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시위대에 발포 명령 책임자들 죄를 묻지 못했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아침,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3.15 부정선거에 이어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결과였어요. 특히 하루 전날 고려대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 정치깡패들이 습격해서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 사건은 학생과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울 지역의 시위대 중 일부가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 근처까지 진출하여 경찰의 저지선과 대치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1시 40분경 경찰은 현재의 효자동 일대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어요. 이로 말미암아 서울에서만 약 100여 명, 전국적으로는 18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 심지어 국민학생까지 포함되어 있어 큰 충격을 주었지요.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 경찰의 발포 장면
그렇다면 당시 발포명령을 내린 책임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혁명재판소는 이들에게 중형을 내려, 몇 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감형을 받고 사회에 나와 언론인으로, 법조인으로, 교육자로 버젓이 행세했지요.
4.19 당시 내무장관은 홍진기, 최인규는 3.15 부정선거 책임자
많은 분들이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가 발포 책임자로 사형을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3월 23일에 경질되었기 때문에 4.19 당시의 내무부 장관은 법무부 장관에서 자리를 바꾼 홍진기였어요. 최인규는 4.19가 아니라 3.15 부정선거의 총 책임자로서 처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홍진기 장관이 경찰 사무를 총괄하는 수장으로서,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지시하고 발포를 승인한 혐의로 기소되었어요.
그리고 치안국장 조인구,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유충렬, 서울특별시 경찰국 경비과장 백남규가 발포명령의 지휘라인에 있던 인물로서 구속되었습니다. 아울러 경무대 경무관으로 이승만의 심복이었던 곽영주도 함께 기소되었어요. 당시 발포가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서면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명확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원수로서 자국민을 향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이들에 대한 재판은 허정 과도정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검찰은 경무대 앞에서 학생들에게 발사된 실탄수는 160발인 것으로 밝혔지만, 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작업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어요. 피의자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발뺌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검찰의 입장은 발포 명령이 한 개인에 의해 독단적, 우발적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이들 간의 사전합의로 이루어진 결과로 보는 것이었어요.
법정에 선 발포책임자들. 오른쪽부터 홍진기, 유충렬, 곽영주, 백남규
검찰과 법원의 뒤죽박죽, 미온적 처벌에 분노한 민심
그런데 검찰은 8월 29일 드디어 논고를 발표했습니다. 홍진기를 발포 명령의 총 책임자, 곽영주는 경무대 앞 발포 명령자, 유충렬은 서울시 일원 발포 명령자로 규정하여 사형을 구형했어요. 백남규는 직접적인 명령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조인구는 발포명령을 내렸지만 그 전에 이미 발포가 이루어졌다는 것과 ‘검찰에 공로가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들어 징역 3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10월 8일의 판결 결과는 이와 달랐어요. 사형이 구형되었던 홍진기와 곽영주는 각각 징역 9월과 3년으로 크게 감형되었고, 조인구는 아예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이 구형되었던 유충렬과 무기징역이 구형되었던 백남규에게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4.19 발포의 책임을 전적으로 서울특별시 경찰국에 두고, 그들의 윗선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고 끝내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어요.
결국 이 판결은 4.19 혁명 당시의 발포 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하라는 민심을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사형선고를 받은 유충렬과 백남규 마저도 그날 오후 서울시 일대에서 일어났던 발포와 관련되었을 뿐, 경무대 앞 발포에 대해서는 무죄를 인정하고 말았어요. 결국 경무대 앞 발포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진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미온적인 판결에 대한 항의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마산, 부산, 대구에서도 일어났어요.
시위대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10.8 판결에 대해 다시 검토할 것과 4.19 부정부패 관련자들의 엄격한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헌법이 개정되었고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에 관한 법률’이 1960년 12월 30일에 통과되었어요.
5.16 군사쿠데타 후 또 다시 완전히 뒤집힌 판결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특별재판부의 활동은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새로 들어선 혁명검찰부는 1961년 9월 25일 앞선 판결을 완전히 뒤집었어요. 징역형을 받았던 홍진기와 곽영주에게 사형이,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충렬과 백남규는 징역 12년과 3년 6개월이 구형되었습니다. 결국 홍진기의 총 책임 아래 발포명령이 실행되었고, 곽영주는 경무대 앞에서 직접 발포를 명령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지요.
9월 30일 혁명재판소는 홍진기와 곽영주는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한 반면에, 유충렬은 무기징역으로, 백남규는 징역 10년으로 구형보다 중형을 부과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 근거는 최종 방어선이 붕괴되자 홍진기, 곽영주, 조인구 사이에는 경무대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발포를 명령하였다는 것이었어요. 특히 홍진기는 발포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발포 전에 계엄령이 이미 발표된 것으로 조작했다는 책임을 물었습니다.
혁명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홍진기, 곽영주, 유충렬, 백남규는 모두 이의를 제기했어요. 이에 따라 12월 15일 상소심 변론 공판에서 변호인들은 피고들의 죄목에 대한 증거부족을 제기했습니다. 12월 19일의 결심에서는 새로운 형량이 선고되었어요. 곽영주에게만 사형이 유지되었고 홍진기는 무기징역, 유충렬 징역 20년, 백남규 징역 3년 6개월로 감형되었습니다. 발포책임을 곽영주에게 떠넘긴 것인데요.
장관과 경찰 대신 모든 책임지고 사형 당한 곽영주
곽영주는 사형이 선고된 지 불과 이틀 만에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곽영주는 물론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남용한 인물로서 4.19 당시 발포책임자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을 것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을 경무대 경무관이 내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따라서 홍진기, 조인구를 비롯한 경찰 고위층의 책임도 물었어야 했던 것이지요.
재판과정에서 나온 증언들을 보면 발포명령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황이 불리해질 경우 시위대에 발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경무대 앞 발포사건 용의자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발포명령이 단지 어느 개인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곽영주의 유족들은 지속적으로 곽영주는 공고 나와서 죽고, 홍진기 씨는 서울법대를 나와서 살았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사형 집행 직전의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으로 모든 발포 책임을 졌다.
언론인으로 변신한 발포책임자는 고등문관 출신 친일파
더구나 징역생활을 하던 죄수들은 2년 뒤에 모두 감형과 특사로 감옥을 나왔습니다. 홍진기는 일제시대에는 고등문관으로 친일행위를 했고, 이승만 정권에서는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으로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는 4.19 발포사건의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사돈인 삼성가의 지원으로 중앙일보를 설립하여 언론인으로 변신했지요. 중앙일보가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조인구는 치안국장까지 지낸 인물인데 60년 10월 8일 무죄로 석방되자마자 잠적한 후 모든 사법처리가 끝나고 감형이 이루어진 1965년에야 자진출두하여 처벌을 받지 않고 이후 변호사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유충렬은 인천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는데요, 학생들을 총으로 죽이라고 명령했던 인물이 교육자로 변신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1960년 4월 19일에 경찰의 발포로 죽은 사람만 억울할 뿐,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은 곽영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편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지금 내란 재판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데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계엄을 선포하고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의결을 방해했습니다. 만약에 성공했다면 자신들에게 반대해 온 정치인과 시민들을 구금하고 살해하려고 계획했어요. 이들에 대한 냉엄한 처벌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내란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거나 동조한 자에 대해서는 결코 감형과 사면이 없어야 하지요. 4.19 발포책임자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로 안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