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 펜으로 특권이 된 정통주의를 베다 [칼럼] 볼테르(Voltaire, 본명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1694~1778) 하면 사람들은 흔히 프랑스 계몽사상가 라는 교과서의 한 줄 소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한 줄로는 이 인물의 진면목을 도저히 담을 수 없다. 볼테르는 시인이자 극작가, 역사가, 무엇보다 당대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향해 끝없이 비웃음을 던진 풍자가였다. 한마디로 그는 트위터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 혼자서 여론을 들었다 놨다한 일인 미디어였다. 파리의 평범한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 콜레주 루이르그랑에 입학해 7년간 공부했다는 그의 출발점만 보면 누구도 이 청년이 훗날 유럽 전체를 들었다 놨다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볼테르 초상화, 1720년대경.(위키피디아)
바스티유 감옥에서 시작된 경력
볼테르의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권력자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시 한 편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에 두 차례나 다녀왔고, 이후 영국으로 망명까지 떠나야 했다. 1726년부터 1728년까지 이어진 영국 체류는 그가 입헌정부, 종교적 다원주의, 과학적 실증주의를 동경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영국에서 그는 의회정치와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분위기를 직접 목격했고, 이를 바탕으로 쓴 『철학서한』은 고국에서 금서로 지정돼 군중들 앞에서 불태워지는 영예를 누렸다. 권력이 어떤 책을 가장 무서워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 책이 불태워지는 자리를 보면 된다는 사실을 볼테르는 일찌감치 증명한 셈이다.
귀국 후에도 그는 가만 있지 않았다. 과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연인 에밀리 뒤 샤틀레와 함께 시골 저택 시레에 머물며 뉴턴의 이론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과학실험에 몰두했다. 철학자 겸 시인이 물리학 번역가까지 겸업한 셈인데, 요즘으로 치면 인문학 교수가 갑자기 물리학 논문을 써서 학계를 뒤흔든 격이다.
볼테르는 1717년 5월 16일부터 1718년 4월 15일까지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곳은 벽 두께가 3미터에 달하는 창문 없는 감방이었다.(위키피디아)
왕의 친구, 그러나 영원한 친구는 아니었다
볼테르의 명성이 높아지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를 포츠담 궁정으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적 동맹을 과시했지만, 결국 날카로운 말다툼 끝에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다. 포츠담에서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한 시절, 볼테르는 왕실의 호의와 신랄한 재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지만 이는 영예와 갈등을 동시에 불러왔다. 권력자와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비판정신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 그게 볼테르였다. 그는 결국 스위스 국경 근처 페르네에 정착해 자신만의 지적 왕국을 세웠다. 1758년 페르네에 영구 정착한 그는 이 영지를 생산적인 계몽주의 거점으로 만들어 자신의 희곡과 에세이, 소책자를 유럽 전역에 비밀리에 유통시켰다. 검열을 피해 글을 퍼뜨리는 지하출판 네트워크를 운영한 것인데, 오늘날로 치면 망명 언론사 한 곳을 사재로 차린 셈이다.
이 시기에 쓴 소설 『캉디드』는 그의 풍자 정신을 압축해 보여준다. 이 세상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 이라는 낙관론을 신봉하는 스승 밑에서 자란 순진한 청년이 전쟁과 지진, 종교재판 같은 온갖 재난을 겪으며 그 낙관론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닫는 이야기다. 웃기면서도 서늘한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고, 지금까지도 풍자문학의 교과서로 꼽힌다.
볼테르가 쓴 뉴턴 철학 책의 앞표지. 에밀리 뒤 샤틀레가 볼테르의 뮤즈로 등장하여 뉴턴의 천상의 통찰력을 볼테르에게 비춰주고 있다.(위키피디아)
칼라스 사건, 한 사람의 죽음과 펜의 힘
볼테르의 진면목이 가장 또렷이 드러난 사건이 있다. 1762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개신교도 상인 장 칼라스가 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칼라스는 1762년 3월 10일 툴루즈에서 거열형을 당했다. 실제로는 아들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가톨릭이 지배하던 사회는 소수종교인 가정에 살인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당시 권력기관 누구도 이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흔을 넘긴 노작가가 펜을 들고 나섰다. 볼테르는 사건 자료를 모으고 여론전을 펼쳐 끝내 사후 재심을 이끌어냈고, 1765년 파리의 판사 40명이 칼라스의 무죄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쓴 열아홉 살 청년 라바르 기사를 구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1766년 청년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다. 고문을 당한 라바르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지만, 그 가족의 이름과 재산은 되돌려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글이 국가 사법체계를 움직인 사례, 이보다 더 통쾌한 반전 드라마가 또 있을까.
볼테르가 사망한 파리의 집.(위키피디아)
그 더러운 것을 박살내라
이 사건들 이후 볼테르가 입에 달고 산 말이 있다. 에크라제 랭팜(Écrasez l infâme) , 풀이하면 그 더러운 것을 박살내라 는 뜻이다. 여기서 더러운 것 이 그리스도교 자체를 가리킨다는 오해가 퍼졌지만, 정확히는 종교의 이름을 빌려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광신과 사법적 폭력, 그것을 비호하는 특권화 된 정통주의를 뜻했다. 랭팜 은 그리스도교적 광신, 즉 그리스도교 자체가 아니라 박해를 자행하는 특권이 된 정통주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볼테르가 미워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을 무기로 휘두르는 권력이었다. 이 구분을 놓치면 볼테르를 반종교 투사로만 읽게 되는데, 이는 부패한 검사 한 명을 비판한 사람을 두고 법 자체를 부정한다 고 몰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볼테르는 1778년 파리로 돌아와 큰 환영을 받았으나 곧 숨을 거뒀다. 죽음을 앞두고도 종교의 마지막 의식을 거부하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훗날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판테온으로 옮겨졌고, 그를 기리던 동상은 훗날 나치점령기에 녹여져 무기로 쓰였다는 역설적인 후일담도 남아 있다. 펜 하나로 권력에 맞선 사람의 동상이 무기 재료가 됐다는 사실, 역사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잔인한 농담을 던진다.
파리 팡테온에 있는 볼테르의 무덤(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여기서 한국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2024년 12월 3일 밤, 권력을 쥔 자가 헌법 위의 존재인 것처럼 군대를 동원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때 많은 시민과 언론인이 한 일은 무엇이었나. 두려움 속에서도 사실을 기록하고, 펜과 휴대전화로 권력의 거짓을 반박했다. 볼테르가 칼라스 사건에서 보여준 것도 결국 같은 일이다. 권력이 만든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내는 일은 화려한 영웅이 아니라,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는 끈질긴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것.
또 하나, 볼테르가 평생 싸운 대상은 특정권력자 개인이 아니라 특권이 된 정통주의 그 자체였다. 한국사회에서도 검찰이든 사법부든 언론이든, 한번 정통의 자리에 오르면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가 종종 엿보인다. 누군가를 비판하면 그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것 이라는 식의 반응이 익숙하지 않은가. 볼테르식으로 말하면, 조직을 아끼기 때문에 그 안의 랭팜 을 박살내야 한다는 논리가 더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풍자의 힘이다. 『캉디드』가 낙관론을 풀코스 코미디로 분해해버렸듯, 한국정치판에도 비슷한 낙관론 구호가 넘쳐난다. 지나가면 다 잘될 것 이라는 식의 말로 책임을 덮으려는 순간마다, 볼테르라면 분명 한마디 비꼬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웃음은 종종 가장 날카로운 검보다 더 깊숙이 박힌다는 사실을, 볼테르는 300년 전에 이미 증명해 보였다.
드니 디드로, 장 르 론 달랑베르, 콩도르세 후작, 장 프랑수아 드 라 하르페와 함께한 볼테르.(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