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달래기 한계, 어른이 먼저 베푸는 내리사랑 해법 [칼럼] 4050 세대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거대한 전환기를 직간접으로 경험했다. 이들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으로 사회를 바꾸고 승리해 냈던 성공의 효능감 을 몸소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헌신은 명예롭고 가치 있는 멋 이다.
그러나 이 멋은 지금의 2030 세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먹히지도 않는다. 그들에겐 그런 기억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무한 경쟁 속에서 자란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청년 정책조차 위선으로 여길 만큼 소외감과 박탈감이 깊다. 이들에게 공동체는 무한 경쟁의 싸움터이며, 그 속에서 성공과 승리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생존해 내는 것만이 유일한 멋 이다.
일각에서는 청년 세대의 우경화를 우려한다. 물론 미디어나 정치권의 선동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이념이나 진영 논리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이런 경향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생존 본능 의 발현이자, 기성세대를 향한 뿌리 깊은 반감의 결과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려 한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을 고생을 모르는 온실 속 화초 라며 철부지 취급을 한다고 여겨 반감을 갖기 마련이다.
6·3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광역단체장 후보로 출마했던 한 후보의 청년 7대 공약 발표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단절을 극복하려면 이제 청년 달래기 정책 이라는 위선을 벗어 던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결핍을 채우고 불만을 달래기 위해 당장 돈을 쥐여주거나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는 임시방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인이 청년들의 공간에 찾아가 한두 번 얼굴을 비추고, ‘2030만을 위한 특화 정책’이라며 생색을 내는 행태는 눈속임일 뿐이다. 마음이든 몸이든 떠나지 않게 붙잡아두려는 수준의 접근은 끝내야 한다.
아이가 아파서 짜증을 낸다고 해서, 정작 필요한 치료는 제쳐둔 채 당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과자만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주머니에 병원비만 두둑이 넣어주거나 차로 병원 문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것도 올바른 부모의 태도가 아니다. 참된 부모라면 아이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고 함께 병원으로 걸어가야 한다. 병으로 인해 다친 아이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혹시나 치료 과정이 무섭지는 않을까 꼭 안아주며 다독여야 한다. 그리고 병이 완전히 나은 후에도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늘 곁에서 세심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우리 청년들을 향한 시선도 이와 같아야 한다.
경기도지사 시절, 이재명의 서민 정책이 대중에게 강력한 효능감을 주는 이유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정책이 빛나는 것은 서민이 아닌 자가 서민을 위해 시혜를 베푼다는 식의 오만한 접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바탕 위에 나를 포함한 소중한 다수 국민 을 향한 진정성이 묻어나기에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청년 정책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을 우리와 다른 타자(他者) 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관리하려 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동떨어진 외딴 섬 으로 보지 말고, 철저히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아이의 문제, 내 형제자매의 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진짜 정책이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와 다른 청년들의 모습, 심지어 철없어 보이고 부족해 보이는 것들까지도 혀를 차거나 한심한 눈초리로 보지 말아야 한다. 따스한 눈으로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역시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을 온몸으로 표출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X세대 이지 않았던가. 그때의 우리를 기억한다면, 지금 청년들의 방황과 저항 또한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2030만을 위한 정책을 넘어, 모든 국민과 주민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정책의 틀 속에 2030을 진정으로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묻어나야 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묻어나듯, 우리의 소중한 것까지 기꺼이 내줄 수 있는 헌신과 책임의 자세가 정책의 뿌리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 청년들은 격리되돼 철저한 관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주민들의 삶에 가장 밀접한 일자리와 지역 공동체 정책을 보자. 단순히 예산을 쪼개어 단기 아르바이트성 일자리를 양산하는 대신, 노인 돌봄, 병원 안심 동행, 가정보육 도우미 등 필수적인 사회서비스 영역에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다만 이때 청년들의 참여를 단순한 단기 보조 역할로만 제한하지 말고, 안정적인 급여와 지속 가능한 인센티브, 확실한 미래 비전을 보장하며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노인 관련 프로젝트나 마을 행사, 동네 운동회 등을 청년들의 아이디어로 기획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실험도 필요하다. 청년들의 톡톡 튀는 감각과 기성세대의 인프라가 결합할 때, 청년들은 자신들이 착취나 소외의 대상이 아닌 공동체를 이끄는 당당한 ‘성장의 파트너’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날 선 비판과 반감을 쏟아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의 방증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무한 경쟁 속에서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던 청년들이기에, 기성세대의 위선이 아닌 진정한 어른의 품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핵심은 삶 속에 최대한 함께하려는 노력이다. 그 속에서 어른의 사랑과 헌신이 진정성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묻어나야 한다.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밥상의 온기 같은 것이어야 한다. 같은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좋아하는 반찬 하나 더 얹어주고, 자식의 밥이 모자라면 내 밥을 덜어 기꺼이 보태주는 일상적이고도 묵직한 부모의 사랑 말이다.
먼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귀를 기울이며,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가정이든 국가든, 진심과 사랑을 듬뿍 담은 어른들의 태도가 흔들림 없이 지속된다면 그들도 마침내 느끼고 알게 된다. 간절한 진심은 어떠한 형태로든 결국 닿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불안한 현대인의 일면을 AI 생성 이미지로 꾸며 봤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금 우리의 품에서 자라나는 청년들도 머지않아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가 된다. 우리는 지금 급격한 AI 전환 시대를 마주하며, 인간성과 윤리가 상실될지 모르는 거대한 문명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차가운 기술의 시대에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대안은 역설적이게도 어른이 먼저 베푸는 뜨거운 내리사랑 이다. 오늘날 우리가 청년들에게 눈물로 심어준 사랑과 신뢰는, 내일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또 그다음 세대를 인간답게 품어 안을 가장 강력한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그 간절함이 가닿아 신뢰가 회복될 때, 우리가 싸워 일군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도 청년들의 삶에 비로소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렇게 신뢰와 사랑을 먹고 자란 청년들은 우리 공동체에 동화되든, 우리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훌륭하게 뛰어넘든,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것이다.고영진 시민기자 sunofdarknes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