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서양에서는 왜 한국 아이들 입양을 선호했나

서양에서는 왜 한국 아이들 입양을 선호했나
[뉴스]
그는 대학에서 네덜란드어를 전공했다. 처음부터 해외입양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계 네덜란드 입양인들이 그의 인생 방향을 바꾸었다. 서툰 한국말과 어색한 웃음,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섞인 그들의 표정이 오래 남았다. 그들은 분명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한국 사회의 바깥사람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해외입양’이라는 단어를 현실로 체감했다. 1997년 그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국제로타리클럽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유학길이 열렸다. 타국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그는 한국에서 만났던 입양인들과 연락을 이어갔다. 1998년 무렵, 그는 현지에서 ‘Arirang’이라는 한국계 입양인 단체를 알게 된다. 네덜란드로 입양된 한국인은 당시 약 4000여 명으로 추산됐지만, 정작 이 단체의 회원은 200명 남짓이었다. 그마저도 정기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들은 비교적 삶이 안정된 이들이었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지만, 모임 밖에는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삶이 무너지고 심각한 우울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들이거나 자신의 삶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했고, 어떤 이는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한국에서 흔히 상상하던 ‘행복한 해외입양’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었다. 특히 뿌리찾기 과정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당사자보다 현지 가족이나 배우자의 요청으로 시작되는 경우도 많았다. 입양인들은 네덜란드 사회 안에서 살아갔지만, 완전히 네덜란드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와도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두 나라 사이 어딘가에 떠 있는 삶이었다. 그는 통역과 안내를 도우며 점점 더 많은 사연을 듣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해외입양이 단순한 개인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적 비극이라는 사실을 직시했다. 유학생으로 떠났던 그는 어느새 기록자가 되었고, 통역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상담자 역할까지 맡게 됐다. 그렇게 그는 시나브로 활동가로 변해갔다. 그가 바로 해외입양인 뿌리찾기 단체를 이끌고 있는 FPF(Find Parents Family)의 류동익 공동대표이다. 한편, 류동익 대표와 초등학교 친구이면서 10년 전부터 함께 활동해온 차용 공동대표는 강남의 유명한 영어 일타강사였다. 해외입양인의 비극적인 삶을 알게 되면서 일타강사 생활을 접고, 류동익 대표와 함께 해외입양인 뿌리찾기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차용(왼쪽부터) 대표와 류동익 대표가 뿌리 찾기 지원 활동 중에 만난 해외입양인 윤현진 씨와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그들이 뿌리찾기 지원 활동을 진행하면서 만난 안타까운 사연 중 하나는 박승정 씨의 사례였다. 박씨는 미국으로 입양되었으며, 그의 누나는 네덜란드로 입양됐다. 생모는 같지만 생부가 달랐다. 박씨와 누나는 끝내 상봉했지만,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었다. 입양기관에서 보관 중인 생모의 기록이 각각이었던 것이다. 입양기관에서 서류를 조작한 탓이었다. 두 공동대표는 해외입양 문제를 단순한 아동복지나 인도주의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 국제입양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부유한 나라로 이동한 사건이자, 전후 서구 사회가 자신들의 필요와 욕망을 투영해 온 역사였다. 류동익 대표는 특히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사회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왜 그렇게까지 국제입양을 원했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해 왔다. 그들의 설명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첫째는 저출생 문제였다. 전후 유럽은 급격한 출생률 저하를 경험했다. 가족 구조는 빠르게 변했고, 아이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류 대표는 유럽 사회가 이를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니라 국가 유지의 위기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노동력과 공동체 유지, 미래 세대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아이는 점점 ‘사회적 자원’의 성격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입양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확대됐다고 본다. 결국 아이를 데려오는 걸 하나의 사회적 투자처럼 본 거죠.” 유럽의 국제입양 시스템이 상당 부분 제도화되고 산업화됐다는 비즈니스의 관점에도 주목했다. 복지국가의 이미지에 가려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기관, 종교단체, 민간 입양기관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 속에서 입양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아이는 보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서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래 시민으로 간주됐다. 둘째는 기독교 세계관과 선민의식이었다. 류 대표는 유럽 사회 내부에 여전히 강한 ‘구원 서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데려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는 행위가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사랑과 박애를 말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너희를 구원한다’는 시선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국제입양 가정 일부에서 발견되는 과시적 태도도 지적했다. 과거처럼 부를 노골적으로 자랑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자, 해외입양이 일종의 윤리적 소비처럼 기능했다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열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입양이 소비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계 아이들은 순종적이고 적응력이 좋다는 이미지가 퍼지면서 유럽 사회 안에서 ‘모범적 입양아’로 기대를 받았다. 셋째는 제국주의의 잔재였다. 류 대표는 국제입양을 식민주의 역사와 완전히 분리해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 서구 열강이 식민지 사람들을 통제하고 이동시켰던 사고방식이 형태만 바뀌어 이어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흑인을 납치해서 노동력으로 삼았다면, 현대에는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데려와 서구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변형시킨 거죠. 국제입양을 둘러싼 서구 사회의 자기만족적 서사를 경계해야 합니다. 입양을 통해 아이를 구원했다는 정서가 넘쳐납니다. 정작 왜 그 아이들이 원가정과 분리돼야 했는지, 가난한 나라들이 왜 아이를 보내는 구조가 되었는지는 충분히 질문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해외입양은 개인의 선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이면에는 인구정책, 종교적 윤리, 서구 중심주의, 그리고 국가 간 불균형이 뒤엉켜 있습니다.”   누나는 네덜란드로, 본인은 미국으로 입양된 박승정 씨가 생모를 찾는 웹자보. 류동익 대표가 네덜란드 현지에서 만난 한국계 입양인들은 종종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한국 아이들이었을까.” 그는 오랜 시간 그 질문을 추적해 왔다. 그리고 네덜란드 입양기관 관계자들과 현지 양부모들의 말을 들으며, 국제입양이 단순한 인도주의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선명하게 확인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한국 아동은 ‘선호되는 입양 대상’이었습니다.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죠. 우선 한국의 입양 시스템은 비교적 체계적이었습니다. 대상 아동들은 기본적인 백신 접종이 완료된 경우가 많았고, 건강 상태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정리돼 있었습니다. 서류 관리 역시 다른 개발도상국들보다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쟁의 여지가 적다’는 점이었어요. 친부모가 뒤늦게 아이를 찾으러 오거나, 출생 기록이 불명확해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서구 입양시장에서 한국 아이들은 일종의 안정된 상품처럼 취급된 것입니다.” 1975년 11월 26일 덴마크 타블로이드 신문 엑스트라 블라데트(Extra Bladet)에 실린 기사는 매우 충격적이다. 덴마크의 입양기관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서구 국가에 입양 보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 사실상 아이 거래 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서는 특히 한국 아이들이 많이 언급된다. 건강한 아이는 더 높은 금액에 입양되고, 장애가 있거나 아픈 아이는 더 낮은 금액으로 취급된다는 점을 매우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신문은 입양기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입양 희망자들이 아이를 선택”할 수 있으며, 피부색, 건강상태, 성별 등을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또한 기사에는 건강한 아이는 약 1만 덴마크 크로네, 장애아는 약 3600 덴마크 크로네 정도의 비용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며, 마치 아이들이 상품처럼 가격표가 매겨진 당시의 현실을 담고 있다. 한편, 2002년 스웨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대규모 코호트 연구에 의하면, 자국내 해외입양인의 자살시도율이 비입양인에 비해 4.5배, 자살사망률이 3.6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와 사회 부적응 위험이 높게 나타났다. 임상연구가들은 이 집단의 높은 자살률 위험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1975년 덴마크의 유력일간지 Extra Bladet에 실린 아동거래 관련 기사. 당시 유럽의 입양기관들은 한국 입양 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는 공급 구조’로 평가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기간 축적된 해외입양 행정과 민간기관 네트워크는 서구 국가들 입장에서 매우 효율적이었던 것이죠. 아이의 삶과 가족 해체의 문제가 지나치게 행정적 효율과 소비자 관점으로 다뤄졌습니다. 심지어 네덜란드는 국가차원에서 성별과 연령에 따른 입양아동 수요조사가 이루어지고 한국의 입양기관들은 이에 맞추어 입양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위해 한국에서는 납치된 아이들, 잠시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의 서류까지 조작돼 해외로 보내졌지요. 또한 이승만 정권은 단일 민족의 기치 아래 혼혈아들을 죄다 미국으로 보내버립니다. 이 과정에 당시의 고아원은 일종의 아동창고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미군 기지를 이용하는 미국의 경우 공식적인 입양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입양기관을 찾아가 아이들을 납치하다시피 미군비행기에 태워 데려간 사례도 발견되었습니다.” FPF가 의뢰받은 뿌리찾기는 지금까지 약 1000 건에 달한다. 의뢰가 들어오면 경찰청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 진행했다. 그러나 실제 친가족을 확인하거나 연결에 성공한 사례는 300건 정도다. 그마저 모두가 상봉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만남이 성사된 경우는 약 150건 남짓이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기록이 폐기된 경우도 있었고, 입양기관 서류 자체가 잘못 작성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친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가족들이 존재 자체를 숨기려 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어렵게 가족을 찾고도 상봉 직전에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서로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제 입장에서는 가장 힘들어요. 생모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지만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린 상태고, 입양인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미국으로 입양간 40대 남자가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는 이미 6개월 전에 사망했더군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친생부모는 찾을 수 있어도 형제자매는 찾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또한 기대했던 재회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수십 년 만에 처음 만난 가족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을 붙잡고 흐느끼는 장면들. 그 짧은 순간 때문에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견디며, 해외입양인의 뿌리 찾기 지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는 해외입양인들의 증언과 정부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국제입양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시작됐다. 그 결과 유럽의 입양 수입국들은 잇따라 제동을 걸고 있다. 네덜란드는 2030년까지 국제입양을 완전히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과거의 입양 과정에 부정부패와 서류 위조, 아동 탈취 사례가 확인됐으며 국제입양이 더 이상 취약한 아동을 보호하는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국제입양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축소 또는 중단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아이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운영되던 국제입양이 이제는 ‘아이의 권리와 정체성을 빼앗을 수 있는 제도’라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 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네덜란드에 입양된 아동의 국가별 통계 한국 역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과거 수십만 명의 아동을 해외로 보냈던 한국은 오랫동안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해외입양인들에게 국가 차원의 사과를 전한 데 이어, 최근에는 국가 책임 아래 입양체계를 개편하고 해외입양을 단계적으로 종료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해외입양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해외입양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도 ‘가난한 나라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주의’로 설명돼왔다. 전쟁고아를 살리기 위한 조치였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뒤 드러난 기록들과 입양인들의 증언은 그 서사가 지나치게 단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해외입양 송출국 가운데 하나였다. 수많은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 정말 모든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고 싶어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누군가는 충분한 지원만 있었더라면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후유증은 입양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어떤 이는 평생 자신의 이름과 생일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떤 이는 백인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떤 이는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갔지만, 또 다른 이는 인종차별과 학대, 정체성 혼란 속에서 무너졌다. 해외입양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균열을 남겼다. 특히 뿌리찾기 과정은 한국 사회의 무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잘못된 서류, 폐기된 기록, 기억하지 못하는 기관들. 자신의 부모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종종 자료가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이를 보내는 데는 능숙했지만, 다시 연결하는 일에는 지금도 무관심하다.   네델란드의 한국계 입양인 미샤블록 방송인의 책을 번역한 류동익 대표. 물론 모든 해외입양이 비극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가족 안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갔고,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과 기회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도의 문제까지 지워주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결과가 있었는가’가 아니라, 과연 아이와 가족을 그렇게까지 분리해야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지금도 해외입양은 완전히 끝난 일이 아니다. 다만 시대는 달라졌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다. 왜 한국은 오랫동안 아이를 해외로 보내야 했는가. 왜 가난한 부모에게 아이를 키울 조건을 마련해주기보다 이별을 제도화했는가. 그리고 왜 입양인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신의 이름과 가족을 찾아 헤매야 하는가. 해외입양의 역사는 단순한 선행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빈곤, 무지한 아동복지 개념, 여성에 대한 낙인, 혈통 중심 사회, 그리고 국제적 불평등이 뒤엉켜 만들어낸 현대사의 그림자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류동익, 차용 두 대표의 활동은 결국 이 많은 불편함을 끝까지 붙드는 일이기도 하다.이득신 작가 dsshine23@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