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쏘았니? 54년 전 미 대학에서 벌어진 공권력 학살극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오하이오주 켄트. 인구 2만 7000명. 그곳에 자리한 주립 켄트 대학교. 학생 수 1만 8000명.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라기에 켄트는 작은 대학도시다.
켄트, 2024년 5월
지난 4일, 켄트 대학교는 5·4학살—켄트학살이라고도 부르는—54주년 추모식을 가졌다. 학살을 계기로 만들어진 학교의 ‘분쟁·평화학부(School of Conflict and Peace Studies)’는 추모행사의 하나로 전남대학교와 함께 ‘광주항쟁을 기억하며(Remembering the Gwangju Uprising)’라는 제목의 학술 모임도 열었다.
5·4학살이란 1970년 5월 4일, 교내에 진주한 시위 진압군의 발포로, 네 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한 대형 사건을 지칭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 전역에서는 대학생 중심의 반전·평화 운동이 끈질기게 이어졌고, 이 와중에 몇몇 대학에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주 방위군이 배치됐던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가자 살육전쟁을 규탄하는 반전·평화 운동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올해의 추모식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당시 피격으로 허리 아래가 마비되는 중상을 입은 D. 칼러는 ‘승리의 종(Victory Bell)’—1970년 5·4 시위의 시작을 알린 종—을 울렸고(왼쪽 사진), 학생들은 5·4의 비극을 되새기며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와 농성 집회를 열었다.(오른쪽 사진). 칼러는 “역사를 잊는 자, 역사를 반복한다”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정의와 불의의 문제, 권력 남용의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한 학생은 “우리가 벌이는 반전·평화 운동이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제 시계를 54년 전으로 돌려보자.
켄트, 1970년 5월
1970년 4월 30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캄보디아로까지 확대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비밀리에 공습을 벌였고, 이미 지상군도 투입했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평화협상 추진을 내건 68년 선거공약의 배신이었다. 발표 바로 다음 날, 각지의 대학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프린스턴 등 몇몇 대학에서 전국적 수업거부 운동을 제안했다. 제안은 금세 결의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투쟁으로 승리를! 5월 4일, 수업거부!’ 구호를 내걸었다.
5·4 동맹 수업거부 포스터
켄트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1일의 시위가 끝나고 늦은 밤, 시내에서 경찰과 학생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시내 여러 군데에서 횃불이 피어올랐고, 도심 상점 몇 곳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상황이 심각해졌다. 시장은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를 선포하고 켄트뿐 아니라 주변 지역 경찰까지 소집했다. 최루탄을 쏘면서 강제해산에 나선 경찰에 밀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다음날 시장 주재의 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장에서는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오갔다. ‘학생들이 무기를 들었다’ ‘수돗물에 마약을 풀 것이다’ ‘반전 구호를 내걸지 않는 상점은 불태운다고 한다’ ‘도심을 폭파하려고 학생들이 땅굴을 파고 있다’ 등등등. 회의 끝에 시장은 주지사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지사는 이를 즉각 수용했다.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는 계속됐고, 저녁에는 학군단 건물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밤 10시, 1천 명 규모의 오하이오 방위군(National Guard)이 대학으로 진입했다. 학생과 교직원과 군인과 경찰과 소방대가 엉킨 학교는 혼란의 현장이었다.
일요일인 3일, 주지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사는 학생들을 ‘나치 당원, 공산주의자, KKK, 우익 민병대보다 더 사악한 패거리’라고 비난했다. ‘전문 군사혁명 조직’이라고도 불렀다. 그날 저녁, 학생들은 연좌 농성을 벌이면서 총장과 시장 면담을 요구했다. 군인들은 통행금지령이 발동됐다며 학생들을 밀어냈다. 격렬한 몸싸움과 최루탄과 돌이 난무했다. 다음 날은 동맹 수업 거부의 날이었다.
군 발포로 대학생 4명 사망, 부상자 9명
학교 당국은 4일 집회가 취소됐다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러나 12시쯤 3천 명 정도가 이미 교정에 모여들었다. 소수의 고등학생들도, 휴학 중인 학생들도, 일반 시민들도 포함돼 있었다. 시위 시작을 알리는 ‘승리의 종’이 울렸다. 학생들은 ‘캄보디아 확전 반대, 징병제 철폐, 학내 진입 군대 철수’ 등의 구호를 외치며 캠퍼스 곳곳에서 행진을 이어갔다. 군은 불법집회이니 즉시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을 쫓았다.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실탄 장전을 명령했다. 군인들은 진압 자세로 전진하면서 시위대를 캠퍼스 한쪽으로 밀어냈다(사진 참조).
그 와중에 일부 군인들이 울타리가 쳐진 축구장에 갇힌 모양새가 됐다. 학생들의 함성과 돌이 날아들었다. 군인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일부는 조준사격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직후, 30명 정도의 군인들이 돌아서더니 시위대를 향해 갑자기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12시 반 경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13초 동안 60발이 넘는 총알이 발사됐다. 상당수는 공중이나 땅을 향해 쏘았지만, 일부는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 발포했다. 3명의 대학생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4번째 학생은 이송 직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상자는 9명이었다.
조준사격 자세를 취하는 군인들. 그 앞에서 깃발을 흔들던 이 학생도 총상을 입었다.
왜 쏘았니?
사건 직후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왜 총을 쏘았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군인들은 되레 해산하지 않으면 다시 발포하겠다고 협박했다. ‘더 큰 살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교수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학생들은 해산했다. 그날 학교는 즉시 6주 간의 휴교에 들어갔다.
5·4 비극의 핵심은 군인들의 발포다. 발포 4년이 지나 당시 진압군 중 일부가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그들은, ‘발포는 시위대의 위협을 느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발포 명령에 대해서는, ‘설령 있었다고 해도 주변의 소음으로 들을 수 있는 정황이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구성됐던 진상조사위원회는 9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발포 명령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총격 상황이 녹음된 자료 테이프에 발포와 관련한 정황이 일부 들어있지만, 확실성 여부를 두고 음성분석 전문가와 수사기관의 해석은 엇갈린다. 사망 학생의 유족, 부상자와 가족, 그리고 켄트 학생들은 군 지휘관의 발포명령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지금도 오하이오주와 연방정부에 학살의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발포군인을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왜 이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닉슨은 1968년, 베트남 전쟁 종식과 징병제 철폐 등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60년대 내내 미국 사회를 괴롭혔던 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고, 징병제도 재학생에 한해 70년 1학기까지만 징집을 유예한다는 임시 조치에 그쳤다. 그러더니 이젠 미군이 베트남을 넘어 캄보디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이다.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 운동의 맨 앞에 서 있던 대학생들에게, 그것은 공약 파기 정도가 아니라 대형 사기극이었다.
베트남전쟁의 국내판 켄트학살, 54년 후 이제는 가자전쟁 유탄인가
당시 학생 사진기자였던 J. 필로는 어렵사리 학살 현장을 담았다. AP는 이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미국 사회는 경악했다. 사진은 70년대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이 저 먼 이방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일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동시에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철저하게 눌러버리는 권력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입증했다. 온몸으로 슬픔을 울부짖는 사진 속의 어린 여성을 누군가는 ‘켄트의 피에타’라고 불렀다.
전국의 대학가에 노도와 같은 분노가 몰아쳤다. 4백만에 이르는 학생들이 수업거부에 동참했고, 450여 개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5월 10일에는 워싱턴 DC에서 10만이 참여, 켄트학살 책임자 처벌 및 전쟁 중단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공권력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8일에는 뉴멕시코 대학에서 진압군이 대검으로 찌르며 시위대를 밀어내는가 하면, 15일에는 미시시피주 잭슨대학에서 2명의 학생이 이번에는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닉슨의 연설비서관은 ‘이건 내전’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신변안전을 위해 이틀간이나 백악관을 떠나야 했고, 정부청사 경비를 위해 82 공수부대를 동원했다. 물론 닉슨은 반전·평화 운동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위대를 ‘공산주의 불량배’라는 식으로 모욕했다. “폭력을 휘두르면 참혹한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라며 학생들의 죽음을 폄훼했다. 그뿐 아니라 반전운동 지도부를 감청하라는 불법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미국이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야. 미국은 지금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 닉슨의 변호사는 훗날 당시 참담했던 자신의 속내를 그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켄트학살은 베트남 전쟁의 국내판 비극이다. 그 50여 년 후, 이번에는 가자전쟁의 유탄이 대학가에 쏟아지고 있다. 전쟁이 분단국가 미국을 더 깊고, 더 넓게 갈라놓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