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이없는 주권침해…동맹을 종속 으로 보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국가 간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동맹을 관계 가 아닌 소속 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동맹은 두 주권 국가가 특정한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맺는 계약이다. 계약은 조건과 기대를 전제로 한다. 조건이 바뀌면 재협상해야 하고, 기대가 어긋나면 따져 물어야 한다. 이것은 동맹의 파기가 아니라 동맹의 정상 작동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한미동맹은 종종 계약이 아닌 정체성으로, 약속이 아닌 신앙으로 다뤄져 왔다. 이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질문이 반미 로 분류된다. 정상적 외교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언어를 다시 찾기 위한 것이다.
23일 서울 광화문 광장 미국대사관 앞에서 안전한 쿠팡 만들기 공동행동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불법기업 쿠팡 비호, 내정간섭 일삼는 미국 정·재계 규탄 긴급 기자회견 을 하고 있다. 2026.1.23. 연합뉴스
어긋나는 신호들-누적되면 패턴이 된다
최근 미국이 한국을 대해온 방식을 보자.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에서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민단속국(ICE)에 수갑을 찬 채 연행되었다. 동맹국이 미국 일자리 창출을 위해 수조 원을 투자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26년 4월, 미국의 한국 주권 침해는 전방위적으로 동시에 쏟아졌다.
첫째, 범죄 혐의자를 지키려 핵잠수함을 인질로 삼았다.
쿠팡의 김범석 의장은 3367만 건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한국 경찰의 수사 대상이다. 이름, 전화번호, 주소는 물론 공동현관 비밀번호까지 유출된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김범석 의장의 출국금지·체포·구속 등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없으면 핵추진잠수함 도입 등 한미 고위급 안보협의를 진행하기 어렵다 는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미 부통령 J.D. 밴스는 같은 취지를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직접 전달했고, 공화당 연구위원회 소속 하원의원 54명은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 서한까지 보냈다. 이것은 외교가 아니다. 협박이다.
둘째, 경찰 수사에 대사관이 직접 개입했다.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은 1900억 원 부당 이익 취득 혐의로 출국금지 상태에 있다. 그런데 주한 미국대사관은 그의 출국금지 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외교부가 아닌 경찰청에 직접 보냈다.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 참석이 이유란다. 수사 중인 피의자의 신변 문제에 수사기관에 직접 압박한 것은 외교 관례를 넘어 내정 간섭의 교과서적 사례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하며 이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지만, 수사기관이 동맹국 외압에 맞서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미 비정상이다.
셋째, 국제기구를 앞세운 우회적인 내정간섭이다.
OECD 뇌물방지작업반(WGB)은 한국 검찰개혁 추진단에 서한을 보내 법안 초안 제출과 2026년 6월까지의 보고를 요구했다.
보고까지 요구하다니, 명백한 내정간섭이다. 표면상 국제기구의 권고지만, WGB는 1977년 미국 주도로 설립된 기구다. 한국이 어떤 수사 기관 구조를 선택할지는 주권적 입법 영역이다. 국제기구 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한국의 입법 주권에 대한 외압과 다름없다.
넷째, 안보 정보와 전작권까지 무기로 삼는다.
미국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북한 핵시설 관련 발언을 기밀 누설 로 규정하며 대북 정보 제공을 제한하고 있다. 동맹의 핵심인 정보 공유를 한국 장관의 발언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작권 전환에 대해 정치적 편의가 조건을 앞질러선 안 된다 고 공개 발언했다. 타국 군 사령관이 동맹국의 주권적 군사 정책에 공개 제동을 거는 것은 동맹의 기본 전제를 스스로 허무는 행위다.
각각 별개로 보면 외교적 마찰일 수 있다. 그러나 누적되면 패턴이 된다. 그리고 패턴은 메시지다. 미국의 한국 인식이 동등한 파트너 에서 관리 대상 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메시지.
미셸 박 스틸이라고?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주한미국대사 지명을 본다. 15개월 넘게 공석이었던 자리에 한국계인 미셸 박 스틸 전 하원의원이 지명되었다. 한국계 라는 사실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트럼프위협저지공동행동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일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셸 박 스틸 주한미국대사의 지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홈페이지
그러나 대사는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지, 출신지를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틸 후보는 2021년 1월 6일 미 의회 대선 결과 인증에 반대표를 던진 기록이 있으며, 한국 국내 특정 정치 세력과의 연계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 사실들이 그를 자동으로 부적절한 후보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동으로 적절한 후보로 만드는 요소도 없다.
아그레망-잊혀진 절차를 되살려라
여기서 아그레망(Agrément)을 다시 봐야 한다. 1961년 비엔나 협약은 접수국에게 파견 후보자에 대한 동의권을 부여한다. 거부할 수 있고, 그 이유를 설명할 의무도 없다. 국가 간 평등 원칙을 제도화한 장치다.
문제는 이 제도가 실무적으로는 사전 비공식 조율 후의 형식적 추인 절차로 운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강대국과 약소국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제도를 의례로만 쓸 의무는 없다. 다른 나라들은 다르게 써왔다.
독일은 2016년 북한 대사에 대해 인권 문제를 이유로 아그레망을 거부했다. 프랑스는 극단주의 단체 연계 의혹이 있는 후보에 대해 비공식 경로로 우려를 전달해 후보 교체를 이끌어냈다. 미국 자신도 타국의 이의 제기를 수용해온 전례가 있다. 아그레망이 일방적 의례가 아니라 쌍방향 조율 장치임을 미국 스스로 인정해온 것이다.
이 도구를 쓰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근거는 시민에게 설명되어야 한다.
투명성은 외교의 적이 아니다
외교는 기밀이 본질 이라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일부는 맞다. 그러나 협상의 내용을 기밀로 유지하는 것과, 결과의 판단 근거를 시민에게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법원은 판결의 결과를 발표할 때 그 이유를 함께 공개한다. 행정부도 중요한 정책 결정의 근거를 일정 시점 이후에 설명한다. 외교만 예외여야 할 이유는 없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아그레망 승인 이후 외교부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검토 경위를 보고하는 것. 후보자의 대한(對韓) 정책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사후 브리핑을 공개하는 것. 검토 기준 자체를 제도화하는 것.
이 정도의 투명성은 외교의 신속성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의 신뢰 위에서 작동하는 외교가 더 안정적이다. 싱가포르가 강대국 사이에서 국제법과 다자주의 원칙을 일관되게 내세움으로써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온 것이 그 증거다. 원칙은 약소국에게 힘을 대체하는 무기가 아니라, 힘의 열세를 보완하는 지렛대다.
동맹의 본질-신뢰 없는 동맹은 없다
한미 동맹은 70년 넘는 역사를 가진다.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그 동맹의 이름 아래 희생되었고, 한국 국민은 주한미군 주둔 비용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부담해왔다. 동맹이란 그런 것이다. 희생과 신뢰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업 로비스트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의 사법권을 흔들고, 범죄 혐의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보 협력을 인질로 삼고, 국제기구를 앞세워 입법 주권에 개입한다.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국 국민은 묻게 될 것이다. 이 동맹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동맹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한국은 이미 세계평화에 기여할 충분한 힘을 가진 나라다. 그 힘이 패권지향적 미국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지구촌에게 커다란 실망을 줄 것이다.
걸맞은 외교를 해야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동맹의 파기가 아니라 동맹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동맹이란 무조건적 추종이 아니라 조건부 협력이다.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함께 지킨다는 것이지, 한쪽이 다른 쪽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작권 전환은 주권 국가의 당연한 권리다. 사법·외교 주권의 명확한 원칙 수립은 동맹의 전제다. 기술 안보와 사이버 안보의 독자 역량 확보는 미래의 자산이다. 그리고 외교 인사에 대한 절차적 검토와 시민 공개는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동맹이란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관계일 때 성숙해진다. 질문이 사라진 동맹은 동맹이 아니라 종속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다. 그에 걸맞은 외교의 언어를 가질 때다.
한국민의 신뢰가 무너지면, 동맹도 파탄난다. 미국은 이 단순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