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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우리가 몰랐던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들

우리가 몰랐던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들
[뉴스]
1945년 해방 직후사. 정병준 지음, 2023. 돌베개 1945년 9월 6일 찰스 해리스 준장을 단장으로 한 미국의 북위 38도선 이남(한국) 점령군 선발대 31명이 오키나와를 출발해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약 3주 전에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때까지 여전히 한반도를 공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조선총독부와 제17방면군 등 조선 주둔 일본군이었다. 해리스 준장 일행은 서울 조선호텔에 자리를 잡고 총독부 고관들과 만나 일본의 항복 준비, 미군 숙소, 연합군 포로문제 등을 협의하면서 맥주 파티까지 벌였으나 한국인들과의 접촉은 엄금했다. 해리스는 한국을 알고 있던 자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잘 하고 성실하다’는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야스마 얘기를 들었고, 오다에게 자신의 통역사 역할을 맡겼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제17방면군 공식 통역관이었던 오다는 주한 미24군단과 일본 17방면군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일본군 경성연락부에서 근무하면서, 사령관이 공석 중이던 17방면군의 참모장 스가이 도시마로가 매일 미군 사령부를 찾아가 미24군 단장이자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 군정청 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을 만날 때 통역을 했다. 오다는 미군 점령 초기 2개월 간 작성된 350통의 영문 서한과 일본에 소환돼 간 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에게 전달된 하지의 지시사항을 작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 점령군 수뇌부와 접촉면을 넓혔다. 미군정 문고리권력자 이묘묵 하지 사령관 통역사 미24군단은 오다를 통해 많은 통역사를 확보했는데, 그 중에 하지 중장 통역사 이묘묵이 들어 있었다. 미묘묵은 미 군정기의 문고리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통역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묘묵은 9월 8일 제물포에 상륙한 미 점령군 본진이 다음날 일본군 항복식을 열고 그 다음날인 10일 서울 명월관에서 서울 시민 주최로 열린 연합군환영대회에 코리아타임스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해 유창한 영어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악의적으로 날조된 연설을 했다. 점령군 수뇌는 그의 유창한 영어 연설”을 칭찬했다. 몽양 여운형이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는 이묘묵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몽양이 친일파였다면 공산주의자일 수 없고, 공산주의자였다면 친일파가 될 수 없었다. ‘리노미야 보모쿠’라는 칭씨명을 썼던 골수 친일파 이묘묵이 미 점령군 수뇌 앞에서 공개적으로 몽양을 친일파요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것은 반소련, 반신탁, 반공의 화신이었던 하지 휘하 미 점령군에게 혐오와 반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패망 뒤 급속도로 변해가던 해방 정국의 한반도 권력구조가 그 무렵 일제 총독부의 잔존권력과 미 점령군의 지지를 받은 친일파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급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휘문고보에 모여든 군중과 여운형(중앙)  위키피디아 여운형의 건준이 주도했던 초기 해방정국 일본정부가 38선 분할과 미국 소련의 남북 분할점령 내용을 담은 연합군 일반명령 제1호를 알게 된 것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선언을 한 지 닷새가 지난 8월 20일 항복조항 접수차 필리핀 마닐라에 파견된 참모차장 가와베 도라시로가 그곳에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만난 뒤였다. 그 소식이 내무차관을 통해 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통보된 것은 항복선언 1주일 뒤인 8월 22일이었다. 이 8월 22일 전까지 조선총독부와 일제 주둔군은 8월 9일 참전선언 뒤 물밀 듯 밀고 내려오던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으로 보고 대비 중이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접수할 경우 타협의 여지 없이 천황제를 비롯한 군국일본 체제가 폐지되고, 동시에 한반도 주민들의 해방 열기가 일시에 분출되면서 패전 일본인들의 기득권이 일거에 부정당하면서 안전한 철수가 위협받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정무총감 엔도 등이 패전 선언 당일인 8월 15일 여운형을 만난 것은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반일의 주류였던 좌파 및 민족주의 세력을 설득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 주도록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이 그 세력에게 영향력이 큰 여운형이라고 판단했다.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 초청을 받아 총독부로 간 여운형에게 그들은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 민중에게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든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해 달라”(모리타 요시오 )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이에 대해 5가지 요구를 제출했고, 그것은 즉석에서 무조건 받아들여졌다. 전 조선 각지에 있는 정치 경제범 즉각 석방 8월, 9월, 10월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애 명도할 것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 구속과 간섭을 말 것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력과 청년조직에 대해 간섭 말 것 전 조선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도 주지 말 것 총독부는 그러나 연합군이 들어와 지배권을 완전히 이양할 때까지 권력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여운형에게는 그때까지 치안유지 협력 차원에서 요구조건을 수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운형에게 그것은 치안유지 협력이 아니라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일제 패망 전부터 준비해 온 건국동맹 등을 토대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신속하게 이어졌다. 일제 패전 선언 당일 잠잠했던 조선사회는 다음날인 8월 16일 여운형 등이 서대문 형무소로 가서 2000여 명의 독립운동가 등을 석방시키고 그들이 종로까지 행진하면서 전국적으로 열광적인 해방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국인에게 진짜 해방일은 8월 16일이었다. 그 열기에 눌린 총독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총독부는 친일 지주와 자본가들로 구성된, 나중의 한민당 세력의 송진우 등과도 접촉하면서 여운형의 건준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일본지배가 그렇게 무너질 줄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한민당 세력은 그때까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1945년 10월 20일 조선총독부(중앙청) 앞에서 서울시민 주최로 열린 연합군 환영대회. 왼쪽 선글래스를 낀 사람이 하지 사령관, 중앙에 선 사람은 아널드 군정장관, 그리고 그 오른쪽에서 발언하고 있는 사람이 이묘묵 하지 사령관 통역사. NARA 1945년 해방 직후사 수록 8월 22일 미군이 점령군” 알려지면서 판세 급변 그렇게 급속도로 굴러가던 해방정국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8월 22일 한반도가 분할되고 서울을 포함한 38선 이남땅을 점령하는 것이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사실이 전해진 뒤였다. 자신들을 무장해제시키러 오는 것이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제 식민지배자들은 엄청난 안도와 함께 새로운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조선 주둔 17방면군은 8월 31일부터 미24군단과 통신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미군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17방면군 최고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중장이 미24군단 사령관 하지에게 보낸 전문 중에는 평화와 질서를 혼란시킴으로써 상황의 이득을 얻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선동가들이 조선인들 사이에 존재한다”며 귀 부대의 점령 및 수송을 완료할 때까지 경찰과 헌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외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일본군이 필요하다”는 것도 있었다.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선동가들‘이란 바로 여운형이 이끈 건준세력이다. 그들이 미24군단에 전달한 내용의 핵심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그리고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을 전제로 여운형 안재홍 등과 타협해서 받아들인 건준세력을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 약탈자로 매도하면서 그들을 미군의 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미군과의 연락에서 그때부터 통역을 맡은 자가 총독부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였고, 그들은 오다의 통역을 통해 찰스 해리스 선발단을 비롯한 미 점령군의 도착에 대비하는 한편 한민당 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건준세력 분열공작을 강화했다. 미국 유학-연희전문-기독교-한민당 연결고리 오다가 점령군 사령관 하지에게 이묘묵을 추천하게 만든 연결고리는 연희전문이었다. 10년간 미국유학생활을 하고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일본대표단 촉탁으로 참석하기도 한 오다는 조선총독부 초청으로 1922년 조선에 와서 총독부 통역관이 됐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9년간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있었다. 연희전문 졸업 뒤 1922년부터 10년간 허버드와 보스턴대 등에서 유학한 이묘묵이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 것이 1934년이었고, 그도 1941년 이후 연희전문 학감, 학교장으로 이사회에 관여했다. 이묘묵은 1937년에 중국 본토침략을 시작한 일제가 조선사회 지도층을 친일파로 전향시키고 독립운동의 명맥을 끊기 위해 치안유지법 혐의를 걸어 날조한 ’수양동우회‘사건 때 붙잡혀 들어갔다가 ’사상전향‘을 하고 석방된 뒤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여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도 등재된 골수 친일파가 됐다. 이묘묵이 오다의 정보와 권유로 미군정 수뇌부에 접근할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것이 코리아타임스였고,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명월관의 미 점령군 환영회에 그 신문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첫 호가 9월 5일에 나오고 2호가 9월 23일에 나온 코리아타임스는 정상적인 언론매체로 보기 어려웠으나 거기에 한민당과 연희전문학교, 기독교계, 미군정계 인사들이 다수 가담했고, 그들은 미군정 요직에 대거 등용됐다. 김영희 미군정 법률국장 보좌관, 하경덕 입법의원 관선의원, 백낙준 조선교육심의회 고문, 오천석 학무국차장, 문교부장 등이 다 그 등용문을 거쳤다. 그들은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연희전문학교와 서북지역 기독교, 흥사단 출신이라는 고리로 연결돼 있었다.   1946년 4월 25일 대한경제보국회에 2000만 원 대부를 허가해 주라는 하지 사령관의 특별명령(1급 비밀) NARA  1945년 해방 직후사 수록 ’일제 권력의 불하‘ 구조 이것은 극단적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는 지금의 한국 정치사회 현실과도 이어져 있는 ’일제권력의 불하‘ 구조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백낙준은,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등장해 고위관료 임명을 책임졌던 미군쪽의 한국어 통역자 조지 윌리엄스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부보들끼리도 친한 사이였다. 점령 초기 친일경찰 유지, 기용 등으로 거센 반발을 샀던 미군정 인사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하지 사령관의 개인비서 겸 정치고문 윌리엄스였다. 호주 브리즈번의 미 해군기지 병원의 연구소장이던 그가 그렇게 발탁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주한미군을 통털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단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오다 야스마가 하지의 통역사가 되고 미 점령군의 한국인 기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정을 전혀 몰랐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조차 없었던 미 점령군 통치 3년 동안 패망한 일체의 조선총독부 권력이 사라진 진공상태를 차지한 것은 통역사와 (연희전문 등과 연결된) 미국 보수기독교계, 그리고 친일 지주와 자본가들이 대종을 이룬 한민당계, 친일에서 친미로 재빨리 갈아탄 미군정계 인사들이었다. 권력 불하와 친일 삭제 몰랐던 ’표본실의 청개구리‘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 차원을 연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는 저서 (2023년 초판, 돌베개)에서 이를 미군정을 통한 일제 권력의 불하”라고 불렀다. 위의 글은 모두 ’현대 한국의 원형‘이란 부제를 단 내용의 일부를 토대로 쓴 것이다. 정 교수는 해방 직후사를 구성하는 인간군상과 인간관계의 그물망이 이 책의 핵심 이야기”라고 했다. 이 일제권력 불하를 확고부동하게 굳히기 위해 이묘묵은 총독부 사상전담 검사 나가사키 유조에게 자신을 비롯한 친일파 출세자들의 신상기록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나가사키가 1945년 9월에 그들의 친일 기록들을 소각한 것은 이묘묵 같은 친일파들의 요청도 있었지만 총독부 법무국의 소각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이묘묵의 진짜 친일기록은 소각됐지만 그것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그 친일기록 소각을 정병준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라고 했다. 정 교수는 또 한국 현대사에 그런 결적적인 영향을 끼친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 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진 미군정 초기 3개월이 한국 현대사의 주요 경로를 결정하는 첫 디딤돌이 됐으며, 한국인은 자신들의 운명을 누가 결정했는지도 모른 채 발버둥치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같은 신세였다”고 했다. 그 뒤 미군정은 잊혀져 가던 이승만을 불러들여 그를 최종 최대 일제권력 불하자로 등극시켰다. 그것을 미군정이 계획하고 주도했다는 것은 미군정이 대한경제보국회와 짜고 이승만에게 1000만 원의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제공하면서 김구, 여운형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고, 박헌영은 정판사 위폐사건을 기화로 체포령을 내려 정치무대에서 아예 쫓아내 버린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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