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대신 붓을 든 피카소, 예술판의 혁명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프랑스 무쟁에서 눈을 감기까지, 무려 91년을 살면서 그림 1만 3000여 점, 조각 1200여 점, 판화 2만 7000여 점을 남긴 인물이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것을 쏟아낸 사람이 또 있을까.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은 작품을 혼자 만들어낸 셈이니, 그야말로 예술계의 대량생산 공장 이었다. 다만 공장장이 천재였을 뿐.
그런데 피카소를 단순히 그림 잘 그린 유럽 아저씨 로만 보면 큰 손해다.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해석하고, 권력을 조롱하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기존의 모든 정상적 인 것을 뒤집어엎은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예술판의 혁명가. 붓을 든 투사였다.
1962년의 피카소(위키피디아)
눈이 셋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쪼개고, 겹치고, 해체하다
피카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입체주의(Cubism) 다. 즉 여러 각도를 한 화면에 동시에 담는 분해·재구성 화법 . 코가 옆에 붙어 있고, 눈이 두 개인데 방향이 다르고, 얼굴이 정면인지 측면인지 알 수 없는 그 그림들 말이다.
처음 이 그림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게 뭐야? 어린아이가 그렸나? 저 사람 눈이 비뚤어졌나?
그러나 피카소와 함께 이 화법을 개척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물을 하나의 시선으로만 보는 거짓에서 벗어나려 했다.
세상을 한 각도에서만 보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그림으로 보여준 것이다. 권력자의 시각, 다수의 시각, 정상 으로 규정된 시각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뒤집어 보고, 옆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이 피카소가 예술로 던진 첫 번째 화두였다.
레 데오미젤 다비뇽 (1907), 뉴욕현대미술관(위키피디아)
전쟁의 비명을 그림으로 지르다, 게르니카(Guernica, 1937)
1937년, 스페인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독재정권을 지원하던 나치독일 공군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다. 민간인 수백 명이 죽었다. 아무런 군사적 목적도 없는 학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붓을 들었다. 가로 7.76미터, 세로 3.49미터의 거대한 화폭에 흑백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말,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무너진 건물, 찢긴 몸들을 가득 채웠다. 피 한 방울도 그리지 않았지다만, 그 그림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은 핏기 없는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바로 〈게르니카〉다.
훗날 나치 장교가 피카소에게 물었다고 전해진다.
이걸 당신이 그렸소?
피카소의 답이 걸작이다.
아니오. 당신들이 그렸소.
붓은 총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게르니카〉는 지금도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걸려 있고, 프랑코정권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파블로 피카소의 1937. 캔버스에 유화. 349cm × 776cm(Amazon.co.uk: Home & Kitchen)
규칙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 피카소의 삶 자체가 도발
피카소의 삶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여러 연인, 수많은 결혼, 공산당 입당, 권위 있는 미술기관에 대한 조롱. 그는 평생 예술에는 규칙이 없다 고 외쳤다.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것도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라기보다는, 기득권과 자본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저건 예술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 피카소는 웃으며 그림을 한 점 더 팔았다. 비판이 곧 홍보였던 시대의 천재적 역설이다.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는 말도 그가 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말 자체도 훔친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그답다.
1889년의 피카소와 그의 여동생 롤라(위키피디아)
여기서 잠깐, 한국을 보자, 우리에게 피카소는 무엇인가
이쯤에서 질문 하나. 피카소가 2026년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이렇게 됐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림 이상하게 그린다 는 이유로 미술 선생님에게 혼났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예체능으로 빠지면 나중에 밥 못 먹는다 는 부모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수능에서 예술관련 과목은 선택도 못하고 수학·영어에 치여 살다가, 대학 진학 후 취업 걱정에 그림을 포기했을 것이다. 혹여 살아남아 화가가 됐다면, 왜 이렇게 이상하게 그려요? 라는 갤러리 관장의 말에 상처받고 정통 화풍 으로 전향하거나 유튜브에서 그림 강의나 찍었을 것이다.
이것이 과장인가? 조금도 아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정해진 형식 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공교육은 창의성보다 정답을 가르치고, 문화예술 예산은 늘 경제성 과 효율 의 잣대로 깎인다. 국가가 예술을 지원하는 기준도 기존 권위 있는 기관의 인증을 받은 것,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 논란 없을 것이어야 한다. 그 틀에서 피카소 같은 이단아가 살아남을 공간이 있을까.
올드 기타리스트, 패널에 오일, 122.9 x 82.6 cm(위키피디아)
게르니카와 한국, 고발하는 예술은 지금 어디에 있나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리면서 나는 예술을 장식품으로 만들지 않겠다. 예술은 적을 공격하는 무기여야 한다 고 했다. 그 적 은 전쟁이었고, 파시즘이었고, 민간인을 죽이는 권력이었다.
2026년 한국에서 예술이 무기 가 되는 경우는 얼마나 있을까. 물론 거리예술가들, 독립만화가들, 소규모 공연단체들이 꾸준히 싸우고 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예술가들이 있었고, 촛불을 그림으로 기록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류 미술시장에서, 공공미술관에서, 국가지원 예술 사업에서 권력을 향한 날카로운 고발이 얼마나 쉽게 자리를 잡는가.
이명박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 사태(2016~2017년)를 기억하는가. 유인촌의 문화체육관광부가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가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지원에서 배제한 사건이다. 〈게르니카〉를 그렸다면 피카소는 그 목록의 맨 앞 페이지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훈장은커녕 세무조사를 받았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1905, 캔버스에 유화, 99.1 × 100.3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위키피디아)
피카소에게 배우는 것, 불편함을 견디는 용기
피카소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기법이 아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태도다. 그는 평생 이건 예술이 아니다 는 비판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공격받았으며, 말년에는 시대에 뒤처진 영감탱이 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도 붓을 놓지 않았다.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피카소 같은 천재가 아니다. 피카소처럼 불편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들어줄 수 있는 사회다. 눈이 셋이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림을 보고 저건 틀렸어 라고 말하기 전에, 왜 저렇게 그렸을까 를 먼저 묻는 문화.
그것이 피카소가 91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진짜 유산이다. 물감은 말랐지만, 질문은 아직 살아 있다.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먼지를 영혼에서 씻어내는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 190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누군가 스타인이 초상화 속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말하자 피카소는 그녀는 곧 닮아갈 것 이라고 답했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