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별은 졌지만 그림자는 길다, 마오쩌둥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죽어서 지폐를 남겼다. 오늘날 중국 위안화 지폐 어디에나 그의 얼굴이 박혀 있으니, 이 얼마나 기묘한 불멸인가. 자본주의를 그토록 저주하던 사람이 자본주의의 핵심 도구인 화폐의 얼굴이 되었다는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역사는 꽤 맛있는 아이러니를 선물한다.
마오쩌둥 1950년 11월 10일.(위키피디아)
농촌소년, 천하를 호령하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샹탄(湘潭) 근처 작은 마을 사오산(韶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오이창(毛貽昌, 1870~1920)은 꽤 잘나가는 농민이었고, 어머니 원치메이(文七妹, 1867~1919)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훗날 그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 이라고 외쳤을 때,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알 수 없다.
청년 마오는 책을 미치도록 좋아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밥도 잊고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21세기 독서실 폐인의 원조쯤 된다 하겠다. 그는 창사(長沙)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지만, 교단보다 혁명에 더 매력을 느꼈다. 1921년, 그의 나이 28세에 중국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에 참석한 인원은 고작 13명. 지금 기준으로라면 그냥 소규모 독서모임이었다.
마오쩌둥의 아버지 마오이창(毛貽昌, 1870~1920, 위키피디아)
대장정, 혹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보여행
1934~1935년의 대장정은 마오의 신화를 완성한 사건이다. 국민당 군의 포위를 피해 중국공산당 군대가 약 1만 2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한 이 대탈출극은,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서울에서 출발해 지구 4분의 1 바퀴를 걷는 것과 맞먹는다. 10만 명으로 시작해서 약 8천 명만 살아남았다. 오늘날 기업 팀빌딩 행사로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코스다.
그러나 이 처절한 여정은 마오쩌둥을 당내 최고지도자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 곧 신화가 되는 법이다.
마오쩌둥의 어머니 원치메이(文七妹, 1867~1919, 위키피디아)
1949년, 천안문 위에 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는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중국인민은 이제 일어섰다 (中國人民站起來了)고 선언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56세. 반세기 가까이 싸워온 끝에 얻어낸 권력이었다.
이 순간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913년의 마오쩌둥(위키피디아)
대약진운동(1958~1962), 참사를 부른 낙관주의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자! 마오가 외쳤을 때, 온 나라가 손뼉을 마주쳤다. 공장도 없는 농촌 마을마다 뒷마당에 용광로를 세웠다. 농기구, 냄비, 문고리까지 녹였다. 쌀 생산량도 허위보고가 판을 쳤다. 우리 마을은 작년의 열 배를 생산했습니다! 상부에 보고하면 하부는 칭찬받고, 현실에선 굶어 죽는 사람이 쏟아졌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중국에서 최소 1500만에서 최대 5500만 명이 아사하거나 정책 실패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한다. 인류 역사상 단일 정책 실패로 인한 가장 큰 인명 피해 중 하나다. 뒷마당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쇠는 너무 불순물이 많아 쓸모가 없었고, 농사는 방치되었으며, 중앙은 현실을 알지 못했다. 혹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다.(위키피디아)
문화대혁명(1966~1976), 혁명이 혁명을 잡아먹다
1966년, 권력 내부에서 밀려나던 마오는 화려한 반격을 선택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낡은 문화, 낡은 사상, 낡은 관습, 낡은 습관을 타도하라! 10대 청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교사가 두들겨 맞고, 지식인이 농촌으로 추방되고, 오래된 절과 문화재가 불탔다.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 마오의 오랜 동지이자 국가주석은 자본주의의 앞잡이 로 몰려 감옥에서 죽었다.
혁명이 혁명을 잡아먹는 전형적인 장면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가 중국판으로 재연된 셈인데, 규모는 훨씬 컸다. 약 10년간 이어진 이 광란 속에서 최소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국의 교육과 문화는 한 세대 이상 황폐해졌다.
마오는 1976년 9월 9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뒤, 문화대혁명을 이끈 이른바 사인방,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 1914~1991)까지 전격 체포됐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토록 신속하다.
1927년 3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 마오는 둘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있다.(위키피디아)
마오쩌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마오를 공이 7, 과가 3 (功七過三)이라 평가한다.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내린 이 판정은, 솔직히 말해 매우 정치적인 산수다. 수천만 명이 굶어 죽고 한 세대의 지식이 불탄 것을 두고 30점짜리 실수 라고 할 수 있는지, 피해자의 가족들이라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다. 마오는 봉건질서와 외세침략으로 짓밟혀온 중국을 통일하고 주권을 되찾았다. 문맹률을 극적으로 낮췄고, 여성의 법적 지위를 크게 높였다. 마오가 없었다면 신중국도 없다 는 말은 선전이지만,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위대함과 잔혹함이 한 몸에 깃든 인물, 역사는 그런 인물들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화화도, 단순한 악마화도 아니다. 냉정하고 입체적인 눈이다.
대장정 기간의 저우언라이(왼쪽부터)와 마오쩌둥, 주더.(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마오쩌둥, 불편하지만 유익한 거울
자, 이쯤에서 한반도로 고개를 돌려보자. 마오쩌둥의 삶은 오늘의 한국에도 꽤 쓸모 있는 교훈을 남긴다.
첫째, 숫자의 정치 를 조심하라. 대약진 운동의 핵심 비극은 현장의 거짓 보고와 중앙의 눈 감기가 결합된 것이었다. 아래는 위가 듣고 싶은 말만 올리고, 위는 믿고 싶은 숫자만 믿는 구조, 이것이 수천만 명을 굶겼다. 한국의 각종 통계분식, 성과 부풀리기,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경제수치 발표 관행을 보면, 규모는 다를지언정 그 구조는 섬뜩하리만치 닮아 있다.
둘째, 청년을 도구로 쓰지 마라. 마오는 문화대혁명 때 10대 청소년들을 홍위병으로 조직해 기성질서를 파괴하는 데 이용했다. 열정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들은 혁명 의 이름으로 스승을 폭행하고 이웃을 고발했다. 그리고 운동이 끝나자 마오는 그들을 오지 농촌으로 보내버렸다. 농촌에서 배우라 는 명목으로. 한국 정치지형에서도 청년을 진정한 주체로 대하지 않고 표몰이 수단으로만 소비하는 행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셋째, 일인 권력 집중의 끝을 보라. 마오의 말년은 1인 권력 집중이 어떻게 나라 전체를 사유화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변에 아첨꾼만 남고, 직언하는 자는 숙청당하고, 현실 판단력은 흐려진다. 이것은 공산당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권력자가 비판을 억누르고 측근만으로 에워싸이기 시작하면, 그 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넷째, 역사 청산 없는 미래는 없다. 마오 사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들을 상당부분 복권했지만, 마오 자체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는 여전히 금기다. 그 결과 중국사회는 이 거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달려가고 있다. 한국 역시 친일청산,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의 인권유린에 대한 청산이 반쪽 짜리로 남아 있다.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드시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1937년 옌안의 장궈타오(왼쪽)와 마오쩌둥.(위키피디아)
그의 초상화는 아직 걸려 있다
천안문 광장에는 지금도 마오쩌둥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바로 그 광장에서 1989년 민주화운동을 요구하던 학생들이 탱크에 짓밟혔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때로 잔인하게 입체적이다.
마오쩌둥은 영웅인가, 악당인가? 이 질문에 단칼의 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역사를 싸구려로 만드는 일이다. 그는 둘 다였고, 그 이상이었으며, 그 이하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복잡함을 직시하는 용기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복잡함을 기꺼이 들여다볼 때, 역사는 비로소 단순한 교과서 암기과목이 아니라 살아있는 거울이 된다. 오늘의 한국을 비추는 거울로서.
1940년대 마오쩌둥과 아내 장칭, 딸 리나.(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