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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왕의 금고 훔쳐 명문가 일으킨 윌리엄 캐번디시

왕의 금고 훔쳐 명문가 일으킨 윌리엄 캐번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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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만나는 능신(能臣) 의 초상 1505년경, 잉글랜드 서퍽주의 평범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 1505~1557)는 영국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 데번셔 공작 가문의 시조다. 그러나 그의 출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숫자에 밝은 재능과 권력의 향방을 읽는 탁월한 눈치를 무기로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올랐다. 역사는 그를 왕의 뜻을 완벽히 수행한 능신 (能臣)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대의 혼란을 틈타 사익을 챙긴 기회주의자 라 평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그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종교개혁 이라는 대전환기가 현재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격변기와 기이할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캐번디시는 영국의 궁정 신하이자 베스 오브 하드윅의 두 번째 남편이며 데번셔 공작 가문의 조상이다.(위키피디아) 수도원 해산, 국가적 재편과 비공식 수수료 의 시대 1530년대,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잉글랜드 내 모든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는 이른바 위대한 사업 을 단행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부(富)의 재편이었다. 이 과정에 윌리엄 캐번디시는 토머스 크롬웰의 휘하에서 실무 감사관으로 발탁되어 전국을 누볐다. 그의 임무는 수도원의 자산을 파악해 국고로 귀속시키는 것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그는 막대한 개인적 이득 을 취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당시 관료 사회에서 공무수행 중 챙기는 이득은 일종의 관행 으로 치부되었지만, 캐번디시의 축재 속도는 남달랐다. 그는 수도원 부지를 헐값에 매입하거나 감사 과정에 장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자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갔다. 이는 공공의 자산이 사적 영역으로 이전되는 과정에 발생하는 권력형 부패 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더비셔에 있는 채츠워스 하우스는 캐번디시가 건축을 시작했다.(위키피디아) 생존의 기술, 세 번의 결혼과 베스 오브 하드윅 캐번디시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그의 세 번째 결혼이다. 1547년, 그는 당대 최고의 여장부이자 사업가였던 베스 오브 하드윅 (Bess of Hardwick, 1527경~1608)과 혼인한다. 베스는 남편의 재력을 자신의 고향인 더비셔로 집중시켰고, 두 사람은 1552년 영국 건축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채츠워스(Chatsworth) 하우스 건설에 착수한다. 이들의 결합은 단순한 애정관계를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십 이었다. 헨리 8세에서 에드워드 6세, 그리고 ‘피의 메리 1세’로 이어지는 공포와 변덕의 정치환경 속에서도 캐번디시가 목숨을 보전하며 가문을 일궈낸 것에는 베스의 냉철한 판단력이 큰 몫을 했다. 이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풍랑이 닿지 않는 지방에 견고한 경제적 요새를 구축하는 영민함을 보였다.   캐번디시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그의 세 번째 결혼이다. 1547년, 그는 당대 최고의 여장부이자 사업가였던 베스 오브 하드윅 (Bess of Hardwick 1527경 – 1608)과 혼인한다. (위키피디아) 몰락의 위기와 기막힌 퇴장 권세가 영원할 것 같던 1557년, 캐번디시에게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왕실 재무관(Treasurer of the Chamber) 재직 당시의 회계 부정이 발각된 것이다. 감사 결과, 국고에서 사라진 돈은 5000 파운드 이상이었으며, 이는 현재 가치로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추밀원의 조사가 눈앞에 닥치자 그는 정의보다 자비가 앞서기를 바란다 는 탄원서를 남긴 채 1557년 10월 25일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가문 입장에서 보면 기막힌 타이밍 이었다. 당사자가 사망함에 따라 형사 처벌은 불가능해졌고, 남겨진 부인 베스는 끈질긴 협상 끝에 국고 채무 문제를 정리하며 가문의 파멸을 막아냈다. 죽음이 오히려 가문을 지켜낸 셈이었다.   캐번디시가 소유한 영국 더비셔에 있는 볼소버(Bolsover) 성.(위키피디아) 역사의 아이러니, 부패의 토양에서 핀 문화와 과학의 꽃 윌리엄 캐번디시의 삶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구석이 많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영국 역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가문의 번영: 그의 후손들은 데번셔 공작가가 되어 명예혁명을 주도했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았다. 과학적 성취: 훗날 수소를 발견하고 지구의 밀도를 계산한 천재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바로 이 가문의 직계 후손이다. 부패로 쌓은 부가 수백 년 뒤 인류의 지적 지평을 넓히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문화유산: 그가 짓기 시작한 채츠워스 하우스는 현재도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영국의 보물로 남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부조리한 과정이 뜻밖의 긍정적인 결과물로 이어지는 역사의 간계 를 여실히 보여준다.   볼소버 성.(위키피디아)  오늘 한국사회에 던지는 생각할 거리 윌리엄 캐번디시의 이야기는 500년 전 잉글랜드의 먼지 쌓인 기록이 아니라, 오늘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첫째, 관행 이라는 이름의 괴물: 캐번디시가 수도원 재산을 챙길 때 내세웠던 논리는 남들도 다 한다 였다. 우리 사회 역시 공직윤리나 기업경영에서 관행 이라는 이름으로 탈법을 정당화하는 모습이 여전하다. 관행이 제도를 잠식할 때 사회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둘째, 구조조정기의 공정성: 국가 주도의 대규모 재산 이전(수도원 해산) 과정에 감사관이 사익을 챙긴 행태는 오늘날 공기업 민영화나 대규모 국책사업 과정에 발생하는 이권개입과 닮았다. 투명한 감시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대전환기는 언제나 캐번디시 같은 인물들에게 기회가 된다. 셋째, 책임 없는 퇴장 의 문제: 수사 도중 사망하거나 재판이 지연되어 진실이 묻히는 사례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캐번디시의 죽음이 가문을 구했듯, 우리 사회에서도 책임자가 사라짐으로써 구조적 부조리가 은폐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넷째, 베스 의 생존력: 남편의 과오와 부채 속에서도 가문을 재건한 베스 오브 하드윅의 집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제도가 흔들리고 시대가 혼탁할수록 자신의 영역을 끝까지 지켜내고 유산을 일궈내는 개인의 의지는 역사를 전진시키는 동력이 된다.   볼소버 성과 비너스 분수대.(위키피디아) 기록이 있는 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윌리엄 캐번디시는 성공한 관료이자 위대한 가문의 시조로 기억되길 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자손들은 번창했고 그가 세운 저택은 건재하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화려한 저택 뒤에 숨겨진 횡령 장부와 수도원 해산의 눈물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명확하다. 권력은 짧고 기록은 길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부를 쌓고 책임을 회피할 수는 있어도, 후대의 준엄한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윌리엄 캐번디시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오늘 쌓고 있는 유산은 500년 뒤 어떤 이름으로 불릴 것인가?   볼소버 성에서의 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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