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또 묻고, 사람들 불편하게 해 독배 든 소크라테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기원 전 470년 경~기원 전 399년)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 강의료도 받지 않았다. 집도 별로 없었고, 옷도 허름했고, 맨발이었다. 그러면서도 아테네 광장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정의가 뭔지 알아요? 용기가 뭔지 진짜 알고 계신 겁니까? 하고.
사람들은 처음엔 대답했다. 그러다 막히면 당황했다. 당황하다 화를 냈다. 화가 난 사람들이 결국 그를 법정에 세웠다. 죄목은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 는 것. 판결은 사형. 독배를 마시고 일흔한 살에 삶을 마쳤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첫 번째 위대한 업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투표로 죽인 것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리석 두상(위키피디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 가장 용감한 고백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등에 (말파리)라고 불렀다. 거대하고 느릿한 말(아테네 국가)의 엉덩이를 쏘아 깨어 있게 하는 벌레. 환영받을 리 없는 역할이다. 등에는 결국 잡혀 죽는다. 그러나 잠든 말보다 낫다.
그의 철학 방법은 산파술 이라 불렸다. 직접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거듭해 상대방 스스로 결론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실제로 산파였으니, 직업 유전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왔고, 아들은 생각을 낳는 것을 도왔다.
문제는 이 도움 이 대단히 불쾌하다는 점이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실은 모르는 거 아닌가요? 라는 질문은 진심 어린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욕에 가깝다. 특히 그 듣는 사람이 장군이거나, 정치인이거나, 유명한 시인이라면.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 를 전해 듣고 당황했다. 내가 아는 게 없는데 왜? 싶어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봤다. 그들도 몰랐다. 다만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한 발 앞선 셈이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것이 가장 어렵다.
기원 전 432년 포티다이아 전투. 아테네군과 코린토스군의 싸움 일부분. 소크라테스(중앙)가 알키비아데스를 구하는 장면. 18세기 판화.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포티다이아 전투, 델리움 전투, 그리고 기원 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 참전했다.(위키피디아)
제자들, 그가 남긴 것들
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제자를 남겼다. 그 제자 중 하나가 플라톤(기원 전 428년 경~기원 전 348년 경)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받아 적어 철학사의 절반을 채웠다. 플라톤의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 전 384년~기원 전 322년)로 나머지 절반을 채웠다.
한 사람의 질문이 서양 지성사 2천년의 뿌리가 된 것이다. 책 한 줄 안 쓰고.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이후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국가』 등을 썼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는 대신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다고 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 제안을 거부하겠소.
죽음보다 침묵을 더 두려워한 사람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1787).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던 중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과의 대화는 플라톤에 영감을 주었다.(위키피디아)
아테네의 법정과 민주주의의 역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주의의 가장 아찔한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500명의 배심원이 참여한,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민주적인 절차였다. 찬성 280표, 반대 220표. 불과 30표 차이로 사형이 결정됐다.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진리를 죽인 날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도망칠 수 있었다. 제자들이 탈출을 도우려 했고, 당국도 사실 눈감아줄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나는 아테네의 법에 따라 살아왔다. 불편하다고 그 법을 어기는 것은 내 철학과 모순된다.
그는 독배를 태연히 마셨다. 제자들이 울었다. 그는 왜 우느냐 며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죽는 것도 의연하게, 가르치면서 죽었다.
니콜라 앙드레 몽시오의 작품. 소크라테스의 토론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외국인뿐 아니라 모든 사회 계층 사람들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대화했다.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가 한국 광장에 나타난다면
자, 이제 상상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오늘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타난다면?
맨발로 어슬렁거리며 마이크를 든 정치인에게 다가가 묻는다.
지금 하신 말씀에서 민생 이 뭔지 정확히 정의해 주시겠습니까?
아마 경호원에게 제지당하는 데 3분도 안 걸릴 것이다.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다면? 구독자 0으로 시작해 댓글 창은 또 질문만 하네 결론이 뭔데요? 이 채널 별로임 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그 채널의 아카이브가 인류의 유산이 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지금 한국에서 매우 낯설다. 우리는 답 을 원하는 사회다. 빠른 답, 명확한 답, 유튜브 10분 안에 나오는 답. 질문 자체를 즐기고, 불확실성과 함께 앉아 있는 훈련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는 정답 을 고르는 연습을 하고, 직장에서는 결론 을 먼저 말하라고 하고, 정치에서는 확신에 찬 목소리 가 지도력으로 통한다.
피티아가 영매(靈媒)였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유적. 델포이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 는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대화록, 특히 『변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키피디아)
한국 현실에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돌직구
2025년을 거쳐 2026년으로 넘어온 한국은 탄핵 정국, 조기 대선, 갈라진 여론, 불신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이 상황에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이 지지하는 그 분, 정확히 어떤 점에서 옳다고 보십니까? 반대하는 이유가 사실에 근거합니까, 아니면 감정에 근거합니까? 당신의 믿음이 틀릴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됩니까?
이 질문들은 불편하다.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는다. 방송은 하지 않고, 유튜브 알고리즘도 좋아하지 않으며, 정치인들도 절대 꺼내지 않는다. 불편한 질문은 조회수가 낮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 불편한 질문이 사회를 살아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질문이 없으면 권력은 썩는다.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으면 독선이 된다. 등에가 없으면 말은 잠든다.
한국 언론, 특히 진보언론은 스스로에게도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 정말 검증했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편에서 질문하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수아 앙드레 뱅상이 1776년에 그린 그림,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는 모습》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을 묘사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산천초목을 지배하고 인간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인 힘을 다이몬 이라 불렀다. (위키피디아)
죽음 이후, 2500년의 울림
소크라테스는 기원 전 399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테네의 양심을 수백 년간 괴롭혔다. 훗날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처형한 것을 후회했고, 고발자들을 비난했다. 기원 전 399년의 다수결은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다.
역사는 결국 소크라테스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그가 죽은 뒤에.
교훈은 간단하다. 불편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당장 잡아 가두거나 퇴출시키면 그 순간은 편하다. 그러나 그 사회는 서서히 잠든다. 비판하는 목소리, 다른 생각, 소수의견을 견디는 힘이 민주주의의 실제 근육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를 증명했다. 몸은 독배로 죽일 수 있어도, 질문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
오늘도 누군가는 광장에서, 회의실에서, 댓글 창에서, 조용히 묻고 있다.
정말 그게 맞습니까?
그 사람이 현대의 등에다. 귀찮아도, 쫓아내지 말자. 등에가 없으면 말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벽화, 서기 1세기~5세기. 에페소스 박물관, 튀르키예 에페스(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