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㊳] 가온꼭지와 벼릿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늘의 맨꼭대기와 땅의 맨꼭문이를 앎.
땅의 맨꼭문이와 하늘의 맨꼭대기를 봄.
비롯도, 이로 비롯오 마치기도 이에 맟.
- 다석 류영모, 『다석일지(1권)』(홍익재,1990), 1959.5.28.
그림 1) ‘다뉴세문경’은 모든 ‘있꼴’의 한 긋이자 ‘이제 여기’를 콕 찍는 ‘가온꼭지’로 볼 수 있다. 거울 가온데 고리는 나라는 것의 한 긋”인 가온찍기인 것이다. 여기서 뻗어 나가는 수만 개의 자잘한 선들은 하나가 풀려 셋을 이루되 밑둥은 하나인 ‘한푸리셋가장’의 이치를 드러낸다. 이는 바탈(性)이 결코 쪼개지지 않는다는 ‘한꼴’의 천둥 같은 선언이자, 찰나를 사는 ‘오늘살이’의 시퍼런 서슬을 보여주는 벼릿줄이다.
다석 류영모의 한글 알맞이(哲學)는 그동안 바다를 건너 온 낡은 ‘있꼴말(存在論)’, 그리고 언제나 짝꼴로 쪼개서 빗대는 ‘검님갈(神學)’을 밑뿌리부터 뒤집어엎는다. ‘있’을 뜻으로 가진 한자는 존재유(存在有)다. 존재는 ‘있는 꼴’로 ‘있꼴’이요, 론(論)은 ‘말하다’의 뜻이니, 존재론은 ‘있꼴말’이겠다. 우리말에서 신(神)은 ‘검’이다. 이글에서는 높이어 ‘검님’이라 하였다.
넘어 온 말들은 쪼개고 갈라치기 한 짝꼴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셋서한몸(三位一體)’이라 하지만 그 셋은 ‘서로 다른’ 한몸(一體)이다. 나타난 난꼴(現存)의 투를 달리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 아니나, 세 검님을 ‘하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천부경(天符經)의 ‘한푸리셋가장(一析三極)’과 다르다. 천부경은 하나가 풀린 뿌리 셋이 가장이라 말한다. 밑둥은 오롯이 하나다. 그 하나가 풀려서 셋을 이룬다. 바탈(性)이 결코 쪼개진 게 아니다. 그래서 다석은 하나가 쪼개지거나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우리에게는 늘 한꼴의 말이 있어 왔다. 이런 말들은 앞뒤가 없어 때도 하나다. 보라. ‘여닫다’, ‘오가다’, ‘나들다’, ‘오르내리다’, ‘끄트머리’…. 이런 말들은 한꼴의 ‘여닫’이요, 한꼴의 ‘오가’요, 한꼴의 ‘나들’이요, 한꼴의 ‘오르내리’요, 한꼴의 ‘끄트머리’다. 한가지로 한때(同時)에 일난다. 그러니 쪼개지지 않는다”는 다석의 말은 집집 우주를 놀래키는 천둥이다. 우리 말글에 검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다석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수운 최제우는 온누리가 꽉 막혀서 다섯 잘해(5萬年)의 하늘 돎 때를 ‘다시 개벽’으로 뒤엎어 맞추었으나, 다석은 본디 한 돎일 뿐이라고 으르렁거렸다. 하늘 돎 때를 운수(運數)라 하는데,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이 그것이다. 하늘이 정한 운수를 말한다. 수운은 하늘이 정한 때가 다 되어 다시 열어야 한다고 했다. 그 때를 오만년(五萬年), 곧 다섯 잘해라 한다. 물론 수운이 던진 ‘다시’는 새로 솟구치게 하는 ‘거듭남’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다석의 ‘하나’는 입에 발린 빈 말이 아니다. 그이는 오늘살이로 몸맘얼을 꿰뚫었다. 나날로 새 나를 내고 새 나를 낳는 이제살이, 지금살이, 하루살이였다. 이제 여기를 사는 이에게 ‘때’란 늘을 타고 가는 서슬일 뿐이다. 늘 나를 내고 낳는 가온찌기다. 돎 가온데를 콕 찍어야 ‘찌기/지기’가 될 수 있을 터!
다석은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가온찍기이다. 이것이 나가는 것의 원점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이다.”(다석어록)라고 찍었다. 그 콕 찍어 말하는 이 외침은 시퍼런 서슬이다. 잘 벼려진 서슬이 지금 여기다. ‘쪽’이 없다. ‘때’도 없다. 늘 하시는 하나로 돌아가는 ‘ᄒᆞᆫ’이 계실 따름이다. 그것이 다석 알맞이의 가온꼭지다.
이 글은 다석 알맞이의 밑둥을 다섯 개의 큰 가지로 갈무리해 본 것이다. 밑둥이 벼리라면 다섯 큰 가지는 벼릿줄이다. 이제 이 벼릿줄을 꿰어보자.
그림 2) 가온찍기의 눈길은 이제 하늘로 옮겨져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끝없는 빈탕으로 넓어진다. 다석에게 하느님은 ‘꼴’에 갇힌 ‘있꼴’이 아니다. 잘몬을 살아 있게 하는 ‘빈탕’이다. 천문도의 별과 별 사이 드넓게 비어 있는 곳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낌새로 느껴지는 ‘없이 계시는 얼’의 자취다. 돌 위에 새겨진 별점들은 우주의 가온찍기다. 그 텅 빈 바탕은 온갖 잘몬(萬물)을 내고 기르는 ‘검얼 ᄋᆞᆷ’의 숨결이다.
하나. 하느님은 ‘있꼴’의 검님(神)이 아니라, ‘제꼴’을 가능케 하는 ‘빈탕(虛空)’이다.
바다 건너에서 무르익은 ‘검님말(神論)’로 들어가면 종종 길을 잃는다. 길이 여러 갈래여서다. 게다가 그들은 검님(神)을 가장 훌륭하고 큰 ‘있꼴님(存在者)’으로 바꿔서 오랫동안 저 하늘 꼭대기에 앉혀 놓았다. 그래 놓고는 그 검님이 내려올 때만을 기다린다. 검님도 그 아들로 났던 예수도 이 땅에 있지 않다. 예서 숨 쉬지 않는다. 예수는 예 숨이 아니다.
참 어이가 없다. 하늘 꼭대기에 앉아 계시는 ‘있꼴’이라니. 아니, 그리고 검님이 어떻게 ‘있꼴’이란 말인가? 다석은 ‘있꼴’로 따위로 계시는 ‘헛꼴(偶像)’을 깨부수었다. 신(神)은 본디 이름이 없다. 신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신에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라고 말한 까닭이 예 있다. 그는 말씀으로 예서 숨 쉬었다. 그래서 말씀으로 쉬는 말숨이라 했고, 말숨에 솟아나는 말슴이라 했다. 말씀-말숨-말슴”의 꿍꿍이는 그이가 날마다 틔워낸 사슴뿔 생각이었다.
다석에게 하느님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그래서 눈길로 뚜렷하게 가리킬 수 있는 그런 남다른 ‘있’이 아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웬통 하나는 빈탕(虛空)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늙은이(老子)도 14월에 보아 못 보니 이르자면 뭖/ 들어 못 들으니 이르자면 뭟/ 쥐어 못 스리금 이르자면 뭗ㅎ”이라면서 이 셋은 따져서 될 게 아니라 했다. 왜냐하면, 웬통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 하느님은 우리가 가진 눈·귀·코·혀·맨지로 알아 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빈탕은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낌새다. 다석은 우리는 쉽게 있다는 존재로 허공을 알아서는 안 된다. 허공은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수학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가없이 크고, 밑없이 깊고, 끝없이 높은 집집 우주는 텅 빈 바탕일 뿐이다. 온갖 잘몬(萬物)을 내고 낳고 기르는 빈탕의 텅 빈 속알이요, 산알이요, 살알이고, 씨알이다. 한 마디로 ‘ᄋᆞᆯ’이다. 늙은이(老子)는 이를 ‘감ᄒᆞᆫ (玄牝)’이라 했다. ‘감ᄒᆞᆫ’은 ‘감다’와 ‘크다’를 더한 말이다. 감아돌아감이 크다는 뜻이다. ‘까마득하다’는 말이다. ‘’은 ‘암컷’, ‘수컷’할 때의 암수에는 끝소리에 반드시 히읗이 붙어야 한다. 히읗이 있어서 ‘것’이 ‘컷’으로 바뀐 것이다. 다석은 이렇게 숨어 있는 숨은 히읗(ㅎ)을 되살려 썼다. 그 히읗에 검의 숨결이 있기 때문이다. 까마득히 숨돌리는 ‘검얼 ᄋᆞᆷ’이라는 이야기다. ‘검얼’은 신령(神靈)이다. ‘ᄋᆞᆷ’은 엄마를 이르는 옹알이다.
다석에게 검님(神)은 있는 꼴의 그 무엇이 아니다. 모든 ‘있꼴’이 비로소 움쑥불쑥 솟구치고 돌아가게 하는 ‘짝없(絶對)’의 한바탕, 곧 빈탕한데다. 끝없고 가없고 밑없이 늘 ‘없이 계시는 얼’이다. 다석은 말한다. 신(神)이 없다면 어때. 신(神)은 없이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신(神)은 언제나 시원하다. 신(神)은 육체가 아니다. 영(靈)이다. 얼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그림 3) 김홍도의 ‘무동(舞童)’에서 빈탕을 가르며 도약하는 아이의 힘찬 몸짓은 몸나(肉身)를 잊고 얼나로 솟구치는 ‘나없(無我)의 춤’이자, ‘빈탕’을 우주 숨결로 가득 채우는 ‘숨돎’의 마당이다. 가온뎃자리(ㅁ)에서 비읍(ㅂ)의 숨으로 싹이 돋듯 뻗어 나가는 한삼의 굽은 선은 업(無)과 잇(有)이 하나로 갈마드는” 산알의 가온찍기를 보여준다. 이 그림의 빈 곳은 아무것도 없는 ‘안있(不在)’의 자리가 아니라, 모든 ‘있’을 솟구치게 하는 못다 할 밑둥”으로서 눈부신 ‘없(無)’ 참꼴이다.
둘. 없(無)은 ‘안있(不在)’지 않고, 온통 가득 찬 빔이다.
다석이 날마다 크게 울부짖은 ‘없(無)’은, 바다 건너 사람들이 말하는 ‘없자리’가 아니다. 다 써서 바닥난 없자리, 산알도 없이 쓸쓸한 없자리, 숨이 없어 숨 쉴 수 없는 그 따위 없자리가 아니다. 숨빛 하나 없이 쓰러진 없자리는 죽은 자리다.
우리말 ‘없’의 참뜻은 ‘업’과 ‘잇’이 하나로 갈마듦에 있다. ‘없’은 업+잇”이다. 닿소리 ㅁㅂㅍ”는 다섯 행길(五行)에서 흙(土)의 자리다. 가온뎃자리! 한 가온데를 도는 숨빛은 미음(ㅁ), 한 가온데에서 솟는 숨빛은 비읍(ㅂ), 한 가온데에서 퍼지는 숨빛은 피읖(ㅍ)이다. 미음은 열린 데로 다 고루 번지는 시방세계(十方世界) 글꼴이다.
그러니까 비읍 ‘ㅂ’은 미음 ‘ㅁ’에 위아래로 싹이 돋은 꼴이다. 불, 비, 빔, 빗, 빛, 봄, 붐 따위를 보라. 비읍이 든 말들은 솟고 돋는 뜻이 숨어 있다. 비읍이 끝소리에 든 ‘업(無)’도 그렇다. ‘ㅂ’이 춤을 추어 ‘나없(無我): ᄋᆞ’에 든 글꼴이다. 본디 없(無)과 춤(舞)은 한 뿌리 말이다. ‘나없’에 든 춤에 ‘없’이 솟는다.
‘잇(有)’은 어떤가. 끝소리 시읏 ‘ㅅ’도 솟고 자라고 치솟는 뜻이다. 그래서 ‘이’가 줄곧 이어 잇는다. 이렇게 보면 ‘없’이라는 글꼴은 이미 ‘없(無)’도 있고, ‘있(有)’도 있다. ‘있없’에 ‘없있’이 한꼴로 돌아간다. 없이 있어 한꼴이다. 반짝반짝 번쩍번쩍. 환한데 컴하고 컴한데 환하다. 싱싱한 집집 우주의 숨결이 담겨 있지 않은가.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빈탕(虛空)’을 풀어 말하기를 한울은 얼굴과 바탕도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우아래와 넷녘도 없고. 겉은 황-(虛虛)하며 속은 텡-(空空)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라고 하였다. 있지 않은 데가 없고 싸지 않은 것이 없는 오롯한 ‘숨돎(氣運)’이다. 빛숨에 숨빛이 반짝이며 돌아간다. 그것으로 가득 가득 차 있다. 참이란 허공밖에 없다. 없어야 참이다. 있는 것은 거짓이다.”(다석어록) 따라서 다석의 ‘없’은 모든 ‘있’를 솟구치게 하는 못다 할 밑둥(無盡本)”이며, 끝없이 숨돌리는 얼의 속알이다. 가득 들어찬 ‘빔’이요, 싱싱하게 펄떡이는 우주 숨결이다.
그래서 다석은 없(無)을 내가 말하는데 수십 년 전부터 내가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머리가 맘대로 트이지 않았다. 나는 없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에서 무극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라고 말했다. 눈부시지 않은가!
그림 4)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The Trinity)’이다. ‘셋서한몸(三位一體)’는 쪼개인 짝꼴이다. 그들은 각자 서로이면서 하나다. 천부경의 ‘한푸리셋가장(一析三極)’에는 ‘서로’가 없다. 본디 하나일 뿐. 루블료프의 이콘은 세 천사가 한 동그라미 얼개 속에 녹아들어 있어, ‘온통 하나’의 검님 바탈을 그림으로 그려낸 최고의 걸작이다. 세 검님 사이의 빈 곳은 가득 찬 빔”을 뜻한다.
셋. 참나(眞我)는 ‘없이 있는 나’고, 몸소 느끼는 그 낌새에 벼락 깨움이 솟는다.
다석은 빛보다 빠른 나만이 참나다”라고 꾸짖었다. 내가 나라고 내세우며 버티는 살덩어리는 몸나(肉身)다. 고픔에 찌들고 성냄으로 어리석은 맘나는 ‘제나’다. 그것들은 흙 한 줌으로 돌아갈 거짓 목숨이다. 그런 몸나로는 ‘몸성히’할 수 없다. 그런 맘나로는 ‘맘놓이’도 할 수 없다. 나는 본디 없이 있다. 없는 나를 찾을 까닭이 있을까? 그러니 ‘나’ 따위를 내세우지 않아야 몸맘(뫔)이 바로 선다. 다석은 이를 ‘올바로’라고 하였다. ‘나’가 아니라, 차라리 ‘올’이라고 해야 옳다.
참나는 텅 빈 빈탕에 ‘없이 있는 나’다. 다석은 맘과 허공은 하나라고 본다. 저 허공이 내 맘이요, 내 맘이 저 허공이다. 맘하고 빈탕이 하나라고 아는 게 참이다. 빈 데 가야 한다.”라고 가리켰다. 그러므로 다석에게 검님을 만나는 일은 우연히 밖에서 마주하는 허울이 아니다. 사람들이 ‘신비 체험’이라고 떠들어대는 ‘야믄꼴(妙相)’도 아니다. 여기 ‘예’가 아니라 저기 ‘졔’에만 계시는 ‘있꼴님’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들은 ‘졔’에 뛰넘어 계시는 그이를 ‘초월자(超越者)’라고 호들갑을 떤다. 맘하고 빈탕이 하나”인데 뛰넘어 계시는 ‘졔’라니 말이 되는가? 도대체 ‘예’를 어찌 보고 그 따위 말을 하는가?
늘 ‘솟나라’, ‘솟구치라’, ‘오르라’, ‘올라라’, ‘죽어라’, ‘거듭나라’고 외친 다석의 생각은 ‘예’에 ‘졔’가 깨어나길 바라서다. 좀나(小我)를 깨고 큰나(大我)로 솟으란 이야기다. 제나가 죽어야 얼나가 사는 까닭이다. 오직 예에 졔가 계실 따름이다. 예에 울리는 졔다. 졔가 깨어야 예가 늘이다.
다석은 ‘ᄋᆞᆷ’의 끝소리 미음에 ‘졔계’를 써 넣은 글꼴을 남겼다. 이응에는 둥그름을 써 넣었고 말이다. 옹알이로 내뱉는 첫비롯의 ‘ᄋᆞᆷ’은 참나의 소리다. 옹알이하는 아이 ‘ᄆᆞᆷ’에 계시는 하늘숨() 자리가 곧 ‘졔계’다. 어디 저 멀리 높은 데 있는 ‘졔계’가 아니다. ‘ᄋᆞᆷ’이 울리는 ‘ᄆᆞᆷ’의 하늘숨 자리는 뛰넘는 곳이 아니다. 깨어나는 자리다. 가온찍기 자리다. 그래서 다석은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라고 으르렁거렸다. 이 말은 무서운 말이다. 두려움에 떨어야 하리라. 뒤흔들려야 하리라.
저 스스로 검님을 몸소 겪는 일은 얼나의 ‘긋’이 산알로 터지듯 ‘졔계’가 솟구치는 일이다. 저절로 깨어남이다. 그야말로 스스로가 저절로 일났다. 일났으니, 속에 없이 계시는 검님이시오, 그런 검님의 숨결로 번쩍이는 ‘한ᄋᆞ’다. 참나의 씨ᄋᆞᆯ인 ‘ᄋᆞ’를 깨고 캔다. ‘ᄋᆞ’는 참나의 씨알이다. 다석은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보아도 결국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심판도 아무것도 없다. 깨는(覺) 것이다. 깨는 것, 이것은 하나이다. 한(天) 나(我)가 하나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그 한나가 ‘한ᄋᆞ’다. ‘ᄋᆞ’로 숨돌리라. 숨으로 밀어 믿어지면 밑을 터 솟는다. 물어 묻는 검님은 숨돎에 터지고 솟구친다. 그 자리에 날벼락이 친다!
그림 5)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가 1513년경 제작한 목판화 ‘주님의 변모’이다. 굳센 빛으로 둘러싸인 예수과 두 예언자, 그리고 놀라움에 엎드린 제자들을 나타냈다.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몸뚱이는 아리따운 거짓”이며 이를 사르고 얼나로 솟구치는 뒤바뀜”을 가장 완벽하게 형상화한 이콘이다. 산 정상에서 예수의 옷과 얼굴이 눈부신 빛으로 바뀌는 모습은 제나의 고픔을 끊어내고 ‘얼나’가 선 순간의 날벼락 같은 깨달음이다. 예수 뒤편의 둥근 빛(Mandorla)은 장식이 아니라, 신성한 빈탕과 하나가 되어 녹아드는 ‘한꼴’을 보여준다.
넷. 꿰뚫움(一以貫之)은 몸나를 사르고 환빛 오르내리는 빈탕 길이다.
다석에게 ‘검님갈(神學)’은 머리로만 따지는 일이 아니다. 숨빛 하나로 몸맘얼을 꿰뚫는 오늘살이다. 피눈물까지는 아니어도 아주 어렵고 고된 일이다. 날마다 닦아 익혀 솟날지라도 ‘닦아남(尙賢)’에 매여서도 안 되는 일이니, 참으로 어이 없고 쓸데 없고 덧없는 일이다. 늙은이는 3월에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 씨알이 다투지 않게.”라고 했다. 나날이 꿰뚫어 차는 ‘참(眞)’은 어이가 없어야 하고, 쓸데가 없어야 하고, 덧이 없어야 한다. 그 자리에 솟는 숨이 싱싱하게 가득 찬 ‘비(虛)’다.
우리 몸뚱이는 아리따운 거짓이어서 스스로가 제 몸뚱이를 ‘몸성히’로 갖추어야 참나인 얼나로 솟는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로 이어지는 다석의 꿰뚫기는 탐내고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아주 밑바닥까지 싹 다 사르는 길이다. 몸나는 ‘고픔’을 싹 끊어내야 한다. ‘몸성히’는 이것저것에 쏠리는 고픔을 싹 끊어낼 때만이 맑아진다. 그런 뒤에야 ‘맘놓이’로 밑을 터 열 수 있다.
몸성히에 맘놓이가 한꼴로 돌아가면 비로소 놀라운 ‘님’의 뒤바뀜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뫔’으로 한꼴이 되면, 하나인 빈탕이 나를 차지할 것이고 빈탕을 차지한 얼이 바로 설 것이다. 이제 나는 얼나다. 제나는 비었고 그 자리에 얼나가 섰다. 뒤바뀜이다. 텅 비워져 오롯한 ‘없(無)’이 되면 끝없이 큰 빈탕이 나를 삼키고, 더불어 내가 빈탕을 크게 품어 숨돌린다. 나와 빈탕이 또한 한꼴이다. 나는 빈탕이다. 저 허공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저 허공이다. 마음과 빈탕이 하나라고 하는 게 참이다.”(다석어록)
나는 집집 우주다. 나는 ‘까마득’이다. 나는 까마득하게 돌아가는 빈탕 길이다. 다석은 우주가 내 몸뚱이다. 우리 아버지가 가지신 허공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들어가야만 이 몸뚱이는 만족한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허공이 우리 몸뚱이가 될 수 있다.”라고 큰 눈으로 밝혔다.
그림 6) 심우도(尋牛圖) 가운데 열 번째 그림 ‘입전수수(入纏垂手)’이다. 그림을 고른 까닭은 이 그림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빛숨을 나누는 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참나)를 찾아 떠난 아이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빔(空)’의 징검다리를 지나, 다시 저잣거리로 나와 뭇사람을 돕는 마지막 모습니다. 나와 빈탕이 한꼴”이 된 뒤 다시 오늘살이”로 돌아와 숨빛을 꿰뚫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명의 깨달은 이가 뭇사람과 섞여 하나가 되는 모습은 하나다 다하나”라는 ‘빛숨갈’을 보여준다.
다섯. 검님갈(神學)은 하나로 뚫려 가온 ‘빛숨갈’이다.
바다 건너 ‘검님갈(神學)’은 검님을 ‘밖(外)’에 두고 사람은 ‘않(內)’에 두었다. 서로 마주 보는 ‘ᄃᆞᆯ낯 쪽꼴(相關-對象)’에 아주 큰 ‘믿(信)’을 두었다. 지금도 그렇게 머물러 있다. 서로 마주보는 ᄃᆞᆯ낯은 상관(相關)를 말한다. 서로가 한쪽씩 나눠 가진 쪽꼴이다. 홀로가 아닌 ‘서로’는 반드시 쪽꼴이다. 하나가 아니다. 이쪽과 저쪽을 가졌다. 그러니 사람들은 ‘않’이 아니라 저 어딘가 ‘밖’에 계시는 검님을 애타게 찾아 헤맨다. 속에 검님은 없고 제나만 가득하다.
다석은 영혼이 있느냐, 한아님이 있느냐, 마귀가 있느냐고 하는데 그런 것은 다 객관적인 생각이요, 육체적인 생각이다.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다. 몸이 아니라 맘이다.”(다석어록)라고 했다. 그런데도 건너 사람들은 검님이 늘 저 꼭대기에만 계신다고 찾는다. 참 우스운 꼴이다. 수운은 저마다의 사람이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을 모셨기에 사람을 가리킬 때는 ‘모신하나님(侍天主)’이라 하였다. 사람은 이미 ‘모신하느님’ 그 스스로다. 시천(侍天)은 ‘하나님을 모시다/모신다’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말은 바다 건너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모신하나님’이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요, 검님이다. 해월 최시형도 그리 말했다.
‘밖’에서 ‘않’으로 받아들이는 ‘모심’은 하느님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계시다. 그 바깥의 밖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석이 ‘ᄃᆞᆯ낯 없다’라고 말한 까닭이다. 검님과 나는 마주 서 있는 ‘ᄃᆞᆯ낯’이 아니다. 모심은 바깥의 검님을 ‘않’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다. 검님에게 안팎 따위가 어딨나? 다석이 우주 안팎의 전체인 하나의 절대자(絶對者)가 하느님이다. 얼로 충만한 허공인 이 우주가 그대로 하느님이시다.”(다석어록)라는 으르렁에 깨어나야 하리라!
쪼개진 자리에는 검님이 계시지 않는다. 검님은 여기저기거기, 어디에나 오롯이 다 계신다. 스스로가 모두 다 검님이시다. 하나다(一卽多), 다하나(多卽一)”라는 말에 한올(一理)이 있다. 저절로 제 가온데로 숨돌리며 계시는 집집 우주가 큰 일이다. 그야말로 날마나 일난다. 일나서 일났고 일난다. 참으로 크고 큰 일남이다. 하늘숨이 돌아가는 가온찍기에 ‘모신하나님’이 계신다. 다석의 ‘검님갈’은 하늘(ㄱ)에 땅(ㄴ)이, 땅에 하늘이 한꼴로 돌아가는 가온데에 긋(ㆍ)으로 숨돌리는 온새미로 ‘빛숨갈(玄玄學)’이다. 까마득하지 않은가!
솟대를 세우며
다석 류영모는 온누리 사람들이 잃어버린 산알의 탯줄을 우리말의 깊은 밑바탕에서 벼락같이 캐내어 밝혔다. 검님은 안있지 않으며, 단지 ‘없이 계실’ 뿐이다. 낡은 이 세상의 허울과 껍데기 몸나에만 갇혀 헐떡이는 사람들에게 다석은 외친다.
참나를 틔워 솟구치라고!
속의 빈탕한데로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라고!
꽃부림의 ‘님낯(主觀)’이 두루 번지고,
우주 가온데로 숨돌리는 ‘가온찍기’하라고!
뒷하늘 여는 서슬 퍼런 산알 알맞이를 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