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자수 작품으로 예술판을 뒤집은 여성 메리 린우드

자수 작품으로 예술판을 뒤집은 여성 메리 린우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여성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남편감을 찾고, 자식을 낳고, 수수하게 살림을 하며 현숙한 아내 로 충실해야 했다. 바로 이런 시대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메리 린우드(1755~1845)라는 여인은 영국 사회의 보수적인 성 역할 통념을 바늘 끝으로 뒤집어 버렸다. 그것도 너무 아름답게. 버밍엄에서 태어난 메리는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가 13살 때 첫 반란을 일으켰다. 유화 작품을 바늘과 실로 그대로 재현해내는 바늘 회화 를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이는 여성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는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외침이었다.   존 호프너가 그린 메리 린우드의 초상화, 1800년경.(위키피디아) 이게 그림인가 바느질인가?  런던이 열광하다 메리의 재능은 금방 영국 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 1785년 그의 작품들이 왕실에 소개됐고, 1786년에는 예술, 제조업, 상업진흥협회 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진짜 대성공은 따로 있었다. 1798년 메리는 런던의 해노버 광장 홀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이후 레스터 광장으로 옮겨져 무려 반세기 이상 런던의 명물이 됐다. 당시 런던 사람들은 말했다. 저 여자가 바꿔놓은 바늘질을 봤나? 메리의 작품들은 가이즈버러(1727~1788), 레이놀즈(1723~1792), 루벤스(1577~1640)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실과 바늘로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특히 나폴레옹 초상화는 약 70센티미터 크기로 우아하게 재현되어 남켄싱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매달린 메추라기 , 메리 린우드의 수예작품. (위키피디아) 90세까지 바늘을 놓지 않은 비즈니스우먼 더욱 놀라운 점은 메리의 비즈니스 감각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예술가 에 머물지 않았다. 1809년 레스터 광장에 자신의 전시공간을 차리고 직접 운영했다. 여성으로서 런던에서 자기 소유의 화랑을 운영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19세기 초 런던에서 여성 사업가 라는 단어조차 없을 때, 메리는 이미 CEO였다. 그 방법도 독특했다. 메리는 작품을 팔지 않았다. 순수히 전시만으로 소득을 창출하는 전시료 비즈니스 모델 을 만들어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구독경제 선도였다. 우리 작품을 보고 싶으신가? 표를 사세요.   딱따구리와 제이 의 세부 묘사, 메리 린우드의 수예 작품.(leicestermuseums) 이게 예술인가?  죽은 뒤에야 터진 비난 물론 모두가 메리를 환영하지는 않았다. 정작 비판은 20세기에 터져 나왔다. 1919년 에밀리 리 로우스(1880~?)라는 여성 저술가는 메리의 작품을 맹렬히 비난했다. 에밀리는 메리의 바늘 회화 작풍이 악의적인 역겨운 유행을 만들었다고 깠다. 심지어 차라리 그 여자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 이라고 썼다. 더욱이  끓인 기름에 삶아지는 것이 나을 정도 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남겼다. 왜 그랬을까? 메리 린우드의 바늘 회화 트렌드가 19세기 중반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하면서 좋지 않은 모방 작품 들이 떼 지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메리가 불러온 유행이 왜곡되고 대중화된 뒤 그 유행의 원죄자 가 된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메리 린우드의 수예로 만든 자화상, 1785년경.(artherstory) 영국 사회에 남긴 진짜 유산,  여성도 예술가다 하지만 비난은 중요하지 않다. 메리 린우드가 영국 사회에 남긴 것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이었다. 첫째, 여성 예술가의 지위 확립이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여성에게 예술가 라는 표현은 당치 않았다.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는 50년 이상 계속해서 작품을 전시하고 수익을 창출했다. 이제 누가 그것을 취미 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둘째, 여성 사업가의 탄생이다. 메리는 자신의 화랑을 직접 운영했다. 스스로 재산을 관리했다. 고용인을 거느렸다. 단순히 예술만 한 게 아니라 비즈니스 를 했다. 이는 19세기 초반 영국 여성으로서는 거의 혁명적 행동이었다. 셋째, 수명 연장의 상징이다. 메리는 90세까지 살면서 78세에 마지막 작품을 완성했다. 사실 이것도 중요하다. 19세기 영국 여성의 평균 수명은 40대 초반이었다. 생존 자체가 기적이었던 시대에 메리는 90년을 살면서 50년 이상 활동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기 단 1년 전까지 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에게 은퇴 라는 개념은 없었다.   메리 린우드의 디테일, 자화상, 1785년경. (mary-linwoods-balancing-act) 결국 잊혔다.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메리 린우드는 생전에 런던의 명물 이었다. 왕실도 찾아갔다. 신문도 큰 기사로 실었다. 그런데 1845년 그녀가 죽자, 그녀의 작품들은 크리스티즈 경매에서 생전 가치의 극히 일부로 떨어졌다. 한때 런던의 명물이던 작품들이, 수십 년 못 가 구식이고 취향 없는 것 으로 낙인 찍혔다. 1919년 로우스가 그토록 극렬하게 비난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비난하는 상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유행은 가고 취향은 변했는데 당신의 이름은 남아 있다 는 억울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리 린우드의 수예 작품 ​​린우드 겔러리 . (김성수 시민기자) 21세기의 우리는 다르게 봐야 한다 메리 린우드의 진정한 의미는 작품의 예술성에 있지 않다. (물론 그 자체로도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그 작품이 만들어진 환경 과 그것을 만든 여성 에 있다. 18세기 영국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 또는 평생 혼자 살거나 총각 작가의 집에 기생하기 정도였다. 그 속에서 메리는 제3의 길을 만들었다. 바늘과 실로. 전시회로. 사업으로.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살고, 존경받는 예술가로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보수적인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그녀는 여성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바늘이 있으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내가 만든다. 이것이 메리 린우드가 바늘과 함께 영국 사회에 심어놓은 씨앗이다.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메리가 남긴 작품들은 이제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과 로열 컬렉션에 소장돼 있다. 한때는 비난받던 것들이 지금은 문화유산이 됐다. 시간이 항상 옳은 판사는 아니지만, 가끔은 옳은 판사가 되어주기도 한다. 메리 린우드가 그 사례다. 메리 린우드 갤러리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5.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