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붓 대신 총을 든 화가, 선거로 민주주의 죽인 히틀러

붓 대신 총을 든 화가, 선거로 민주주의 죽인 히틀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낙방생이 있다. 조용히 눈물 훔치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 그리고 대륙 하나를 불태우는 사람.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불행하게도 후자였다.   1938년의 히틀러(위키피디아) 화가 지망생의 위험한 방향 전환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 실제로 그림 솜씨가 없진 않았다. 문제는 빈 미술학교가 그를 두 차례, 1907년과 1908년에 연거푸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인물화가 영 아니다 라고 평했는데, 훗날 그가 수백만 명의 인물을 역사에서 지워버린 걸 생각하면 심사위원들의 판단력은 그림보다 훨씬 뛰어났던 셈이다. 낙방 후 히틀러는 빈의 합숙소를 전전하며 엽서그림을 팔아 근근이 살았다. 이 시절 그는 반유대주의 소책자를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오염되어 갔다. 빈은 당시 유럽 최고의 문화도시였지만, 동시에 온갖 혐오 사상의 온상이기도 했다. 좋은 환경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   아돌프 히틀러, 1889년 아니면 1890년(위키피디아) 전쟁, 패전, 그리고 스피커를 찾아낸 남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1918)이 터지자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다. 오스트리아인이 독일군에 지원한 것 자체가 이미 정체성 혼란의 증거였지만, 어쨌든 그는 용감하게 싸워 철십자 훈장도 받았다.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을 때 그는 병원에서 독가스로 인한 일시적 실명 상태였고, 패전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고 한다. 바로 이 통곡이 문제였다. 슬픔이 반성으로 가면 성숙이 되고, 분노로 가면 파괴가 된다. 히틀러의 슬픔은 후자의 방향으로 폭주했다. 1919년, 그는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했다가 이내 주도권을 잡고, 1920년 이름을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줄여서 나치당(NSDAP)으로 바꾸었다. 이름에 노동자 와 사회주의 가 들어 있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였다. 이름과 내용이 다른 정당은 예나 지금이나 조심해야 한다. 1923년 히틀러는 이른바 맥주집 반란 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감옥에 갔다. 그런데 감옥에서 자서전 겸 선언문인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다. 징역살이를 홍보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수감 기간은 9개월. 출소 후 그는 더 유명해져 있었다.   아돌프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본명 시클그루버, 1837 ~ 1903)는 오스트리아의 공무원이었다. (위키피디아)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죽이다 히틀러의 가장 소름 돋는 업적(?)은 그가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는 점이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터지자 독일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업률이 치솟고 국민은 절망했다. 이 틈을 타 히틀러와 나치당은 다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때문 이라는 손쉬운 해답을 내놓았다. 복잡한 경제문제에 단순하게 적을 지목하는 방식은 효과가 탁월했다. 나치당은 1932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고, 1933년 1월 파울 본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히틀러는 숨막히는 속도로 권력을 독점했다. 1933년 2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구실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같은 해 3월 수권법을 통과시켜 의회 없이 법률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다. 민주주의의 절차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해체한 것이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합쳐 총통(Führer) 이 되었다. 이제 제동장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돌프의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결혼 전 성은 푈츨, 1860 ~ 1907년 위키피디아) 전쟁과 학살, 그리고 끝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1945)이 시작되었다. 초반에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유럽을 휩쓸었다. 그러나 1941년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은 히틀러 최대의 실착이었다. 광활한 러시아 땅과 혹독한 겨울은 나폴레옹(1769~1821)도 꺾었건만, 히틀러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역사가 된다. 한편 나치 독일은 유대인·집시·장애인·동성애자 등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유럽 내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자행했다.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포함해 모두 1100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인류 역사상 국가가 조직적으로 벌인 가장 거대한 살인이었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 코앞까지 밀려들자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쉰여섯 살이었다. 세상을 불태우고 자신도 재가 된 인생이었다.   뮌헨의 알터 호프를 1914년 히틀러가 그린 수채화(위키피디아) 거울을 돌려 한국을 보다 자,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야 한다. 히틀러 이야기는 먼 나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첫째, 경제위기와 혐오정치의 결합. 히틀러는 대공황이라는 경제위기에서 피어났다. 오늘날 한국도 청년실업, 집값폭등, 양극화로 민심이 흉흉하다. 이럴 때 다 저놈들 때문이야 라고 정치인이나 선동가가 손쉬운 적을 지목하면 대중은 흔들린다. 외국인 노동자, 페미니스트, 난민, 특정지역 출신 등을 문제의 근원 으로 지목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때, 우리는 히틀러의 초기 연설을 떠올려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의 절차를 이용한 민주주의 파괴.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로 집권했다. 수권법도 의회 표결로 통과됐다. 한국에서도 헌법과 법률의 외피를 두르고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까지 계엄령의 논란이 반복되는 현실에서  합법이면 괜찮다 는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히틀러가 이미 증명했다. 셋째, 언론과 선동. 히틀러는 라디오와 대중 집회를 통해 감정을 자극했다. 오늘날의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은 그 수천 배의 위력을 가진 선동도구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먹고 자란다. 화나는 영상일수록 더 많이 추천된다. 히틀러에게 유튜브가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넷째,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 독일은 히틀러 이후 철저한 과거 청산을 했다. 나치 예찬은 지금도 독일에서 범죄다. 반면 한국은 일제강점기 부역자, 군사독재 부역자들이 청산은커녕 주류를 유지한 역사가 있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청산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공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예방접종이다.   아돌프 히틀러(맨 오른쪽 앉은 이)가 바이에른 예비 보병 연대 16 전우들과 함께 있는 모습(1914~1918년, 위키피디아) 낙방한 화가의 교훈 히틀러를 악마화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저지른 일 이라고 거리를 두는 순간, 우리는 배울 기회를 놓친다. 히틀러는 괴물이기 이전에 평범한 낙방생이었고, 평범한 독일시민들이 그에게 표를 주었으며, 평범한 군인들이 그의 명령을 집행했다. 악은 대부분 평범한 얼굴로 온다. 멋진 구호와 속 시원한 해답을 내밀며 온다. 빈 미술학교가 그를 두 번째 떨어뜨렸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야, 너 말 잘하더라. 글도 잘 쓰던데, 기자나 해봐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역사는 한 사람의 진로 상담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주변의 분노한 청년을 그냥 두지 마시길. 그리고 오늘 뉴스에서 다 저놈들 때문 이라는 말이 들려온다면, 잠깐 히틀러를 떠올리자. 그 말이 얼마나 익숙하게 들리는지를.   히틀러가 1930년 9월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위키피디아)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