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7주년] 그날의 함성 세계에 알린 테일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최대의 시민운동이자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된 3·1운동은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언론은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높게 평가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에 우려를 표시했다. 중국인 대학생들은 한국인을 본받아 5·4운동을 벌였으며, 인도 독립운동가들도 3·1정신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무저항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107년 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소식을 해외에 처음 알린 인물은 미국인 기자 앨버트 테일러였다. 1874년 미국 네바다주 실버에서 태어난 그는 금광 기술자인 아버지 조지를 따라 1896년 한국에 들어와 평안북도 운산금광 감독자로 일했다. 19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충청남도 직산광업사 기술 경영 책임자로 일하며 뉴스통신 AP와 UPA(UPI의 전신)의 서울특파원을 겸했다.
3·1운동 소식을 가장 먼저 해외로 타전한 서울 주재 외신기자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테일러는 동생 윌리엄과 테일러상회를 설립해 생활용품이나 건축자재 등을 수입 판매하고 자동차 판매도 대행했다.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아 테일러골동품점도 운영했다. 굴착기를 매입하러 일본 요코하마로 출장을 갔다가 공연차 그곳에 들른 영국 출신 연극배우 메리 린리와 사랑에 빠져 1917년 결혼했다.
갓난 아들 병원 침대 밑에서 발견한 독립선언서
1919년 2월 28일, 부인 메리는 현재 연세대재단 빌딩이 들어선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를 출산했다. 그 병원에는 민족대표 33인 이갑성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등이 근무하고 있었고, 직원 상당수가 3·1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병원 안에 있는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기도 했다. 일제 경찰이 병원을 수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간호사가 독립선언서 뭉치를 브루스가 누워 있는 침대 속에 감춰놓았고 앨버트가 이를 발견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동생 윌리엄을 시켜 기사와 독립선언서 한 부를 일본으로 몰래 반출했다. 도쿄 지국은 이를 전달받아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가 작성한 기사는 3월 19일자 뉴욕타임스에 게재돼 눈길을 끌었고 다른 언론의 후속 보도를 끌어냈다.
앨버트 테일러의 3·1운동 관련 기사가 실린 1919년 3월 19일자 뉴욕타임스 지면(왼쪽). 세브란스병원에서 등사기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환자들의 침대에 숨겼다가 배포했다는 내용이 담긴 이용설 증언 메모(오른쪽). 딜쿠샤 2층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이희용 촬영)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일제는 이를 총칼로 진압하다가 4월 15일 경기도 화성의 향남읍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교회에 가둬놓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곳도 현장 취재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선교사 스코필드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이 조선 총독을 찾아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 항의할 때 동행했고, 민족대표 등 독립운동가 재판도 방청하며 취재했다.
손병희와 최린 등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법정에 출두한 장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 지면. 미국 연합통신(AP) 통신원 테일러가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문기자석에 들어왔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나 미국인이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추방됐다. 광복 직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다시 방한해 인연을 이어갔다.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뒤 그의 뜻에 따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묘원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
권율 장군 집터에 지은 ‘기쁜 마음’의 집 딜쿠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집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인도 북부 러크나우에 영국인이 지은 별장 이름에서 따왔다. 인도 뭄바이에서 신혼여행을 다니다가 러크나우에 들른 부인 메리는 나중에 자신도 집을 지으면 딜쿠샤로 부르겠다고 마음먹었다.
메리는 1920년 초 서울성곽을 산책하다가 큰 은행나무가 있는 평평하고 높은 언덕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그곳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집터였다. 수령 500년 가까운 은행나무가 있어 행촌동이란 지명의 유래가 됐다. 나중에 그 땅이 매물로 나오자 10만 엔에 사들였다. 1923년 공사를 시작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양식 벽돌집을 1년 만에 완공했다. 테일러 부부는 한국 전통 가구와 골동품으로 거실과 방을 꾸며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1926년 화재가 발생하기 전의 딜쿠샤(위). 2021년 복원 후 전시관으로 문을 연 딜쿠샤(아래), (서울역사박물관)
그러나 집 이름의 뜻과 달리 테일러 가족은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앨버트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간 1926년 집에 벼락이 떨어져 전소되다시피했다. 1929년 9월 귀국한 뒤 이듬해 지상 2층으로 재건축해 1942년 추방될 때까지 살았다.
그 뒤로 이 집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1950년대 자유당 조경규 국회의원이 매입했다. 그가 5·16 군사정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재산을 몰수당하자 딜쿠샤도 1963년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무단 점유해 수십 가구가 칸막이로 쪽방을 만들어 생활해왔다.
어머니 회고와 66년 전 기억 토대로 찾아낸 옛집
그러는 사이 앨버트 테일러의 존재도 희미해졌고 집의 내력도 잊혀갔다. 이곳 주민 사이에서는 ‘미국인 기자의 집’이었다는 소문이 전해 내려왔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 바로 옆 송월동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집터가 있다 보니 대한매일신보 사옥이었을 것으로 잘못 추정한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메리가 딜쿠샤에 얽힌 사연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자서전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가 있었다. 그녀가 집을 지으려고 하자 집안에 악운이 내리고 화마가 집을 삼킬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혀 있다. 1982년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브루스에 의해 1992년 출판됐다.
앨버트와 메리 테일러 부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닐 때 찍은 사진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브루스는 1940년 군 입대를 위해 한국을 떠난 지 66년 만인 2006년 아내와 딸을 데리고 방한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아나섰다. 집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고 서쪽 창문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내려다보였다는 등 어머니의 회고와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마침내 딜쿠샤를 찾아냈다.
머릿돌에 ‘DILKUSHA 1923’이라고 새긴 글귀의 의미도 그때서야 밝혀졌다. 브루스가 딜쿠샤를 찾은 이야기는 김익상 서일대 영화방송예술과 교수에 의해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나라’로 제작돼 2006년 KBS TV 3·1절 특집으로 방송됐다. 딜쿠샤의 기구한 사연은 201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2023년에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딜쿠샤 머릿돌에 새겨진 ‘‘DILKUSHA 1923’.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란 뜻이다. (이희용 촬영)
브루스는 소장하고 있던 옛날 서울 사진 17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서울시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소유주인 기획재정부와 협의한 뒤 주민들을 이전시키고 기념관으로 꾸미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 옛 모습 복원하고 기념관으로 일반 공개
딜쿠샤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건축학적으로도 뛰어나 2017년 8월 8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됐다. 대지는 처음 지을 때보다 상당히 축소돼 462㎡(약 140평)이며 연면적은 623.76㎡(약 189평)다. 주변에 다가구주택·연립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전망을 가리고 있다.
문화유산 지정에 앞서 2016년 2월 손녀 제니퍼 테일러도 방한했다.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한 뒤 딜쿠샤 관련 유물 57건 169점을 기증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직원들도 미국을 방문해 관련 유물과 유품 수백 점을 추가로 넘겨받는 한편 당시 사진을 토대로 실내장식과 가구, 병풍 등을 복원했다.
테일러 부부가 주로 생활한 딜쿠샤 2층 거실. 서양식 벽난로, 의자, 탁자 등과 한국 전통의 머릿장, 꽃병 등이 동서양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희용 촬영)
당초 목표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개관하는 것이었으나 무단 입주해 살던 주민들을 내보내느라 2년 뒤 마무리됐다. 개관식에 맞춰 재방한한 제니퍼는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 102주년 기념식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3·1절에 테일러가 있었듯 5·18엔 힌츠페터가 있었다
딜쿠샤는 개관 초기 인터넷 예약자만 입장하도록 했다가 지금은 상시 개방하고 있다.(오전 9시~오후 6시, 월요일 휴관) 1층과 2층을 모두 전시실로 꾸몄고 벽난로, 소파, 식탁, 커튼, 카펫 등을 사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3·1운동 소식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 타자기, 부인이 결혼 선물로 받은 호박목걸이, 고종의 국장 행렬을 비롯한 당시 사진, 부인 메리가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 기록 영상 등이 전시돼 있다.
앨버트 테일러가 1919년 3월 3일 촬영한 고종의 인산(因山·국장) 행렬.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 방한해 기증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지난해 7월 15일부터 오는 6월 28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딜쿠샤 집사 김주사(김상언)를 주제로 한 ‘독립, 일상에서 지킨 염원’이 열리고 있다. 주미 한국공사관 견습생 출신으로 내각 주사 등을 지낸 김상언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딜쿠샤를 관리했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되자 투옥돼 심한 고문을 받고 지게로 실려 나와 그 후유증으로 집에서 숨을 거뒀다. 훗날 그의 안방 천장 위에서 발견된 태극기, 메리가 그려준 초상화, 손녀 김규연 씨 소장 사진 등을 만날 수 있다.
딜쿠샤 집사인 김상언 안방 천장 위에서 발견된 태극기(왼쪽). 김상언의 환갑을 맞아 메리 테일러가 그려준 초상화(오른쪽). 딜쿠샤 기획전 ‘독립, 일상에서 지킨 염원’에서 선보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1만 8651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3·1운동 관련자가 6583명으로 가장 많고,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7명에 이른다. 그러나 3·1운동을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렸고 훗날 투옥됐다가 추방된 테일러는 빠져 있다. 지난해 12월 국민제안이 접수돼 공적 심사를 앞두고 있다.
1919년 3월 서울에 미국 뉴스통신 AP 기자 앨버트 테일러가 있었듯 1980년 5월 광주에는 독일 공영방송 ARD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있었다. 테일러가 없었다면 3·1운동의 실상이 해외에 훨씬 늦게 알려졌을 터인데 마찬가지로 힌츠페터가 없었다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도 훨씬 뒤늦게 알려졌을 것이다. 현행 ‘5·18 민주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만 민주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힌츠페터도 민주유공자가 될 수 있다.
힌츠페터가 함께 유공자로 인정돼 적절한 예우가 이뤄지고, 국내 언론계가 이들의 기자 정신과 인도주의적 태도를 귀감으로 삼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가 2016년 2월 29일 증조부와 조부가 잠들어 있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아 미국의 아버지 무덤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