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맞선 청년 예수의 3년, 2000년 간 세상 뒤집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원전 6년에서 4년 사이, 팔레스타인 땅 베들레헴 혹은 나자렛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로마제국이 온 세상을 발아래 두던 시절, 식민지 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가 훗날 인류역사상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도, 장군도, 철학자도 아닌, 목수의 아들이. 참으로 역사는 예측불가능하다.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6세기 밀랍화 성상인 전능하신 그리스도 (위키피디아)
그는 누구였나? 목수의 아들, 불편한 진실을 말하다
예수(기원전 6~4년경 – 서기 30년 또는 33년)는 서른 살 무렵 공개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기간은 고작 2년에서 3년. 오늘날로 치면 인스타 계정 개설하고 팔로워 모으다가 갑자기 계정 정지당한 수준의 짧은 기간이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그가 한 말과 행동이 2천 년 넘게 인류의 뇌리에 박혔으니, 콘텐츠 파급력 하나는 역대 최강이라 하겠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던 이들과 어울렸다. 세리(稅吏,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자들로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창녀, 나병환자, 이방인. 당시 기준으로는 함께 밥 먹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재벌회장님이 용산 철거민,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밥상에 앉은 격이다. 상상이 되는가?
가우덴치오 페라리,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이야기, 프레스코, 1513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바랄로 세시아(VC), 이탈리아.(위키피디아)
그의 어록은 철저히 뒤집기의 철학이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이 발언들을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했다고 상상해 보라. 다음날 아침 종합편성 방송에서는 선동정치인 논란 이라는 자막이 붙었을 것이고, 경제지에서는 반(反)시장적 발언으로 주가폭락 우려 라는 기사가 쏟아졌을 것이다.
제라르트 반 혼토르스트 작, 목자들의 아기 예수 경배, 1622년.(위키피디아)
기득권과의 충돌, 성전(聖殿) 뒤집기 사건
예수 활동의 절정은 이른바 성전 뒤집기 사건 이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탁자를 뒤엎고 환전상들을 쫓아낸 이 사건은, 종교권력과 자본권력의 결탁에 정면으로 맞선 행동이었다. 당시 성전은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경제이권이 오가는 장터였다. 제사에 필요한 동물을 독점 판매하고, 성전세를 내기 위한 환전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착취구조였다.
대제사장 가야파(활동 시기 서기 18~36년)와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는 종교권력의 위선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나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
외식 (外飾)이란 겉치레, 즉 위선을 뜻한다. 오늘날 언어로 번역하면 언론에 나와서 서민 코스프레하면서 실제로는 다주택에 자녀는 외국유학 보내는 자들이여! 정도가 되겠다.
결국 그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기원전 20년경 – 서기 37년 이후, 재임 서기 26~36년)에게 넘겨져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서기 30년 또는 33년의 일이다.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집행할 수 없었던 최고 수치의 형벌로, 주로 반란을 일으킨 노예나 식민지 하층민 정치범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권력은 그를 가장 비천한 방식으로 죽임으로써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역사는 알다시피 그 반대의 결말을 맞이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십자가형 묘사, 1632년경.(위키피디아)
역사에 미친 영향, 한 목수 아들의 유산
예수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기원전 5년경 – 서기 62년 또는 67년경)은 그의 가르침을 로마제국 전역에 퍼뜨렸다. 로마황제 네로(서기 37~68년)가 그리스도교인을 대대적으로 박해했음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서기 272년경~337년)가 서기 313년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한 식민지 청년의 3년짜리 운동이 당대 최강제국의 국가종교가 되는 데 걸린 시간, 약 300년. 이것은 단순한 종교팽창이 아니라 인류문명의 방향을 통째로 바꾼 사건이었다.
서양 달력 체계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삼고 있으니(비록 실제 탄생연도 계산에 오류가 있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전 세계가 그를 기준으로 시간을 세고 있는 셈이다. 이보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을까?
또한 그의 가르침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서양사상, 법률, 예술, 문학, 음악, 건축 등 문명 전반의 뿌리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1475~1564년)의 〈피에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년)의 수난곡들. 인류 최고의 예술적 성취 다수가 그 한 사람을 향해 있다.
알렉산더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 작,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남, 1835년.(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예수, 시사와 배움
여기서 잠깐,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독교 국가 중 하나다. 서울도심에는 대형교회들이 즐비하고, 새벽마다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군상들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는 점은 뼈아픈 역설이다.
세습교회, 수천억 원대 건물, 정치권력과 유착하는 종교지도자들. 예수가 뒤집었던 바로 그 성전의 탁자들이 2천 년 후 한국 땅에서 다시 세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일이다.
예수의 핵심 가르침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첫째, 약자와의 연대. 예수는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곁에 머물렀다. 오늘날 한국에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로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들, 최저임금을 받으며 배달 오토바이를 모는 이들, 지방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주민들이 그의 비유 속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둘째, 위선에 대한 비판. 예수는 내용 없는 형식, 실천 없는 선언을 가장 경계했다. 입으로는 민생을 외치면서 실제 삶은 특권층과 다를 바 없는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공동체를 말하면서 자기 이익에만 골몰하는 지도층에 대한 경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셋째, 권력에 대한 저항.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 왕(기원전 20년경 – 서기 39년)을 저 여우 라고 불렀고 율법가 바리새인과 제사장 사두개인을 독사의 자식들 이라 불렀다. 오늘날로 치면 대법원장이나 검찰총장을 공개석상에서 개돼지 라 부르고 대형교회 목사들을 개XX들 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 말을 바꾸거나 비유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언론인과 지식인이 되새겨야 할 태도가 아닐까.
넷째, 작은 자로부터 시작하는 변화. 예수의 열두 제자는 어부, 세리 등 사회 하층민 출신이었다. 학력도, 재력도, 배경도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무리에서 시작한 운동이 제국을 바꿨다. 거대한 변화는 언제나 변방에서, 작은 자들의 연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역사는 거듭 증명한다.
3세기경 예수를 선한 목자로 묘사한 그림(위키피디아)
그가 지금 광화문 앞에 선다면
만약 예수가 지금 한국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아마 그는 대법원이나 검찰청 앞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를 외치다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연행될 것이다. 아니면 어느 대형교회 앞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거늘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고 외치다가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마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역사 속 예수는 두려움 없이 말했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은 이들의 이야기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목수의 아들이 세상을 바꿨다면, 오늘 이 땅의 흙수저나 평범한 이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역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카를 블로흐(1834~1890)의 산상수훈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