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자기 선택권, 어느 선까지 존중해야 하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던 스물다섯 살 여성 노엘리아 카스티요는 아버지와 1년 6개월 동안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어릴 적부터 경계성 인격장애 등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그녀는 2022년 10월, 5층 건물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삶의 의지를 내려놓기로 마음 먹은 것은 4년을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경험 때문이었다.
투신 이후 목숨은 구했지만 척수를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돼 카스티요는 일상을 영위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만성 신경통과 요실금으로 힘겨워했다. 극단을 선택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정신병원에도 여러 차례 입원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카스티요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부친은 딸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국가는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청소년을 비롯해 취약한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스페인의 안락사법은 2021년부터 시행됐다. 스페인의 유기법 3/2021(LORE) 은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하거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스페인 시민이나 거주자에게 안락사나 조력 자살을 허용한다. 영국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디그니티 인 다잉 (Dignity in Dying)에 따르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조력자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을 가진 아홉 나라 중 하나다. 물론 허용하는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의료적 조력 자살은 의사가 처방한 치명적인 음료나 약물을 환자가 직접 복용하는 반면, 안락사는 엄격한 조건 아래 의사나 보건 종사자가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환자에게 치명적 주사를 투약해 적극적으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포함한다.
스페인 보건부에 따르면 2024년 말까지 1123명이 생명을 끝내는 약물을 투여받았다. 이 나라는 안락사와 조력 자살 모두 자연사로 분류한다.
카탈루냐 주 정부는 그녀에게 조력자살 권리를 부여했으나,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통 가톨릭 국가의 기독교 변호사 모임 아보가도스 크리스티아노스 (Abogados Cristianos)가 그를 적극 응원했고, 마지막 순간에 절차가 중단됐다.
딸도 물러서지 않았다. 항소해 자신이 삶을 선택할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법정으로 싸움이 옮겨졌다. 카탈루냐 주 법원과 대법원, 헌법재판소에 이어 유럽인권재판소(ECHR)까지 차례로 거쳤다.
26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 조력 자살로 세상을 등진 스물다섯 살의 여성 노엘리아 카스티요는 어릴 적부터 정신건강에 문제가 많았으며, 성폭행 충격에 극단을 선택했다가 하반신이 마비되는 등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Y Ahora Sonsoles (Atresmedia Televisio)
아보가도스 크리스티아노스는 엑스(X, 옛 트위터)에 카스티요가 26일 오후 치명적인 약물을 주사해 의료진의 조력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이 단체는 그녀의 사건이 스페인 안락사법의 심각한 결함들을 부각시켰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달랐다. 자살을 막기 위해 끝까지 강경했던 이 단체는 노엘리아의 안락사가 이뤄졌다. 그녀의 영혼과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녀가 평안히 쉬길 바란다 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부친 측의 항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럽인권재판소도 집행 중단 요청을 기각해 카스티요의 손을 들어줬다. 스페인에서 법정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가 판사의 재량으로 조력 자살을 승인받은 것은 그녀가 처음이라고 BBC는 전했다.
카스티요는 주 초에 현지 안테나 3 TV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가 자신의 존엄한 선택권을 법적으로 막으려 했다며 아버지는 내 결정을 존중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중하지 않을 것 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많은 시간을 요양시설에서 보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항상 외로움을 느꼈다 며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데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떠나고 여러분은 모든 고통을 안은 채 여기 남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오랜 세월 겪은 모든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그냥 평화롭게 떠나 고통을 멈추고 싶다. 아빠나 엄마, 자매의 행복이 딸의 행복보다 앞서선 안 된다.
카스티요는 가족이 와서 작별 인사를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치명적 주사가 시행됐을 때는 의사와 단둘이 있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 욜란다 라모스는 딸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고 말했다.
안락사에 반대하는 시위 참가자들이 지난 18일 수도 마드리드의 스페인 의회 의사당 앞에서 죽음의 정부 라고 새겨진 플래카드를 펼치고 있다. 2026.3.18 마드리드 AP 연합뉴스
그녀의 법정 다툼 결과는 재판부가 결국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우선하는 쪽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심사 끝에 확인된 본인의 뜻이라면 존중해야 한다고 본것이다.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중증 외상과 장애,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마지막 선택을 허용하기 전에 국가가 치료와 재활 돌봄을 더 적극적으로 제공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디언은 카스티요가 생전 인터뷰를 통해 다른 이에게 권할 본보기가 아니라 자신이 오랜 고통을 겪은 끝에 내린 아주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스페인의 안락사나 조력 자살은 가톨릭 국가로서는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제도가 자리잡힌 상태이지만, 카스티요 사례처럼 장애와 비극적인 경험, 정신적 고통, 가족의 반대 등 많은 요소들이 얽혀 있어 논란이 거세질 수 밖에 없었다.
유럽 언론이 주목하는 것도 사안의 비극성보다 제도의 경계다. 법원은 절차와 권리를 확인했지만 사회와 국가가 더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는지 묻고 있다. 결국 이번 사건은 스페인을 넘어 안락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삶의 결정권과 사회적 보호의 균형점을 점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노엘리아 카스티요 라모스가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한편 아르헨티나 주요 언론들도 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며 사건의 경과와 안락사 절차, 법적 쟁점을 상세히 전했다. 카스티요는 말기 환자가 아닌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20대에 안락사를 승인받았으며,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중요한 사유로 인정됐다는 점에서 논란이 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유럽뿐 아니라 중남미를 포함한 국제사회 전반에서 존엄사 와 죽을 권리 를 둘러싼 논쟁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 캐나다 등만이 수동적, 능동적 안락사와 엄격한 조건으로 이뤄지는 의사조력 사망을 허용한다고 AFP는 전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말기·불치·비가역성 질병 진단을 받은 환자의 경우에만 치료나 처치를 거부할 수 있어 의료진이 약물을 투여해 죽음을 돕는 적극적인 안락사 는 불법이다.
앞서 인도 대법원은 13년 가까이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 온 하리시 라나(32)의 수동적 안락사를 지난 12일 승인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수동적 안락사를 합법이라고 판결했는데 사전에 허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수동적 안락사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서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으로, 약물 투입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능동적 안락사와는 차이가 있다. 능동적 안락사는 인도에서 불법이다.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라나는 그동안 의미 있는 소통을 보여주지 못했고 자가치료를 위한 모든 활동을 타인에게 의존해 왔다 고 밝혔다. 의료진도 라나가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이미 결론을 내렸다.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 출신인 라나는 2013년 학생 기숙사 건물 4층에서 추락한 이후 줄곧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왔다. 스스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어 부모가 수동적 안락사를 청원했다.
인도에선 2011년에도 안락사 논쟁이 있었다. 잔혹한 성폭행을 당한 후 42년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온 간호사 아루나 샨바우그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느냐를 놓고서다.대법원은 결국 샨바우그의 안락사 허용을 요청한 가족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샨바우그는 66세이던 2015년 폐렴으로 숨졌다.
다만 대법원은 엄격한 조건을 충족하고 사법당국 승인이 있으면 수동적 안락사를 인정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존엄사에 대한 헌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기존 판결을 바탕으로 이런 의견을 냈는데, 이를 근거로 수동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2018년 판결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