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 독재·부패 혹평했던 고성국…극적 변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튜버 고성국 씨. 고성국TV 화면 갈무리
보수·극우 진영의 대표적인 유튜버로 국민의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고성국 씨가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군부독재 로 규정하고 쿠데타와 민주주의 압살, 부정부패의 시기 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고 씨는 특히 전두환 집권기를 폭력이 난무한 불법·무법 천지 로 표현하면서 6·29 선언도 거대한 위장극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으로 혹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고 씨가 최근 자유 우파의 당당한 역사를 재연 하기 위해 이들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국민의힘 당사에 걸어야 한다고 했던 주장과는 완전히 상반된 역사 인식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앞서 고 씨는 지난달 29일 유튜브 방송 이영풍TV 에 출연해 (장동혁 대표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건국의 이승만 대통령, 근대화·산업화의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대역사적 대타협을 한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까지 당사에 사진을 걸어야 한다 며 뭐가 그렇게 겁이 나고 쫄려서 사진조차 제대로 못 거느냐 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고 씨는 그게 우리 자유우파의 당당한 역사를 재연하는 것이고, 또 잃어버린 우리 자유우파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국민의힘 친한계 의원들이 고 씨에 대한 징계 요구서를 서울시당 윤리위에 제출하자 고 씨는 지난 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특히 전두환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우리 자유우파가 좌파의 여론전에 말려 그간 비겁하게 역사적 진실을 외면해 왔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가 인정한 평화적 민주화의 결절점인 6·29 선언(역사적 대타협)을 전두환 대통령을 빼놓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면서 해방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당과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들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고 밝혀 종전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월간 사회평론 길 1996년 6월호 중 고성국 씨의 기고문 일부
그러나 고 씨가 지난 1996년 에 잇따라 기고했던 장문의 글에는 보수 정당에서 배출한 해당 전직 대통령들에 관한 역사적 진실 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서술돼 있다. 은 1990년대에 발행된 진보적 시사 교양지로 1996년 6월호부터 10월호까지 5개월 연속 는 표제 아래 기획 기사들을 연재했으며, 고 씨는 당시 이 월간지의 편집위원이자 나라정책연구회 정책실장 직함으로 참여해 조갑제 편집장의 박정희론, 북한론, 역사관 등을 심층 분석하는 핵심 기사를 5부에 걸쳐 실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 시리즈 곳곳에서 그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국민에게 큰 고통을 준 독재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주요 대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분량이 너무 많아 일부만 발췌).
친일파 청산을 미루어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전쟁 중 피난 수도에 군인을 끌어들여 정치파동을 일으킨 이승만을 과연 국력과 국부에 치중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가?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을 유발시켜 망국적인 지역분열과 국론분열을 조장한 박정희를 국력에 치중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가? 두 차례나 쿠데타적 사건 을 일으켜 국기를 뒤흔들고 광주시민을 무력 진압해 지금껏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만들어버린 전두환을 국력에 치중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가? 또 연출된 6·29를 고독한 결단인 양 분식해 집권한 후 야대(野大)에 끌려만 다니다가 기회를 틈타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느닷없이 지방자치선거를 연기해 장기간의 위헌적 상황을 조장한 노태우를 민주와 정의에 치중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가?
박정희는 그가 그렇게 차고 싶어했던 긴 칼로 과연 무엇을 했는가? 박정희는 우선 긴 칼을 차고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한 만주군 장교를 했다. 그리고 해방 후 끊임없이 일본군 청년 장교들의 실패한 쿠데타인 2·26 사건을 되새기면서 쿠데타를 계획하였고 마침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였다. 그다음 박정희는 그 긴 칼을 좌충우돌로 휘둘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언론사, 출판사를 폐쇄했으며 4천여명에 달하는 학생, 지식인 등 4·19혁명의 주역들을 하룻밤 사이에 연행, 구속, 투옥시켰다. 노조를 없앴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으며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성사시켰고 월남파병을 강행하였다. 지역감정을 조장해 장기집권에 성공했으며 10월 유신을 통해 그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의회정치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박정희는 그 무겁고 긴 칼로 수차례의 계엄령과 위수령, 휴교령을 선포했으며 긴급조치를 아홉 차례나 남발해 법도 소용없는 긴급조치 시대 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정희는 마침내 그 무거운 긴 칼을 이기지 못해 그 칼에 깔려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월간 사회평론 길 1996년 8월호 중 고성국 씨의 기고문 일부
필자는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를 쿠데타와 민주주의의 압살, 그리고 부정부패의 시기로 특징짓는다. (…) 경제 성장에 대한 조갑제 부장의 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이런 기적적인 성장을 박정희가 이루어놓은 것처럼 설명하려는 대목이다. (…) 박정희와 5·16 주체세력은 바로 이 국민들 위에 군림해 사욕을 채웠을 뿐이다. 이는 박정희 사후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신군부가 박정희 시대의 2인자들인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증명이 되었다.
유신시대는 긴급조치시대 라는 별칭이 말해주듯이 폭력이 제도화된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의 통치술은 오직 하나 무제한적인 폭력의 동원뿐이었다. (…) 특히 이 시기의 부정부패가 통상적인 부정부패와 다른 것은 부정부패가 박정희와 그 측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그리고 권력남용은 박정희 정권 말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치 현상으로까지 부각되었다. 이렇듯 박정희 시대는 일상화되고 제도화된 폭력과 부정부패의 구조악이 박정희와 그 측근들 중심의 소수 과두지배세력에 의해 초법적 탈법적으로 강행된 반역사적 시대였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80년대 정치는 박정희 시대의 희극적 재현이었다. (…) 조갑제 부장은 단임 실천, 직선제 요구 수용을 전두환의 업적으로 평가했고, 이를 근거로 전두환이 퇴임 때 더 민주화된 지도자로 변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8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선제 쟁취 국민운동을 1년 이상 탄압하다 올림픽을 핑계 삼아 마침내 대통령 간선제인 현행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해 정국을 아연 극한적 대립국면으로 몰아간 그가 직선제 요구 수용이라는 업적을 쌓은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6월 국민항쟁의 와중에서 계엄령과 군 동원을 시도했다가 미국과 군부 내 온건파의 현실적 판단에 밀려 마지막 순간에서야 물리적 진압을 포기한 그가 더 민주화된 대통령으로 퇴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월간 사회평론 길 1996년 10월호 중 고성국 씨의 기고문 일부
흔히 지난 한국 현대사를 설명하면서 30여 년의 군부독재 권위주의 시기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박정희 정권 18년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 12년을 합친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결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박정희 사후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하고 박정희 시대를 재현한 두 사람의 신군부 주역이 전두환, 노태우이며 이 두 사람은 노태우가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사실상 방조, 조장할 때까지 40여 년 이상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서 한 배를 타고 왔다. 전두환이 거대한 위장극인 6·29를 진두지휘하고 대통령 당선을 위해서는 나를 마음껏 비판하라 고까지 했던 노태우를 박정희-전두환 계열에서 떼어내는 것은 이런 모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무지나 무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수구세력은 지난 30년간의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기득권을 누려왔던 정치군부와 그에 기생, 야합해온 세력이다. 이들을 극단적으로 압축하면 5·16 쿠데타 주도세력과 12·12 정변을 주도한 TK 신군부세력으로 압축할 수도 있다. (…) 결국 소수 정치군부를 축으로 하는 수구세력은 정치군부와 결탁한 지식인집단과 만주 인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친일세력으로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58년생 대구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76학번)를 졸업한 고 씨는 이 연재를 시작하기 1년 전인 1995년 모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세대 정치평론가 로 통하며 집필과 방송 등을 통해 사회 참여적 지식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 대해 오랫동안 반민주 독재 라는 시각을 견지해왔는데, 지난 2007년 12월에 출간한 저서 에서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0대가 꼭 알고 실천해야 할 정치와 민주주의 이야기 를 담은 이 책은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됐으며 2023년 1월 1일자로 26쇄를 찍은 청소년 인문교양 분야 스테디셀러다.
고성국 씨가 자신의 대표 저서 10대와 통하는 정치학 을 유튜브 채널에서 직접 소개하고 있다. 고성국TV 화면 갈무리
고 씨는 2023년 9월 25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고성국TV 에서 직접 이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제 대표 저작인 셈이다. 10대 중반에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정치와 민주주의가 뭔지 풀어서 쓴 책 이라며 아직도 계속 나가고 있고 아마 30쇄 가까이 찍었을 거다. 3만 권 넘게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는데 이 책을 기반으로 해서 제가 EBS 다큐프라임 교육 대기획 촬영도 한 적이 있다 고 설명했다. 이어 이 책은 제가 정말 우리 젊은 10대 청소년들, 그리고 정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우리 자유우파 국민들께 꼭 권해드리고 싶은 저의 대표 저작 이라며 꼭 구해서 보시고 여러분의 자녀나 손자, 손녀들한테도 꼭 추천해 주시면 좋겠다 고 거듭 자랑스럽게 권했다.
그러나 고 씨가 이 책에서 전개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관한 기술 역시 자유 우파의 당당한 역사 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머리말에서부터 제가 10대와 20대를 보낸 1970~1980년대는 참으로 질풍노도와 같은 시대였다.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수백 명이 죽었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일들이 불과 20년 전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군부독재 정권의 삼엄한 감시와 폭력 아래에 짓눌려 살면서도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주의를 기원했다 고 군부독재 시대의 야만성을 상기시켰다. 본문에서는 이들 정권의 폭정과 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10대 청소년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한다(일부 발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어도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가 곧바로 튼튼하게 자리잡지는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는 법과 제도보다는 대통령의 자의적 결정으로 다스려진 적이 많았습니다. 또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법을 무시하거나 헌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자의적 지배와 폭정을 끝낸 것이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었습니다.
군부가 주도한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과 군부가 입법부, 사법부까지 사실상 장악한 권력 구조였기 때문에 삼권 분립이 완전히 무시된, 철저한 대통령 중심의 독재 정권이었습니다. (…) 우리나라는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미국식 대통령제를 채택했지만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독재와 장기집권이라는 반민주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단다. 그로 인해 우리는 30여 년에 걸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싸우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독재 국가들은 신체의 자유를 무시했습니다. 법에 의하지 않고 영장도 없이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까지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죽은 교수도 있고 등산 갔다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야당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한 많은 대학생들이 강제로 군에 징집당했다가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죽음, 즉 의문사 를 당했습니다. 법을 위반하지도 않았는데 정보기관에 끌려가 불법으로 구금당하고 고문받고 죽기까지 한다면, 과연 그런 사회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선거의 기본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군부 독재 정권 시절에는 군 부재자 투표에서 비밀 선거가 지켜지지 않은 사례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투표인 명부를 빼돌려 조직적으로 간접 선거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성국 씨의 대표 저서 10대와 통하는 정치학 .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로 청소년 인문교양 분야 스테디셀러다.
김주열의 사망에 이어 고려대 학생들의 부상 소식까지 전해지자 서울의 전 대학과 고등학교가 술렁거렸고 마침내 4월 19일 전국적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 타도를 내세운 학생 시민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4·19혁명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시위의 발단이 되었던 이기붕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거듭된 공포 정치와 야당 탄압, 그리고 노동자, 서민들에 대한 강압적 통제 정책은 마침내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그러나 1979년 12월의 어느 날 밤, 막 다시 찾아온 민주주주의 봄을 짓밟고 질식시킬 새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세력이 전격적으로 단행한 12·12 쿠데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광주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불법적인 권력 탈취를 정당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신군부는 계획대로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를 기습 공격해 시민군의 지휘부를 비롯한 191명의 시민을 학살하였습니다.
유신 독재 정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한층 더 심하게 독재를 했습니다. 신문사, 방송국이 아예 폐쇄됐고 수천 명의 언론인, 공무원들이 해직됐습니다. (…)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법·무법 천지가 불과 20~30년 전 우리 나라의 정치 상황이었습니다.
6월 민주 항쟁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우리 국민 모두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한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 200만 명 이상이 전국에서 동시에 시위에 참가한 6월 18일의 집회를 기점으로 신군부는 아무리 군대를 동원해도 민주화 흐름을 막을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6·29 선언이라는 양보 정책을 택했습니다. 6·29 선언은 신군부가 정치적으로 양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고 씨는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 기고나 인터뷰 등을 통해 진보적 견해를 종종 피력했다. 2008년 9월 23일 프레시안에 쓴 코너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폭력 통치까지 정당화하고, 여·야가 협의해 만들고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지난 역사에 대해 유감 표명까지 한 4·3 사건을 좌익반란으로 다시 규정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에 정부 부처까지 이리저리 휘둘리는 작금의 사태를 신자유주의적 이념 과잉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라고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인 2009년 6월 12일 주간경향이 커버 스토리로 게재한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정치평론가 고성국 씨는 지금의 추모 민심이 갖고 있는 정치적 폭발력을 물 한 방울 로 비유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는 인식과 분노는 이미 차 넘쳐 출렁이고 있는데, 여기에 집권 세력의 사소한 실수 라는 물 한 방울 이 더해지면 터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고 씨는 이렇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 진영에 속한 시사평론가로 분류됐지만 2012년을 전후해 보수우파로 돌아서 강성 친박 성향을 띄다 2021년 이후로는 대표적인 친윤 윤 어게인 유튜버로 활약해왔다. 구독자 134만여 명의 고성국TV 를 운영하면서 숱한 보수·극우 유튜버 중에서도 톱클래스로 꼽히며 국민의힘의 막후 실력자로 불리기도 한다.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 선포 사흘 뒤이자 자신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1차 표결을 하루 앞두고 있던 2024년 12월 6일 고 씨에게 다섯 차례나 전화했던 사실도 드러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