국가가 나를 보호한 적은 없었지만, 국가가 나를 의심하는 일은 너무 쉬웠습니다.”
그날 이후 장인성씨는 서류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살리고, 없으면 부서질 수도 있다는 걸. 당시 함께 건축 막노동을 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양재동을 주소지로 하는 신분을 등록했다. 스무 살 장인성 씨가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정식’ 국민이 되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후 병무청에서 신검통지서가 날아왔고, 직업군인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초등학교 중퇴라는 학력 때문에 그마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친구에게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때까지의 삶은 늘 혼자였고, 알고 보니 아내도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 왔더군요. 기대어 살 가족이 생긴 것이죠. 결혼은 같이 살자는 결정에 가까웠죠. 서로가 ‘홀로’ 감내하는 세상을 마무리하자는 합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떠나지 않을 사람 하나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습니다. 삶은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둘이 되자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 겁니다. 아내는 묵묵히 곁에 있었고, 저는 지금도 아내 곁에 있습니다. 책임감이라는 감각은 처음이었죠. 그 감각이 저를 조금씩 성장시킨 것 같습니다.”
장인성 씨가 수용돼 있던 시절의 고아원은 보호의 공간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서로를 해치고, 어른들은 보지 않았거나 보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다. 밤은 늘 길었고, 아침은 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시작됐다. 고아원을 탈출한 후 중노동을 거쳐 신문팔이에서 구두닦이로, 거리에서 달동네로 이어지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기억 속에 살고 있다. 고아원에서 배운 건 공부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맞지 않는 법, 울지 않는 법, 들키지 않는 법, 그리고 끝내 도망치는 법. 최근 들어 그는 당시 형이 죽어가는 모습이 부쩍 떠오른다. 지금도 약을 먹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일종의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20대 시절 1980년대 장인성 씨 모습.
어린 시절 가족들이 남대문 시장 한켠에 식당을 운영했던 기억이 있다. 가마솥이 있었고 주방 옆 작은 방에서 엄마, 이모,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성인이 된 후 찾아갔지만, 가족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그를 심하게 괴롭히며 고아원 탈출의 동기가 된 정모 씨의 소재지를 확인하고 실제로 그를 죽이려 흉기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내가 그랬나? 기억이 없다.”라는 말이 전부였다.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호통을 치며 돌아서야 했다.
일흔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장인성 씨는, 몇 년 전부터 후배들이 고아원에서 자행된 국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진화위 3기 출범이 예정된 지금, 그 싸움은 과거부터 이어지고 있는 현재형이다. 피해생존자들은 너무 오래 침묵했고, 국가는 너무 오래 외면했다. 다시는 이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게 장인성 씨가 국가에 바라는 것이다. 늦은 피해보상의 의미보다 돈으로는 지워지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의 레일 위에 지금도 그들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