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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파고 또 파고 삽을 든 고집장이 해럴드 그레이

파고 또 파고 삽을 든 고집장이 해럴드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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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뒷마당을 파헤치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를 위대한 영웅 들이 만든다고 믿는다. 왕이 칙령을 내리고, 장군이 깃발을 꽂으면 역사가 완성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뒷마당에는 삽을 들고 땅을 파며, 무릎에 흙을 묻히고, 묵묵히 보고서를 쓰던 사람들이 있었다. 해럴드 세인트 조지 그레이(Harold St George Gray, 1872~1963)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91세까지 살았고, 그 긴 생애 동안 영국 땅 어딘가를 끊임없이 파고 기록했다. 이름도 거창하고 생애도 기니,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자.   해럴드 세인트 조지 그레이(Art UK) 열여섯 살에 장군 밑에 들어가다 1872년 잉글랜드 중부 리치필드(Lichfield)에서 태어난 그레이는 10대 후반인 1888년에 형 클로드와 함께 당대의 저명한 고고학자 어거스터스 헨리 레인 폭스 피트 리버스(Augustus Henry Lane Fox Pitt-Rivers, 1827~1900) 장군의  조수로 들어간다. 피트 리버스 장군은 흔히 영국 고고학의 아버지 로 불리는 인물이다. 군인 출신답게 발굴에도 군대식 체계를 도입한 그는 층위별 발굴법과 유물의 체계적 기록을 정착시켰다. 쉽게 말해, 아무 데나 막 파지 말고, 어디서 나왔는지 꼭 적어두라 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을 학문적으로 만든 사람이다. 형 클로드는 1892년 장군과 다투고 캐나다로 떠났다. 반면 그레이는 장군이 19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열두 해를 버텼으니, 그레이에게는 남다른 인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었거나,   1827년 4월 14일의 어거스터스 헨리 레인 폭스 (위키피디아) 피트 리버스 박물관을 거쳐 서머싯으로 장군 사후 그레이는 1899년 옥스퍼드 대학교 산하 피트 리버스 박물관의 조수가 되었다가, 1901년에 서머싯 고고·자연사 학회의 사서 겸 박물관 관리인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1949년까지 무려 48년을 그 자리에 머문다. 요즘 말로 하면 한 직장에서 거의 반세기를 버틴 초장기 근속자 다. 퇴직금 계산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는 이 기간 잉글랜드 남서부 곳곳을 발굴했다. 에이브버리, 글래스턴베리 호수 마을, 미어 호수 마을, 아버 로우, 맘버리 링스 등이 그의 발굴지 목록에 올라 있다. 에이브버리는 스톤헨지보다 규모가 크지만 덜 알려진 선사시대 돌 유적지로, 그레이는 그곳에서 14년에 걸쳐 조사를 진행했다. 삽질이 아니라 탐정 수준의 집요함이었다. 그의 장점은 꼼꼼한 기록과 정밀한 제도(製圖) 실력이었다. 유물 하나하나에 세심한 표기를 남긴 그의 손 글씨는 오늘날 에이브버리 유물 상자에서 여전히 발견된다. 아내 플로렌스 세인트 조지 그레이(Florence St George Gray, 1875~1970)는 남편의 발굴 현장에 거의 매번 동행하며 조수 역할을 했다. 1921년 인구조사에서 플로렌스는 직업란에 처음으로 박물관 조수 라고 썼다. 남편의 사망 기사에조차 그냥 그레이 부인 으로만 기록된 것을 보면, 당시 학계가 여성을 어떻게 대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아버 로우(Arbor Low, 김성수 시민기자) 귀신을 쫓아낸 사나이, 프레더릭 블라이 본드 사건 그레이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단연 프레더릭 블라이 본드(Frederick Bligh Bond, 1864~1945) 해고 사건이다. 본드는 1908년 잉글랜드 국교회로부터 글래스턴베리 수도원(Glastonbury Abbey) 발굴 책임자로 임명된 건축가 겸 고고학자였다. 그는 발굴을 꽤 잘했다. 에드거 예배당(Edgar Chapel)을 비롯한 여러 건물 터를 찾아냈다. 문제는 그 방법에 있었다. 1919년 본드는 기억의 문 (The Gate of Remembrance)이라는 책을 출판하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자신이 발굴 위치를 결정한 것은 중세 수도사들의 영혼이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즉, 그는 1907년부터 존 앨런 바틀렛(John Allen Bartlett)이라는 사람을 앉혀 놓고 자동 쓰기 (automatic writing) 방식으로 귀신에게 묻고 삽을 꽂았던 것이다. 그것도 약 70회에 걸친 강신술(降神術) 모임을 통해서, 국교회는 당연히 경악했다. 귀신 들린 수도사에게 발굴 지도를 받은 셈이니, 영국 의회에서까지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결국 본드는 1921년 해고되었다. 그런데 그레이가 이 해고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본드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았고, 냉정한 경험주의자로서 과학적 발굴 방법론을 지키는 쪽에 섰다. 귀신 말보다는 지층분석을 믿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레이야말로 안 돼요, 그건 너무 비합리적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드의 발굴 성과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대중과 언론은 본드 편이었으니까,   1921년에 촬영된 프레더릭 블라이 본드(위키피디아) 끝내지 못한 보고서들  그레이에게 뚜렷한 약점도 있었다. 그는 발굴은 잘 했지만 결과를 제때 출판하지 않았다. 미어 호수 마을 발굴보고서는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작업임에도, 1권이 1948년에야 나왔다. 발굴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책이 나온 것이다. 동시대 고고학자들은 이 점을 비판했다. 당시 학문 방법론이 급격히 발전하는 시기에, 그레이의 접근법이 뒤처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귀신에게 묻지 않고 체계적으로 파겠다는 원칙은 세웠는데, 그 결과물을 적시에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지식이 서랍 속에 갇혀 있으면 사회에 기여할 수 없다. 정확하게 발굴했어도, 공유되지 않는 지식은 반쪽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1년부터 1949년까지 48년간 직을 유지하고, 1951~1952년에는 서머싯 고고·자연사 학회 회장까지 지냈다. 학회 누리집은 그를 개인으로서 학회를 위해 가장 많은 것을 이룬 사람 이자 서머싯 고고학 역사의 핵심 인물 이라고 평가했다.   1914년 4월에 촬영된 에이브버리의 둑과 도랑 사진으로, 둑에 있는 인물은 그레이 부인과 그녀의 아들 라이오넬.(The Avebury Papers) 한국에서 읽는 그레이의 삶,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가 해럴드 세인트 조지 그레이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한국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유사역사학 논쟁이다. 환단고기 류의 자료를 근거로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특정 유물에 민족주의적 서사를 덧씌우는 일들이 학술 현장과 대중 사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꿈틀거린다. 방법론보다 결론이 먼저이고, 자료보다 믿음이 앞서는 모습이다. 그레이가 본드 사건을 통해 보여 준 것은 단순하다. 결과가 맞더라도 방법이 잘못되면 그 성과는 신뢰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여성 연구자 문제다. 플로렌스 그레이는 반세기를 현장과 박물관에서 일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레이 부인 이었다. 현재 한국학계와 연구기관에서도 낯설지 않다. 기여는 공동이어도 이름은 혼자 남는 관행, 그 관행을 바꾸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걸음이다. 세 번째는 기록 공개의 문제다. 한국의 여러 연구 성과들이 학술 보고서 형태로 국가기관 창고에 잠들어 있다. 발굴했으되 출판되지 않고, 조사했으되 공개되지 않은 지식들이다. 그레이의 뒤늦은 보고서 출판이 비판받았던 것처럼, 지식은 공개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해럴드 세인트 조지 그레이의 팀이 1922년 4월, 에이브베리 도랑을 가로지르는 구간 위에 서 있는 모습. (플로렌스 촬영 – The Avebury Papers) 삽 하나로 91년을 산 사람 해럴드 세인트 조지 그레이는 1963년 91세의 나이로 서머싯 마톡(Martock)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편지와 발굴 보고서는 지금도 서머싯 유산 센터(Somerset Heritage Centre)와 에이브버리의 알렉산더 케일러 박물관(Alexander Keiller Museum)에 보관되어 있다. 귀신의 도움도, 화려한 전쟁영웅의 서사도 없이, 그냥 삽과 기록과 꼼꼼함으로 반세기를 버텼다. 역사는 결국 거창한 선언보다 지루한 기록이 만든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도, 어딘가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기록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의 진짜 토대를 쌓고 있다. 그레이처럼,   아버 로우(Arbor Low)에서의 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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