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경의 ESG 딥다이브】EU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ESRS)의 대전환… 이상 에서 현실 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이 2025년 11월 EU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의 적용을 위한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 개정 최종안을 발표했다. 이번 개정안은 일명 옴니버스 패키지 의 일환으로, 2023년 제정된 기존안보다 보고 요구사항을 대폭 단순화하고 데이터포인트를 70% 이상 감축하는 등 기업부담 완화에 방점을 찍었다.
EU 의회는 지난 11월 CSRD 적용 대상을 ‘직원 1750명 이상 및 매출 4억5000만유로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는 옴니버스 패키지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초기 집행위 안(직원 1000명 기준)보다 대폭 완화된 것으로, 옴니버스 도입 전과 비교하면 약 90%의 기업이 보고 대상에서 제외되는 수준이다. 옴니버스 패키지 최종안은 이사회·집행위와의 3자 협상을 거쳐 이르면 12월 중, 늦어도 내년 초에는 최종안이 발효될 것으로 전망된다.
옴니버스 패키지 협상결과에 따른 CSRD 적용 범위 논의와는 별개로 보고의 기준이 되는 ‘ESRS 개정안’은 확정된 최종안이다. 이번 ESRS 확정안은 단순히 공시 양을 줄인 것을 넘어, 보고 체계의 ‘현실화’와 ‘유연성 확대’라는 명확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기업담당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핵심 변화와 시사점을 정리해 보았다.
구조의 단순화: 중복 제거와 일반 공시의 통합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시 구조의 효율화다. 기존의 최소 공시 요구사항(MDR) 이 일반 공시 요구사항(GDR) 으로 재편되면서, 정책·조치·목표(PAT)에 대한 공통 원칙이 ESRS 2(일반 공시)로 통합되었다. 과거에는 주제별 표준마다 정책과 목표를 반복해서 기술해야 했으나, 이제는 ESRS 2에서 핵심 원칙을 한 번만 설명하고, 개별 주제에서는 해당 이슈 고유의 데이터만 다루면 된다. 또한, 기업에 특정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관련 정책이나 조치가 없다면 없다고만 밝히면 되며, 부재 사유나 향후 계획을 설명할 의무도 사라졌다.
데이터 수집의 유연성: 완벽한 실측 대신 합리적 추정 명시적 허용
데이터 수집, 특히 밸류체인 데이터 확보에 대한 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기업은 공급망 전반에서 완벽한 실측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과도한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직접 데이터를 얻기 어렵거나 비용이 과다한 경우, 합리적이고 입증 가능한 추정치나 업계 평균 데이터 등 프록시 데이터 사용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이는 추정치 사용을 예외가 아닌 일반적인 방법론 으로 인정한 것으로 기업은 데이터의 한계와 출처, 추정 방법론을 명확히 밝히면 공시 의무를 충족할 수 있다.
중대성 평가: 범위 설정 및 평가 프로세스의 자율권 확대
중대성 평가는 기업의 공시 이슈를 결정하는 필터로서 역할은 강화되었으나, 그 실행 방식에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부여되었다. 개정안은 기업들에게 틀에 박힌(boilerplate) 방법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기업은 자체적인 실사 결과, 섹터 벤치마크, 과학적 데이터, 이해관계자 참여 결과 등 기업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투입 요소를 유연하게 선택하여 평가에 활용할 수 있다. 공시는 이러한 선정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보고 범위 설정 의 유연성이다. 원칙적으로는 연결 재무제표 범위와 가치 사슬을 포괄해야 하지만, 개정안은 ‘중요한 동인(Significant driver)’ 개념을 도입하여 기계적인 합산 의무를 없앴다. 즉, 연결 대상 자회사라 할지라도 특정 이슈의 발생에 기여하는 바가 미미하다면 해당 지표 산출 범위에서 제외할 수 있다. 가치 사슬 역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확보가 어려운 경우, 부분적 보고 경계 를 적용하여 데이터가 확보된 1차 협력사 등으로 범위를 한정하는 것도 허용된다. 단, 이 경우 기업은 제외된 범위와 그 사유를 명확히 공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기업은 이슈별 관련성에 따라 평가 범위를 달리 설정하는 효율적인 접근도 가능하다.
재무적 영향 공시: 정성적 설명 의 허용
기후 변화 등의 리스크를 화폐 가치로 환산해야 했던 예상되는 재무적 효과 공시 의무도 현실화되었다. 개정안은 (a) 효과를 분리하여 식별하기 불가능하거나, (b) 측정 불확실성이 너무 높은 경우, 그리고 (c) 기업 내부의 기술, 역량, 자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정량적 수치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했다. 대신 기업은 해당 위험이 재무제표의 어떤 항목에 영향을 미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정성적 공시로 이를 갈음할 수 있다.
검증 부담의 합리화와 검증표준 제정
마지막으로 옴니버스 패키지는 기업의 검증 부담을 대폭 완화했다. 기존의 합리적 확신 도입 의무화 계획을 폐기하고, 당분간 제한적 확신 수준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2026년 10월까지 EU 공통 검증 표준을 제정하여 검증 품질의 일관성을 확보할 예정이다. 지속가능성 보고서 검증의 경우 회계 및 재무지식도 필요하지만, 환경·사회 분야 특유의 기술적 요소와 비재무 지표에 대한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별도의 전문성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별도 표준 제정은 이러한 종합적 역량의 기준을 수립하고, 실무 역량을 갖춘 다양한 전문기관이 검증에 참여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검증 품질 제고와 시장 경쟁을 통한 검증 비용 합리화를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풀이된다.
공시 제도의 성공 열쇠, ‘완벽한 체계’가 아닌 ‘작동 가능성과 실행’
이번 ESRS 개정과 옴니버스 패키지는 ‘완벽한 체계’보다 ‘작동 가능한 시스템’을 우선하는 실용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는 EU가 ESG 규제의 끈을 놓은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포괄성과 현실적인 기업 역량 사이의 괴리를 좁혀 규제의 이행력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과도한 데이터 수집이나 복잡한 산식에 매몰되기보다, 기업이 당면한 리스크를 재무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실질적 관리 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ESG 공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투명성을 기반으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완벽한 데이터 세트보다는 진정성 있는 노력과 소통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실질적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 역시 초기부터 완결성을 요구하기보다 단계적 도입과 유연한 설계가 필요하다. 국제기준 제정기구가 마련한 외부 규범을 그대로 적용하는 방식은 산업 구조, 기업 역량, 데이터 인프라와의 불일치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형식적 준수에 치우치기보다 기업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고, 국내 여건을 반영한 제도 설계를 통해 규제의 실효성을 높일 때 지속가능성 공시는 시장과 사회 모두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선경 상무는
이선경 켐토피아 ESG전략실 이선경 상무는 신한증권과 대신증권에서 채권 크레딧 애널리스트와 주식 애널리스트를 거쳐 CJ경영연구원과 CJENM, CJ제일제당 등에서 전략기획, 재무전략/IR 팀장, 대신경제연구소에서 ESG센터장을 역임했다. 2024년 설립한 ESG공시 및 공급망 컨설팅 기관인 그린에토스랩이 켐토피아에 흡수되어 ESG-EHS를 연계한 플랫폼 개발 및 ESG정책 및 규제 대응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이선경 상무는 국민연금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대형금융기관의 ESG모델 및 ESG적용 프로세스 구축, ESG 평가 등을 장기간 수행했고, 정부 기관의 공급망 ESG플랫폼 구축, 환경DB분석 및 산업별 환경성 평가체계 수립하는 등 국내외 ESG 정책 규제 연구 및 ESG 체계 구축 실무 경험을 보유한 ESG 전문가이다. 다수의 정부 기관 및 에너지 유관기관에서 ESG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