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의 끔찍한 정체 드러내 치유하려는 영화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 평론가
수없이 올라 온 넷플릭스 작품 중에 최근 가장 놀랄 만큼 인상적이며, 한편으로는 꽤나 역겹고, 그래서 오히려 매우 성찰적인 작품이 영국 7부작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이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극중에서 스토커 여성 마사 스콧(제시카 거닝)이 자신의 공격 대상인 남자 도니 던(리처드 개드)을 부르는 말이다. 아기사슴. 나의 꽃사슴. 단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렇게 수개월, 수년을 그렇게 불리며 정신적 언어적 학대와 억압을 받는 남자는 죽을 맛이 된다. 일상이 무너진다. 인생 자체가 망가진다.
리처드 개드의 원작 연극을 영화로 개작한 건데, 이 모든 얘기는 제작과 감독 주연을 동시에 맡은 리처드 개드가 겪은 실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게 정말 실제 사건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의 강도가 강하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이런 일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들이다. 정신적으로 극단성을 지닌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된지 오래이며 스토킹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는 그래서, 보는 내내 마음을 어둡게 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며, 역겹고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리고 정말 기이하게도,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난다. 이게 다 소통의 문제일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이 극단적으로 개체화, 파편화된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국 7부작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 한 장면
스토킹 그물망에 옭아매인 것은 자신의 어두운 욕망 때문
스토커 마사는 뚱뚱하고 늙고(42세) 돈이 없는, 무직의 여자이다. 한때 변호사였지만 유명 정치인(데이비드 캐머런)을 스토킹한 전력의 전과자이다. 옥스포드 출신의 도니는 스탠딩 코미디언을 꿈꾸며 런던 갬빗의 한 펍에서 바텐더로 일한다. 그의 코미디 실력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당최 나아질 기미도 없다. 마사나 도니나 밑바닥 신세를 전전하는 중이며 서로의 접근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관계는 약한 쪽을 파고드는 사람이 주도권을 쥐는 법. 마사는 처음부터 도니의 연약한 심성을 건드린다. 이후 그녀는 매일매일 50개에 이르는 문자를 보내고 음성 메시지 폭탄을 보낸다. 도니는 곧 마사가 던진 그물망에 옭아매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도니가 마사의 그물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며 그걸 물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리적인 측면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베이비 레인디어’의 한 장면
주인공 도니는 결국 자신이 스토킹의 대상이 된 것은 스토킹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하고 어두운 자신의 욕망 때문이라는 성찰에 도달한다. 그는 한동안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무대에서 출세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한 남자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와 온갖 약물, 곧 MDMA(엑스터시), GHB(물뽕), 필로폰, 헤로인, 코카인, 대마초 등등을 다 섭렵한 후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강간을 당한다. 이후 도니는 극도의 성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변태적 욕망 외에는 현실에서 성적 관계 맺기를 힘들어 한다. 연인 킬리(샬롬 브룬 프랭클린)와는 진즉에 깨졌지만 헤어진 킬리의 엄마 리즈(니나 소산야) 집에 하숙을 하며 살아간다. 스토킹을 당하면서, 그리고 전 여친 엄마 집에 기숙하면서, 그 와중에 트랜스젠더 여성(성전환자)인 테리사(나바마우)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일상은 아무리 지옥이어도 어떻게든 유지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옥은 지옥이다.
도니는 마사가 자신을 ‘죽도록’ 스토킹 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 칭찬받고 싶은 욕망을 그녀가 자극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그걸 방어하지 않은 채 손쉽게 오픈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도니 스스로 악마에게 들어오라고 손짓 했으며 문을 열어 준 셈인 것이다. 도니는 서서히 마사가 벌이는 스토킹의 정체와, 그것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한다.
‘베이비 레인디어’의 한 장면
끊임없는 성찰 없으면 스토킹적 상황 못 벗어난다는 메시지
바로 그같은 깨달음과 성찰, 승화된 무엇을 담고 있음으로 해서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실화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임에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개봉 이후 한동안 글로벌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한 것에는 다 까닭이 있다. 단순한 스토킹 영화, 스토커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용뿐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현상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그것이 어떤 구조 속에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이란 전혀 예상치 못한 기묘한 방향으로 풀릴 때가 많으며, 끝간 데 없는 불행과 사고가 이어지다가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기도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내적인 갈등, 도덕적 결함에 대해 끊임없는 자성과 고민으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각자가 처한 ‘스토킹적’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 이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가 얘기하려 하는 궁극의 메시지이다.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정신적으로 포획하려는 것만이 스토킹이 아니다. 우리는 돈을 스토킹하기도, 또 돈이 우리를 스토킹하게 하기도 하며 정치와 정치인은 어쩌면 스토킹의 원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쏟아진 수많은 가짜뉴스와 악성 댓글들 역시 스토킹 심리의 기본을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스토킹의 심리학이며 그 같은 내적 결함을 우리 스스로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 자신,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이 올바르게 바뀔 수가 없다. 7부작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는 남녀 간의 지독한 전쟁 같은 이야기를 보여 주는 척, 사실은 우리가 내면으로 지니고 있는 악마성, 그 위선스러움, 보다 더 간악하고 이중적인 욕망 등등의 민낯을 쉴새없이 까발린다. 구조나 정치의 문제에 앞서,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폭압에 맞서기 이전에, 아니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 우물물 속의 자화상들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개드가 그 오랜 기간의 괴롭힘을 당한 후에 깨달은 진리이다.
'베이비 레인디어' 포스터
우리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
‘베이비 레인디어’는 스토킹 문제를 가운데 놓고 이성애와 양성애, 동성애, 소아성애 등등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모든 성적 판타지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리처드 개드, 극중 도니 던은 자신이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후 바이 섹슈얼리스트가 된 것 같다고 하지만 자신 안에 이미 그런 욕망이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강간의 트라우마는 너무나 심한 것이고 진실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서 아무리 남들이 이해하려 한다 한들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도니는 아버지의 단 한마디에 새삼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의 구덩이를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나도 어린 시절 내내 성당을 다녔던, 가톨릭 신자였단다.” 유럽 북미 국가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벌인 아동성추행의 사례는 줄이 길어도 너무 긴 이야기들이고, 아버지 역시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얘기이다. ‘베이비 레인디어’가 눈물겨운 것은, 결국 사람이 입은 정서적 상처는 공감이란 심리의 영역대에서 아물어지거나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완고하고 보수적으로 보이는 도니의 아버지는 그를 태운 런던행 기차가 떠나려는 순간 차창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친다. “그 트랜스젠더와 잘해 봐!”
‘베이비 레인디어’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진실된 드라마이다. 현대인들이 지닌 집착과 광기, 자의식의 과잉, 집단적 따돌림의 실체를 연결시키기도 한다. 사회는 미쳤으며 사람들도 정상이 아닌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들이 어떤 방식으로 방어하고 무장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그건 서로가 가깝게 연대하고 공감하며 사는 것이다. 옛 여친 킬리와 킬리의 어머니가 그러는 것처럼.
지금 외로우신가. 당신도 언제나 늘 스토커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