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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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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자네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는 윤동주(1917~1945) 시인이 일본 릿쿄대학 시절에 쓴 5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흐르는 거리’(1942.5.12)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은 2000년에 릿쿄대 교목으로 부임한 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를 설립하고 지금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성공회 유시경 신부(오사카교구 대성당 가와구치기독교회 주임사제)가 지난 11일 릿쿄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관련 행사와 그 의미 등을 정리해 에 보내 온 것이다.   유시경 성공회 오사카교구 신부, 릿쿄대 교목 윤동주 시인 서거 80년, 모교 릿쿄대에 기념비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린 지난 10월 11일 토요일 오후 3시, 일본 도쿄의 릿쿄(立敎)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인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시인이 이 대학에 유학한 것이 1942년 4월이니, 8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종전/패전 80년을 기억하는 올해는 동시에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비명에 간 지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83년만에  윤동주 시인이 릿쿄로 돌아왔다” 이 날 교정에서는 오전부터 시 낭송대회가 열렸고, 전시관에서는 9.16-10.25기간에 개최 중인 ‘윤동주의 세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강당과 대교실에서는 공지영 작가와 유명 한국 배우들을 초청한 시네마 심포지움도 열려, 이 날만큼은 ‘시인 윤동주의 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날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학 총장은 기념비 제막식 인사를 통해  윤동주 시인이 릿쿄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의 말처럼 시인은 이 곳에 돌아왔을까요? 저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시인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되어 있는가, 시인을 맞이할 만한 곳인가를 계속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릿쿄대에 세워진 윤동주 시인 시비.  유시경 신부   행사에 참석한 분들과 함께. 맨 왼쪽이 문성근 배우, 중앙이 송경용 신부, 오른쪽이 유 신부. 제막식 행사를 마친 후 이어진 관계자들의 리셉션에서 릿쿄대학의 시비에 새겨진 시의 일본어 번역을 하신 분이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언론 취재가 다 끝난 후의 모임이기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기념비의 ‘쉽게 씌어진 시’일본어 역자 이다 이즈미 기념비 건립 자랑할 일 아니라 참회와 회개의 표시” 일본성공회 은퇴 사제 이다 이즈미입니다.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릿쿄대학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 기념비에 새겨진 ‘쉽게 씌어진 시’의 여러 번역들 중에서 제 번역을 사용해 주신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부끄럽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3년 동안 릿쿄대학 문학부 기독교학과 조교로 근무하였습니다. 윤동주가 공부했던 영문과는 당시 기독교학과 옆에 있어서 자주 오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윤동주라는 시인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윤동주를 알게 된 것은 릿쿄대학을 그만둔 다음 해인 1986년 6월이었습니다. 이부키 고 씨의 번역서를 손에 넣은 뒤 곧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기 계신 대한성공회의 유시경 신부님을 뵙고 나서 윤동주의 시집을 사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김향원 사모님께서 저를 교보문고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구입한 『尹東柱 全詩集(윤동주 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는 제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때부터 저는 윤동주를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2025년 1월의 전시회를 알리는 전단 릿쿄대학의 편지지에 쓰인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당시 대일본제국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며 일본의 한 부분으로 편입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쿄의 하숙  육첩방” 안에서, 여기가  남의 나라”임을, 자신을 억압하는 나라임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릿쿄대학도  남의 나라”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이 시의 마지막에 한자로  一九四二、六、三、(1942, 6, 3)”이라고 날짜를 적었습니다. ‘쇼와 17년’이라고는 쓰지 않았습니다. 어찌  남의 나라”의 연호를 쓸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이것조차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의 의지와 결의를 봅니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을 떠난 지 83년이 지났습니다. 그를 떠나게 한 릿쿄대학이 이제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릿쿄대학의 명예가 아닙니다.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참회와 회개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시를 이렇게 맺습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 최초의 악수.” 그가 손을 내밀 상대는, 그때는 여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라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악수” 라고 했습니다.  최초”이되  최후”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인인 우리의 회개, 그리고 릿쿄대학의 반성과 사죄의 구체적 실천 속에서, 그는 지금 우리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려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배타주의가 강해지는 일본 사회 속에서, 릿쿄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윤동주 기념비를 통해 윤동주 시인 자신이 우리 모두에게 진리와 평화, 정의와 사랑을 계속 호소하리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2월 조선신보 기사.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갱각한다-동화와 배제, 변함없는 일본 일본체류 35개월 중 19개월 체포, 취조, 구금생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년 윤동주는 1942년 1학기를 릿쿄대학에서 마치고 고향 (만주의) 용정을 다녀 왔고, 10월부터 쿄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편입학을 했습니다. 군사 훈련이 강화되던 릿쿄를 떠나 용정의 친구들이 있던 쿄토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듬해 1943년 7월 14일, 여름 방학 중의 고향 방문을 위해 차표를 사 두었지만 그 날로 일본의 특고(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1944년 3월 31일 재판 결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16일 미명에 원인불명으로 28세라는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일본 체류 기간은 모두 35개월로 그 중 절반 이상인 19개월을 체포와 취조, 구금과 수형 생활로 보냈습니다.    도쿄신문 2008년  2월 11일 기사. 한국의국민적 시인 윤동주, 릿쿄대에서 추도집회 ‘교토 조선인학생 민족그룹 사건’으로 체포 법정의 죄목은 1941년에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5조(독립운동) 위반이었는데, 훗날 1977년에 일본의 연구자가 찾아낸 특고 월보(1947.12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발행)의 내용에 따르면 ‘재교토 조선인학생 민족그룹 사건’이었습니다. 사후 1947년에 경향신문 지면에 2편의 시가 소개되면서 처음 시인으로 알려졌고, 1948년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시집이 발행되었습니다. 1968년에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기숙사인 연세대학교 핀슨홀 앞에 첫 시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때까지 윤동주는 서정시인, 일제하에 식민지 종주국에서 불의하게 요절한 시인의 이미지가 컸습니다. 특고 월보로 밝혀진 취조 기록에 이어 1982년에 역시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쿄토 재판소의 재판 기록이 공개되면서 윤동주는 저항시인, 민족시인으로 새로운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1984년 일본에서 첫번째 시 전집이 발행되었고, 아직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없었던 1985년, 또 한 명의 일본인 연구자가 고향 용정에서 윤동주의 묘를 발견했습니다. 이어 1986년에는 연변대학에 윤동주 연구회가 만들어졌고, 일본의 시인이 이라는 책에서 윤동주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고, 이 글이 후일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중 하나에 실리게 됩니다.     2009년 11월 릿쿄에서 연극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상연 뒤 기념 촬영.  1995년 서거 50주년이 윤동주 기억의 분기점 1995년, 광복 50주년이자 시인의 서거 50주년인 이 해는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는 흐름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맞이합니다.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을 앞두고 서울에서 ‘민족시인 윤동주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1994년에 발족한 ‘후쿠오카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주관한 ‘한일 합동 위령제’가 후쿠오카 형무소 터에서 열렸습니다. 도시샤대학 재일동포 코리아동창회의 노력으로 도시샤대학 교내에 일본에서의 첫번째 시비가 건립되었고, 이후 ‘윤동주 기념회’로 활동을 이어갑니다.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도 50주년 추도회를 열었고, 3월에는 해방 후 최초로 한국 KBS와 일본NHK가 공동제작 다큐멘터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을 방영합니다.  한국에서는 1995년의 50주기 행사 이후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광복 50주년을 전후해서 발족한 각 지역의 움직임들이 계속 활동을 이어갑니다. 1998년에 이 한일 연구자의 협업으로 간행되었고, 1999년에는 도쿄에서도 ‘윤동주 고향방문 모임’이 발족해서 이후 도쿄에서의 기념행사를 주관하게 됩니다. 윤동주 연극도 계속 상연되었고, 연구서 발행도 이어졌습니다. 2002년에는 ‘한일 국민교류의 해’를 맞아 ‘윤동주를 읽다 - 한일 독자 교류회’에 후쿠오카와 도쿄의 추도회가 참가하는 등, 조용하지만 꾸준한 활동들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에서의 다른 활동들의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지만, 그런 꾸준한 움직임이 계속되는 중에도, 앞서 이다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첫 유학지인 릿쿄대학에서는 어떤 연구도 기념도 없었습니다. 제가 2000년도에 일본성공회와 한국성공회의 선교 협력관계를 배경으로 릿쿄대학의 첫 한국인 교목으로 부임했을 때에, 이 점에 놀랐습니다. 그런 심경을 역시 언론 취재가 끝난 후의 모임에서 밝힌 바 있기에 옮겨 소개합니다.   인삿말을 하는 유시경 신부 전시관에서 윤동주 시인의 조카 윤인석 씨와 함께. ‘릿쿄회’공동대표 유시경 교목의 ‘헌배사’ 헌배사 지금 소개받은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이하 ‘릿쿄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유시경입니다. 이다 이즈미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1986년 서울에서 교보문고로 안내해서 윤동주의 시집을 구입하도록 한 건 자네가 아닌가? 이제 자네도 릿쿄에 와서 그 일을 마무리해라!”라는 신부님 뜻이 저를 릿쿄대학의 교목으로 파견되게 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앞서 문익환 목사에 관한 말씀도 있었는데, 문 목사님이 첫번째 평양 방문 때 순안 공항의 환영식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5년 전인 2000년도에 릿쿄대학의 채플린(chaplain, 교목)으로 부임할 때, 윤동주 시인의 첫 유학지에서 일하게 된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정작 부임해서 알게 된 것은, 아직 릿쿄대학에 윤동주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길게, 몇 년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2007년에 릿쿄대학 안에서 첫 준비모임을 가졌습니다. 2008년에 문학부 창립 100주년 행사의 하나로 릿쿄대학의 채플에서 정기적인 추도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동시에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가 발족했습니다. 그 일에 함께 뜻을 모았던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벌써 17년 전의 일입니다. 준비 단계부터 치면 2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멋진 채플회관으로 새로 건축되었지만, 옛 채플회관 2층에 있던 저의 연구실이 윤동주 ‘릿쿄회’의 아지트였습니다. 이 곳에 가쁜 숨을 쉬시며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오셨던 사학과 야마다 쇼지 교수님을 먼저 기억합니다. 교수님도 ‘릿쿄회’의 발족 멤버였고, 릿쿄학원의 전쟁에 대한 반성과 과제, 역사적 책임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시인 윤동주와 함께 행사 장면. 욘사마는 모른다. 오직 윤사마!” ‘릿쿄회’의 중심 멤버인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를 비롯한 졸업생들과 유학생들을 기억합니다. 특히 ‘릿쿄회’ 멤버들은 지난 17년 동안 한결같이 오늘을 기다리며 열정을 쏟아오셨습니다. 야나기하라 씨는 ‘겨울연가(후유노 소나타)’의 붐이 일본을 휩쓸던 때에도  욘사마는 모른다, 오직 윤사마!!”라 할 정도로 윤동주를 사랑한 분이신데, 최근 건강이 여의치 않아 올해부터 발족 멤버인 제가 함께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릿쿄와는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지만 17년간의 추도식과 추도사업을 위해 지지와 도움을 주셨던 분들도 기억합니다. 윤동주의 묘를 발견하신 고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님, 일본어로 시전집을 번역하신 고 이부키 고 선생, 자신의 엣세이에 윤동주 시인을 소개했고 그 엣세이가 교과서에 실린 고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 등을 기억합니다. 윤동주 평전을 쓰신 고 송우혜 작가도 함께 기억합니다. 아울러 매년 2월의 릿쿄대학 추도회에 참석해 주시고, 시를 함께 읽고 들으며, 변함없이 지지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미 전후 50주년이던 1990년대부터 추도행사를 하셨던 도시샤대학 관계자와 후쿠오카 시 낭독 모임의 활동 등에 이어 ‘릿쿄회’의 추도 사업이 더해지면서, 윤동주를 기억하는 일이 조금 더 큰 불꽃으로, 조금 더 밝은 불꽃으로 확대되었고, 먼저 일본에서 전국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본에서의 움직임들이 한국의 윤동주 기념사업과 영화 ‘동주’의 제작 등 ‘윤동주 르네상스’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고 감히 평가합니다. 아울러 한일이 협력해서 함께 지키는 역사와 정신의 하나의 모델, 즉 한일이 함께 찾고, 기억하고, 지키고, 계승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저는 2018년에 ‘릿쿄회’가 발족한 이래, 릿쿄학교에 출근할 때마다 성묘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아직 윤동주의 영전에 드릴 것이 없다… 그렇게 이어져 온 ‘릿쿄회’의 작고 미미하지만 꾸준한 움직임과 소리에 릿쿄대학이 크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2010년부터 ‘윤동주 장학금’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윽고 올해는 ‘윤동주 기념비’를 세워 주셨습니다. 언젠가 명예 졸업장도 수여되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이끌어 주신 오랜 동료인 니시하라 렌타 총장의 리더십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말을 줄이겠습니다. 잔을 채워 주시지요. 오늘 이 잔을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분들과, 윤동주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 그의 시처럼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는 생명과 평화의 마음을 지닌 한국과 일본, 전 세계의 모든 분들에게, 그 누구보다 우리가 함께 기리는 윤동주 시인의 영혼 앞에 이 잔을 바치고 싶습니다.  헌배!” ‘릿교회’가 릿쿄대에 요청한 내용 20여년의 ‘릿쿄회’의 발걸음이 이번에 기념비 설치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2008년 첫번째 추도행사를 마치고 릿쿄대학 교무회의에 제출한 보고서 중에 당시의 ‘릿쿄회’가 대학 당국에 제안 요청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아직 못다한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1. 계속 사업 1) 대학채플에서의 정례적인 추도기념식 2) 도서전시회 개최 3) 대학의 다양한 매체를 통한 홍보 2. 장기 사업 1) 기념 부스, 조형물 설치 2) 정보 제공(방문자들을 위한 안내지 등) 3) 시인의 시와 생애에 대한 연구, 학습, 현장 학습 기회 제공 4) 동북아시아를 염두에 둔 ‘윤동주 장학금’ 설치 5) 전쟁시기 자료 등 릿쿄대학 재학 시기의 조사연구 협력  여기에 덧붙여서 제가 구두로 추가 설명을 했습니다. 1) 한국 릿쿄회(동창회)와의 협력 2) 협정교이기도 한 시인의 모교 연세대학교와의 협력 3) 한일 관계,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문화 트렌드로 방향성을 잡고 사업 실행 4) 이상의 일들은 ‘릿쿄회’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대학 당국의 정책 수립 필요 윤동주 시인은 입구이자 안내자 10월 11일 오전부터 ‘시인 윤동주와 만나는 릿쿄의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윤동주 시 낭송회의 심사평 중 일부를 소개하며 마칩니다. 심사위원을 맡은 유시경입니다. (노래)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이등병의 편지’라는 유명한 노래의 작곡가인 김현성 씨가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저는 언젠가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 작품의 경연대회도 열렸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지금 노벨상 발표 시즌입니다. 작년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발표를 듣고, 제 마음 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만약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계속 시 작품을 썼다면 분명 노벨 문학상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재능을 지닌 청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비가 내리는 것도 아마도 그  시인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의 비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윤동주 시인은 입구이자 안내자라고 생각합니다. 윤동주를 통해 여러분은 아주 멋진 새로운 길의 입구와 만났고, 멋진 문학과 정신세계로 안내받고 있습니다. 마침내 나 자신과도 새로이 만나게 됩니다. 사실 윤동주는 목숨을 걸고 시를 썼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시가 그의 목숨값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윤동주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또 한 명의 윤동주를 낳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또 한 명의 윤동주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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