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는 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분노하는가 [사회혁신] 지난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에 민주진보 진영은 대체로 이 문제를 선거관리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실수 정도로 여기며 넘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 정부에게는 부정선거를 저지를 동기가 없고, 민주정부인 이재명 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선거관리위원회의 행정적 실수 정도로 판단했다. 그러나 청년들의 반응은 달랐다. 청년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고, 강하게 분노했으며, 실제 행동에 나섰다. 지금은 이 사태가 성조기까지 등장하는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흘러가는 이상한 양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한국의 청년세대가 처음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불공정한 기회 박탈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7일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항의 방문한 참정권 침해 대응을 위한 총학생회 연대행동 관계자들이 투표용지 부족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2026.6.17
세상을 못 바꾸더라도 경쟁만은 공정해야 하지 않나
청년세대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기에, 부정의한 사회를 인정하고 개인 간 경쟁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간 경쟁을 지배하는 규칙만이라도 공정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한 상태에서 개인 간 경쟁마저도 불공정하게 치러진다면 청년들에게 남는 것은 절망뿐일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왜 가짜 정의에 열광하는가』 중에서)
오징어게임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년들에게 오징어게임 자체가 폐지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최대 관심사는 게임이 공정한 규칙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다. 청년들은 오징어게임이 공정하게 진행되어야만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한다면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고, 자신의 고통과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게임이 불공정하게 운영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게 되고, 자신의 고통과 노력은 무참히 배신당하게 된다. 이런 심리를 가진 청년들에게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오징어게임에 참가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불공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쉽게 말해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입사시험장에 갔는데 시험지가 부족해 시험을 보지 못하는 상황과 같은 기회 박탈로 받아들인 것이다.
청년들이 이번 사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국격,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것을 역사책이나 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어떻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비상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청년들의 심리 역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번에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기성세대의 태도는 청년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안 그래도 민주진보 진영에 대한 불신과 불만, 반감이 강했던 청년들, 특히 남성 청년들은 이번 사태를 대하는 민주진보 진영의 모습을 보며 내로남불의 위선적 집단”이라는 인식을 더욱 굳히게 되었고, 강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보수성과 함께 진보화될 가눙성도 가진 청년세대
나는 내 책 『우리는 왜 가짜 정의에 열광하는가』에서 청년세대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친보수적 심리와 연결된다.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보는 대체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에서 찾는 반면, 개인의 성공과 쾌락을 추구하는 보수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개인에게서 찾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가난하다고 할 때, 진보는 그 원인을 불평등한 사회제도에서 찾으며 사회개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반면 보수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을 원인으로 보며 개인들에게 더 노력하거나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보주의가 우리주의 혹은 집단주의 심리, 보수주의가 개인주의 심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년들이 개인주의 세대라는 것은 그들이 보수화될 가능성이 높은 세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년들은 동시에 청년세대 특유의 심리도 가지고 있다. 청년세대는 정의감이 강하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며, 열정적이고 행동적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청년들은 늘 사회 개혁과 역사 진보의 선봉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다시 말해 청년세대는 모든 세대 가운데 가장 진보화될 가능성이 높은 세대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세대는 보수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개인주의 심리와 진보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청년세대 특유의 심리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청년들이 사회정의보다 개인주의적 공정을 더욱 중시하는 것은 강한 정의감과 개인주의가 타협한 결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청년세대를 단순히 보수화된 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수화될 가능성과 진보화될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세대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페미니즘 이슈로 시작된 남녀 갈등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남성 청년들뿐 아니라 여성 청년들까지 민주진보 진영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동안 남성 청년들은 극우 정치세력을, 여성 청년들은 민주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런데 그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청년세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까지만 해도 민주진보 정치세력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당시에는 남녀 청년들 사이에 민주개혁적 정치성향의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부 조사에서는 오히려 남성 청년들의 지지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청년들은 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민주진보 정치세력에서 이탈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진보 진영은 화려한 개혁 구호를 내세웠지만 세상은 더 나빠지고, 청년들의 삶 역시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청년들로 하여금 민주진보 진영을 민주주의와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위선적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남녀의 정치성향이 정반대로 갈라진 직접적인 계기는 남녀 갈등이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페미니즘 이슈가 전면적으로 부상하면서 남녀 갈등이 격화되었고, 페미니즘에 반발하던 남성 청년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준다고 여긴 이준석을 매개로 극우 정치세력 지지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여성 청년들은 민주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하게 되었다.
만약 페미니즘 문제로 인한 남녀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청년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점진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것은 청년들 내부의 남녀 갈등이 진정되면 남성 청년들뿐 아니라 여성 청년들까지도 민주진보 진영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이 뚜렷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적 사회개혁만이 청년들 극우화 막을 수 있어
청년세대는 강한 개인주의 성향 때문에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계급적 위치와 청년세대 특유의 심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청년들은 원칙적으로 극우보수가 되기 어려운 집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청년세대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극우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기보다 지지할 만한 정치세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단지 양대 정치세력 가운데 민주당을 더 싫어할 뿐이다. 따라서 한국에 오징어게임 자체를 폐지하려는 정치세력, 즉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성장한다면 청년들은 다시 진보화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뉴욕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와 같은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한국에 등장한다면 청년들의 정치적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재명 정부가 근본적인 개혁에 실패한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이미 청년세대는 전 세대 가운데 정신건강 수준이 가장 나쁜 집단이며, 특히 남성 청년들을 중심으로 극우적 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청년세대 전체가 극우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극단화되는 청년들의 비율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기성세대, 특히 민주진보 진영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행동에 나선 청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며, 청년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국가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으며, 청년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청년들의 극우화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한국 사회가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psythkim@naver.com