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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시설 폭력과 후유증 선명한데…국가는 왜 사과 안하나

시설 폭력과 후유증 선명한데…국가는 왜 사과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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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시작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1988년 12월,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그 이전부터 모친은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남겨진 것은 해남군 마산면 애호리의 허름한 집과, 흩어지는 가족 세 남매였다. 가난한 친척들은 세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한 달 후, 여동생은 외가로 보내졌고, 네 살 아래 남동생과 1977년생 초등학교 4학년의 문호현은 해남읍의 아동보호시설 등대원에 맡겨졌다. 보호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곳은 보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견디기 힘든 건 사람이었다. 밤이 되면 선배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누군가는 끌려 나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맞는 일이었다. 주먹과 발이 함께 날아왔다. 관리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대나무 뿌리, 몽둥이.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훈육이 아닌 폭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맞는 이유가 생겼다. 선배들이 먹을 것과 현금을 등대원 근처 인근 슈퍼에 가서 훔쳐오라는 도둑질을 시켰어요.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맞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물건을 집어 들고, 라면과 계산대 아래에 놓인 돈 몇 장을 훔쳤어요. 결국 들키고 말았습니다. 슈퍼 주인의 손에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어요. 촉법소년이었기에 오래 잡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조사 몇 번, 훈계 몇 마디. 그리고 다시 등대원으로 돌려보내졌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관리자에게 몽둥이로 죽지 않을 만큼 맞은 것 같아요. 도둑질 시킨 선배도 성공 못하고 들켰다고 때렸죠.”   AI 로 생성한 1970 ~ 80년대 고아원과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모습.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아 추웠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두 형제는 조용히 문을 나섰다. 신발 끄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발끝으로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시 끌려갈 것 같아서였다. 등대원 담장을 넘어서는 순간, 그들은 처음 스스로의 발로 서 있었다. 갈 곳은 없었지만 남아 있을 이유는 더 없었다. 그 겨울, 두 아이는 보호시설이 아니라 탈출해야 할 장소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1989년 3월 27일. 달력 위에 찍힌 날짜는 평범했지만, 그날은 다시 잡히는 날이었다. 등대원을 탈출한 뒤, 두 형제는 해남읍을 떠돌았다. 갈 곳은 없었고, 배고픔은 여전했다. 낮에는 사람들 틈에 섞여 다녔고, 밤이 되면 몸을 웅크릴 자리를 찾았다. 자유는 있었지만, 그것은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자유는 끝났다. 해남군청 사회복지과 공무원에게 단속되었다. 보호”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다. 그날, 그들은 해남읍의 또 다른 시설 희망원으로 보내졌다. 희망원은 이름과 달랐다. 희망이 아니라, 차단된 공간이었다. 외부 출입은 철저히 금지됐다. 문은 닫혀 있었고, 창문은 밖을 보여주기보다 안을 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구조는 단순했다. 1층은 여자 숙소, 2층은 남자 숙소. 그 안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성인 부랑인들을 위한 시설이었기에 아이들은 셋뿐이었다. 그 중에는 ‘정신질환자’로 분류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말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장면이 반복됐다. 왜 여기 있어야 하냐고, 왜 나갈 수 없냐고, 누군가 항의를 했어요. 그러면 몇 사람이 달려들어, 팔을 붙잡고, 몸을 누르고 그리고 주사를 놓아요. 약물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눈빛이 흐려지고, 말이 느려져요. 며칠이 지나면, 만들어진 ‘정신질환자’가 되는 겁니다.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따로 끌려갔습니다. 희망원 안에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창문도 제대로 없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감금합니다. 생활은 단조로웠고, 고통은 반복됐습니다. 아침이 되면 일부는 밖으로 끌려 나갔어요. 희망원 근처 농장에서 강제노역을 합니다. 밭을 갈고, 풀을 뽑고, 짐을 나르고. 손바닥이 터지고, 허리가 굽어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감독하는 눈이 있었고, 멈추면 맞아요.”   현재는 노숙인 재활시설로 운영중인 동명원의 모습. 일에 동원되지 않는 사람들은 실내에 남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벽을 보고, 허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지조차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아이였지만, 학생은 아니었다. 배워야 할 나이에, 버텨야 하는 법만 배웠다. 글자가 아니라 눈치를 읽었고, 수학이 아니라 매질의 타이밍을 익혔다. 희망원과 동명원은 서로 연결된 곳이었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세계였다. 6개월이 지나던 1989년 9월 26일. 어린 문호현은 동생과 함께 다시 옮겨졌다. 희망원에서의 시간은 살아간 기록이라기보다 버텨낸 흔적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사람은 관리되었고, 말을 잃었고, 천천히 지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 장소로 옮겨졌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산57번지. 산자락에 붙어 있는 그 시설의 이름은 동명원이었다. 가까운 도시는 목포였지만, 그곳과의 거리는 단순한 거리 이상이었다. 길은 이어져 있었지만, 삶은 단절돼 있었다. 희망원에서 옮겨온 뒤, 풍경은 바뀌었지만 삶은 더 혹독해졌다. 동명원에는 80여 명의 원생이 있었다. 그중 학교에 가는 아이는 고작 6~7명뿐이었다. 복길국민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은 따로 있었다. 관리자들이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아이들. 말을 잘 듣고, 도망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들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선택지가 없었다. 강제노역이 전부였다. 처음 몇 달은 농장이었다. 동명원 주변의 산과 밭은 아이들의 손으로 만들어 졌다. 삽을 들고, 돌을 걷어내고, 나무를 베고, 흙을 골라 개간된 땅에 아이들은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계절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은 늘 있었다.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수확했다. 그 모든 과정이 아이들의 몫이었다. 점호시간에는 창틀이 더럽다며 걸레 빤 물을 마시라고 한 적도 있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쯤, 20명이 선발됐습니다. 동명원에서 약 3km 떨어진 공장으로 보내졌어요. 원장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나일론 쌀포대 제조공장이었습니다. 그곳에 마련된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요. 12시간 맞교대로 낮과 밤이 바뀌어도, 일을 멈출 수 없었어요. 쉬는 날도 없었습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가끔, 공장은 비워지는 날이 있는데, 관공서에서 감사가 오는 날, 외부에서 위문 공연이 잡힌 날은 아이들이 다시 동명원으로 돌아갔어요.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서였죠. 줄을 맞춰 이동했습니다. 군가를 부르며, 군대식으로 행진해요. 점호 시간에 눈에 거슬리는 아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맞았는데, 한 아이가 죽고 말았어요. 시신은 인근 야산에 묻혔습니다. 원장의 두 아들은 각각 부원장과 공장 사장이었는데, 그들은 유도 선수 출신이었어요. 말을 안 들으면 업어치기로 아이들을 땅에 메다 꽂아버립니다. 동명원도 공장도 그런 곳이었어요.”   최근 동명원 희망원 피해자 문호현씨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피해사실을 기록하여 보낸 친필편지의 일부. 공장에는 외부취업자도 있었다. 폭력을 휘두를 때도 다른 이의 시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교육을 시킨다며 추운겨울에 공장 옆에 있는 바다에 밀어 넣은 적도 있었다.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 공장에서 빠져나와 길을 따라 달렸다. 숨이 끊어질 듯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파출소가 보였다. 그곳에 들어가면 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 출신이었던 동명원의 원장과 지역경찰은 이미 유착관계였다. 도망친 문호현은 다시 넘겨졌다. 돌아온 뒤, 그날의 매질은 길었다. 동명원에서 정신교육도 이어졌다. 몸이 아니라, 존재를 부수는 방식이었다. 그저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 동명원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었다. 그곳은 노동과 폭력, 침묵으로 유지되는 구조였다. 시설생활의 하루는 배고픔으로 시작해서, 배고픔으로 끝났다. 밥이라고 불린 것은 꿀꿀이 죽이었다. 사람이 먹기 위한 음식이라기보다 그저 배를 채우는 흉내에 가까운 것이었다. 쌀밥은 기억 속에 없었다. 대신 기억에 남은 건 냄새였다. 한 번은 라면이 나왔다. 유통기한이 지나 몇 년이 묵은 것이었다. 그 시큼하고 비린 냄새는 지금까지도 코에 남아 있다. 반찬은 늘 같았다. 오이장아치. 그마저도 깨끗하지 않았고, 구더기가 함께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버리지 않았다.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사람을 바꿨다. 아이들은 바퀴벌레를 잡아먹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곧 익숙해졌다. 종이를 씹는 이들도 있었다. 책장을 뜯어 입에 넣었다. 활자는 더 이상 지식이 아니라 허기를 견디는 도구가 되었다.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기계는 계속 돌아갔고, 아이들은 그 곁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전사고가 났다. 몸이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인 곳은 목포 적십자병원이었다. 몸은 부서진 것처럼 아팠고, 귀에서는 이상한 울림이 계속됐다. 하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귀는 점점 멀어졌다. 소리는 흐릿해졌고, 세상은 점점 멀어졌다.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청각을 잃었다. 그 시작은 그날의 사고였다. 도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죠. 세 번째 시도할 땐, 혼자가 아니라 공장 동료 세 명과 함께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했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길이 아니라 짐승이 다니는 흔적을 따라 움직였던 것 같아요. 들킬까 봐 숨소리도 낮췄습니다.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습니다. 열두 살에 들어와 네 해를 시설에서 보냈습니다. 시간은 흐른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 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요. 밖으로 나온 뒤, 친척을 만나 세차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몇 달 뒤, 이모부와 외할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동생의 얼굴은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몸은 말라 있었고, 눈은 깊이 꺼져 있는 만성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그때서야 알았어요.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었다는 걸.” 시설을 나온 뒤의 삶은 곧바로 자유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종류의 생존이었다. 세차장에서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손으로 하루를 버텼다. 이후에는 목욕탕 때밀이, 구두닦이, 분식집 배달 등 손이 닿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몸은 늘 고단했지만, 적어도 이유 없이 맞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과거는 끝나지 않았다. 동명원에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1993년, 그는 한 통의 탄원서를 썼다. 수신인은 당시 대통령, 김영삼. 동명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폭력, 강제노역, 죽음, 그리고 사라진 아이들. 그 편지는 단순한 호소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남기는 기록이었다. 얼마 후, 그 이야기는 KBS 뉴스 방송을 탔다. 카메라가 비추자 그동안 닫혀 있던 문이 조금은 열린 듯 보였다.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처벌은 있었지만 가벼웠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문호현 씨가 알고 있던 일들에 비하면 너무 가벼운 결론이었다. 살인. 사체 유기. 미성년자 약취와 강제 수용. 그 모든 것의 무게가 법정에서는 줄어 있었다. 동명원은 단순한 시설이 아니었다. 그곳은 외부와 연결돼 있었다. 특히 목포역 주변. ‘역전꼰대’라고 불리던 아동 인신매매범이 있었다. 기차역 주변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 잠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잠깐 데려다주겠다고 한곳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들은 동명원으로 넘겨졌다. 부모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서류는 바뀌었고, 그들은 고아나 부랑아가 되었다.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삶은 지워졌다. 그 구조는 단순한 개인의 범죄사실이 아니었다. 시설, 지역, 일부 권력.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었고, 깊은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세상에 꺼냈지만 세상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아니, 듣고도 작게 처리했다. 그래서 기록은 남는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지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가 쓴 탄원서처럼, 지금도 남아 있는 기억처럼.   지난 2월 26일 진화위 출범과 함께 피해사실을 접수하고 있는 고아수용시설 피해자들. 당시의 운영자들은 모두 그곳을 떠난 상태며, 현재의 동명원은 2013년 노숙인 재활시설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문호현 씨의 삶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다. 시설에서 나온 뒤에도 삶은 쉽게 제자리를 찾아주지 않았다. 그는 여러 일을 전전했다. 버텨냈지만, 과거는 몸에 남아 있었다. 폭력은 끝났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길이 어긋났다.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고, 사기를 당하며 삶은 다시 무너졌다. 손으로 유지하던 일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20여년을 중식요리사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몸이 버텨주지 않았다. 시설에서 겪은 폭력, 그 후유증이 시간이 지나 더 선명해졌다. 그는 현재, 장애인이며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 우울증 약도 복용중이다. 그렇게 흘러가던 삶에 다시 과거가 찾아온 건 2025년 3월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기가 진행되던 때였다. 진화위에서 연락이 왔어요. 박영선 씨라고 동명원에서 함께 탈출했던 분을 통해서 였죠. 참고인 조사를 받았습니다.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야 했습니다.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덮어두고 있었던 것들이었죠. 그 과정은 진술이라기보다 다시 살아내는 일 같았어요. 이후 피해자로 인정받아 배상과 보상 절차에 들어갔고, 재판은 진행 중입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에게 손편지를 썼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되짚고, 사실을 나열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고통을 담았습니다. 그 편지는 호소이면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국가는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가. 왜 이 일은 여전히 과거로만 남아 있는가. 왜 피해자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가. 그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문호현 씨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통과해온 수많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묻고 있다.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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