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전쟁의 무대였던 영국 랭커스터의 서늘한 질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권력은 세습되고 억울함은 반복된다
영국 북서부 룬 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 랭커스터. 겉으로는 스콘을 파는 평온한 관광지처럼 보이나, 그 속살은 기묘하다. 국왕의 사유재산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무고한 노파를 죽인 마녀재판 현장이 관광명소가 된 곳. 760년을 이어온 이 도시의 역사는 권력의 세습, 약자를 향한 폭력, 그리고 지방도시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날카로운 통찰을 던진다.
랭커스터 마켓 스퀘어(위키피디어)
로마의 요새에서 왕실의 금고가 되기까지, 세습의 기원
랭커스터의 역사는 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군이 북부방어의 요충지로 선택한 룬 강 언덕 위, 그들이 세운 요새 터는 훗날 이 도시의 운명을 결정짓는 토대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떠난 뒤 1092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가 스코틀랜드와의 국경을 북쪽으로 밀어붙이며 이곳은 다시 전략적 핵심지로 부각되었다. 1093년 노르만 정복자 로저 드 푸아투가 로마요새 터 위에 성을 쌓으며 랭커스터 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시가 본격적으로 왕실의 땅 이 된 것은 1267년의 일이다. 헨리 3세는 당시 잉글랜드 최초의 혁명이라 불리던 시몬 드 몽포트의 난을 진압한 후, 몰수한 반란군의 땅을 자신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에게 하사했다. 이것이 바로 랭커스터 공작령(Duchy of Lancaster) 의 탄생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명백한 내부자 거래 이자 특권의 사유화 다. 반란 진압이라는 공적 과업의 결과물을 국왕의 자식에게 사적재산으로 넘겨준 것이다. 이후 1399년, 랭커스터 공작의 후계자였던 헨리 볼링브로크가 국왕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헨리 4세로 즉위하면서 랭커스터는 국왕의 사적 재산으로 확고히 편입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구조가 21세기인 2026년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1761년 조지 3세가 대부분의 왕실토지를 국가(의회)에 넘길 때도 랭커스터 공작령만은 제외되었다. 현재 랭커스터 공작령의 자산 가치는 한화로 약 1조 1천억 원을 상회하며, 연간 순이익만 수백억 원에 달한다. 이 막대한 수익은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개인 지갑으로 직행한다. 760년 전의 정복과 몰수가 오늘날에도 자본의 형태로 증식되고 있는 것이다.
랭커스터 공국 기록에 있는 헨리 4세의 초상화. 헨리 4세는 1399년 리처드 2세를 왕위 찬탈하기 전까지 랭커스터 공작이었다. 초상화 제작 연대는 1402년 경으로 추정된다.(위키피디아)
랭커스터는 또 장미전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요크 가문의 하얀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빨간 장미 문장(紋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1453년 헨리 6세의 무능과 그에 대한 요크 공작 리처드의 반발로 일어났다. 요크가의 승리 후,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반란을 일으켜 1469년 내전이 다시 발생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4세를 폐위하고 헨리 6세를 복위했다. 네덜란드로 달아났던 에드워드는 1471년 3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워릭 일당을 격파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고 그의 큰 아들인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곧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 의해 폐위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리처드 3세로 즉위했으나,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평원 전투에서 리처드를 죽임으로써 장미 전쟁은 막을 내렸다.
랭커스터 성(위키피디아)
핀 한 조각이 불러온 죽음, 펜들 마녀 재판의 비극
랭커스터 성의 역사가 오로지 왕실의 영광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이 성의 가장 어둡고 서늘한 기록은 1612년의 펜들 마녀 재판(Pendle Witch Trials) 에 박제되어 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상세하게 기록된 이 마녀재판은 광기어린 집단 폭력이 어떻게 한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비극의 시작은 지극히 사소하고도 가난했다. 1612년 3월, 펜들 언덕에 살던 가난한 소녀 앨리슨 디바이스가 길을 지나던 행상인 존 로에게 바느질용 핀을 몇 개만 달라고 구걸했다. 당시 핀은 일종의 생필품이었으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조차 귀했다. 행상인이 이를 거절하자 앨리슨은 저주를 퍼부었고, 우연의 일치였는지 행상인은 그 자리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마법 에 의한 살인 시도로 둔갑했다. 당시 국왕 제임스 1세는 마녀학에 심취해 있었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던 지방 치안판사 로저 노웰은 이 사건을 자신의 출세 기회로 삼았다. 재판은 랭커스터 성에서 열렸다. 피고들에게는 변호인도, 유리한 증인을 부를 권리도 없었다.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홉 살 소녀 제닛 디바이스의 등장이었다. 법정은 이 어린아이를 증언대에 세웠고,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 언니를 마녀라고 지목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딸의 증언을 들으며 비명을 지르다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갔다. 결과적으로 10명이 랭커스터 성 황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중에는 여든 살의 눈먼 노파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거는 없으나 분위기가 있다 는 논리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이는 권력이 시스템을 장악했을 때 사회적 약자가 얼마나 쉽게 소모품으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랭커스터 성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현대의 랭커스터, 지식과 성찰로 일구는 소도시의 미래
오늘날의 랭커스터는 인구 14만 명의 소박한 도시다. 화려한 대도시의 마천루나 거대 산업단지는 없지만, 이곳에는 이 도시를 지탱하는 강력한 심장이 있다. 바로 1964년 설립된 랭커스터 대학교다.
전 세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이 연구중심 대학은 랭커스터의 경제와 문화를 주도한다. 젊은 인재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대학의 연구역량이 지역기업과 결합하며 소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는 단순히 대학이 하나 있다 는 차원을 넘어, 도시의 내실이 인구수가 아니라 지식의 밀도 에 달려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또한 랭커스터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2011년까지 실제 교도소로 운영되었던 랭커스터 성은 이제 관광객들에게 그 내부를 낱낱이 공개한다. 마녀들이 갇혔던 음습한 지하 감옥, 수많은 이가 교수형을 당했던 처형장 입구까지도 역사의 일부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마녀 재판 400주년이었던 2012년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시와 동상을 세우며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성찰했다. 어두운 역사를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성찰의 지도로 삼은 것이다.
랭커스터 대학교(위키피디아)
랭커스터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랭커스터의 760년 역사는 바다 건너 한국사회에 묵직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세습되는 기득권의 공고함
760년째 이어지는 왕실 공작령처럼, 우리사회에는 오래된 관행 이라는 이름 아래 대물림되는 특권들이 존재한다. 재벌가의 편법 경영권 승계, 특정지역의 정치 토호세력, 그리고 지연과 학연으로 묶인 카르텔이 그러하다. 랭커스터는 제도화된 특권이 시스템의 보호를 받을 때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견고한 세습의 벽을 민주적 공정함으로 무너뜨리고 있는가?
랭커스터의 킹스트리트
공포를 이용한 현대판 마녀사냥
1612년 펜들에서 벌어진 비극은 현대 한국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재연된다. 사회적 혐오와 공포를 동력 삼아 특정집단을 공격하고, 근거 없는 의혹만으로 한 개인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인터넷 마녀사냥이 그것이다. 아홉 살 아이의 증언에 열광했던 랭커스터의 법정처럼, 우리 역시 자극적인 폭로와 선동에 휘둘려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1825년의 랭커스터 그림(위키피디아)
지방소멸의 대안
지방의 인구감소와 청년유출은 한국의 심각한 국가적 과제다. 랭커스터는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도 세계적인 교육·연구 거점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자생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공장을 유치하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지방회생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랭커스터 대학교의 문장(위키피디아)
과거사와 성찰의 방식
랭커스터 성은 감옥이자 처형장이었지만, 이제는 성찰의 장소가 되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수많은 과거사 문제 앞에서 갈등하고 있다. 역사를 진영논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랭커스터처럼 비극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랭커스터의 세인트 조지 부두.(위키피디아)
역사라는 이름의 거울
랭커스터 성 위에는 오늘도 찰스 3세의 공작령 깃발이 펄럭인다. 760년 전의 권력구조가 현대의 자본 시스템과 조우하며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랭커스터는 우리에게 말한다. 권력은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며, 성찰하지 않는 사회는 언제든 다시 마녀를 찾아내 처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역사란 박물관에 갇힌 박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와 대화하며 다른 이름으로 반복되는 서사다. 잉글랜드 북부의 이 고집 센 도시는, 화려한 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사의 욕망과 비극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로서 오늘 한국사회의 민낯을 묻고 있다. 권력은 세습되고 억울함은 반복되나, 그 역사를 성찰하는 힘만이 그 비극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랭커스터는 760년의 세월로 증명하고 있다.
랭커스터 박물관(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